스페인 여행기를 처음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땐 이렇게 연재가 길어질 줄 몰랐어요. 할 얘기가 많을 거라고 생각 안 했거든요. 그런데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자꾸 하고 싶은 얘기들이 생기더라고요. 여행 다녀온지도 벌써 석 달이나 지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도 그러네요. 나이 들어 주책이 늘어가는 건가요?
그라나다가 고지대라 제법 쌀쌀했는데 일출을 보겠다고 나와서 알함브라 투어까지 하고 나니 많이 피곤하더군요.
<파라도르 데 그라나다> 호텔에서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숙소에서 좀 쉬었어요. 돌아오는 길에 보니 우리 숙소 바로 앞에 있는 레스토랑들이 성업 중이더군요. 추운 날씨에도 야외 테이블을 포기하지 않는 유럽 사람들이 정말 대단하다 싶었어요.
성 니콜라스 전망대에 다시 가서 일몰 풍경을 보고 싶었는데 몸이 무거워서 도저히 안되겠더군요. 아쉽지만 숙소 테라스에서 마을에 노을이 내리는 분위기만 보고 잠깐 눈을 붙였어요. 여행 후반부로 접어드니 체력 부족한 티가 많이 나더군요. 아마 남편이랑 같이 여행을 갔다면 야경투어를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엄마의 힘이 위대한 건지 한창 팔팔할 나이인 아들이 나 때문에 더 많이 볼 수 있는 걸 놓치고 가게 할 순 없다 싶으니 억지로 무거운 몸을 일으키게 되대요.
알바이신 지구의 밤 풍경도 구경할 겸 시내까지 걸어가기로 했는데 골목을 빠져나가 조금 걷다 보니 길에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요. 오래된 동네이다 보니 골목이 좁아서 작은 차 한 대라도 지나갈라치면 벽에 바짝 붙어 피해야 해서 생판 처음보는 외국 사람들과 자주 얼굴을 가까이 맞댔네요. 무섭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크리스마스 조명이 아름답게 켜진 그라나다 밤거리는 주말 저녁이라 더 그랬겠지만 축제 기간인 것처럼 엄청난 인파로 시끌벅적했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는데 그 속에 있으니 갑자기 흥이 오르면서 언제 피곤했냐는 듯이 몸이 가벼워지더군요.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아요.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가 산타페 협약을 의논하는 장면을 묘사한 동상 정면에서 가이드님과 만났는데 그날 야경투어를 신청한 사람이 우리밖에 없어서 씩씩한 청년 가이드님과 셋이 오붓하게 프라이빗 투어를 하게 되었네요.
가이드 투어를 하다 보면 가이드님들의 개인적인 사연들도 종종 듣게 되는데 그날 만난 분도 나이답지 않게 많은 인생 경험을 하셨더라고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서 대기업에 다니다가 다시 스페인으로 공부하러 와서 직장 생활도 해보고 지금은 가이드 투어를 하며 독일인 여자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한다는 가이드님의 얘기에 막내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귀를 기울이더군요. 이제 막 부모의 품을 벗어나 독립하는 아들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생의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야경투어 첫 코스는 산 미구엘 알토 전망대였어요. 버스를 타고 알바이신 지구로 들어가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계단을 제법 올라가야 했는데 그 근방이 집시들이 모여사는 동네라고 하니 괜히 으스스하더군요. 더군다나 올라가는 도중에 아랫동네에서 큰 총소리 같은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몇 번 났고 그 소리에 놀란 동네 개들이 여기저기서 무섭게 짖어대서 더 놀랬죠. 덕분에 막내가 놀란 엄마 손을 꼭 잡고 등을 토닥여주며 올라가느라 많이 애썼어요. 가이드님도 보기보다 무서운 동네는 아니라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겨도 특수부대 출신인 자신을 믿으면 된다며 긴장을 풀어주셔서 무사히 올라갈 수 있었어요.
가이드 투어가 아니라면 절대 그 시간에 올라가지 않았을 곳이라 올라갈 때는 이런 곳에 누가 올까 했는데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야경을 보기 위해 모여있어서 한결 맘이 놓였어요. 성 니콜라스 전망대보다 높은 곳이라 그런지 알바이신 지구뿐만 아니라 그라나다 시내 전체가 다 내려다보여서 야경이 정말 멋지더군요. 가이드님이 이곳을 투어 코스에 넣은 것은 자신이 처음이라며 자부심을 내보이시더라고요.
다시 한번 그라나다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때는 일몰 때 올라가 보고 싶어요. 성 니콜라스 전망대보다 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는 와인을 마시는 연인들도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와인을 마시는 기분은 어떨까 궁금하더군요.
산 미구엘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은 무섭지 않았어요. 골목길을 돌아 돌아 새벽 일출을 보러 왔던 성 니콜라스 전망대에 도착해 야간 조명에 비친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했어요. 저녁이라 아침보다 사람들도 많고 버스킹 하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아쉽게도 플라멩코 추시는 분들은 못 봤구요.
내려오는 길에 아랍 거리에 들러 아침 풍경과는 사뭇 다른 흥겨운 분위기도 즐겼네요. 막내랑 여기가 새벽에 본 그 길 맞냐며 가게 문들이 닫혀있을 때와 열려있을 때가 이렇게 다르구나 하면서 신기해했어요. 지나가는 길에 한글이 쓰여진 캔디 가게가 있어서 깜짝 놀라기도 했구요. 한국 관광객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얘기겠죠?
새벽에는 그냥 예쁜 문이구나 예쁜 집이구나 하면서 지나쳤던 골목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가이드님으로부터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다시 시내까지 내려왔더군요.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그리고 카를로스 5세가 잠들어 있다는 왕실 예배당은 이미 문을 닫은 후라 건물 밖에서 설명만 들어야 했어요. 레콩키스타에 대한 얘기는 이미 알함브라 궁전 투어 때 다 들었던 거라서 건너뛰고 벽에 크게 쓰여있는 글씨들의 의미가 궁금해서 여쭤봤더니 인근 대학교 학생들이 쓴 낙서라고 해서 깜짝 놀랐죠. 이름 같은 것도 있고 '우리가 짱이다!' 같은 글귀도 있다고 하셔서 그런 행위를 젊은이들의 귀여운 패기라고 봐야 할지 소중한 문화재를 훼손하는 범죄라고 봐야 할지 참 난감하더군요. 예배당 앞 작은 광장은 버스킹 장소로 자주 이용되는지 여기저기 연주를 준비하는 분들이 계셨어요.
세상의 모든 향신료를 구경할 수 있다는 알카세이라 재래시장도 문을 다 닫았더군요. 그걸 보고 나니 제 체력에 그라나다에서 2박 3일만 하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장의 유래나 건축물들의 특징에 관한 설명을 간단히 들으면서 그라나다 대성당으로 갔는데 그 곳도 역시 문을 닫은 후였죠. 다음에 그라나다를 꼭 다시 와야 할 이유가 그렇게 하나 더 늘었답니다. 다른 지역의 대성당에 비해 그라나다 대성당의 규모는 좀 작아 보였는데 처음 지어지던 시절에는 유럽에서도 손꼽히게 큰 성당 중 하나였다는군요.
원래 모스크가 있던 자리에 지은 것인데 1523년에 첫 삽을 떴지만 흑사병 때문에 공사가 계속 지연되어 완공되는데 18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가 완공시기가 늦어지면서 르네상스 양식이 가미되었고 공사에 동원된 무어인들의 영향 때문인지 내부 장식은 아라베스크 문양이 들어간 무데하르 양식까지 가미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야경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타파스 바였어요. 가이드님을 따라 타파스 바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에 들어서니 좁은 골목에 식당에서 내어놓은 테이블들과 사람들이 꽉 차 있어서 토요일 밤의 열기를 제대로 느끼게 해주더군요. 밤늦은 시간이라 추워서 그런지 식당 내부에 빈자리가 없었어요. 어차피 간단하게 한잔하고 갈 거라서 우리는 비어있는 야외 테이블에 얼른 자리를 잡았죠.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와는 달리 그라나다나 세비야에선 음료를 한잔 시키면 맛보기 타파스가 세트로 제공된다고 해요. 제공되는 메뉴는 그날 그날 다르다고 하구요. 막내와 저는 클라라 맥주와 병 맥주를 하나씩 시키고 어떤 메뉴가 나올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바게트 빵 위에 소고기 떡갈비 맛이 나는 미니 패티가 올라간 타파스가 나와서 맛있게 먹었어요. 좀 덜 피곤했다면 몇 개 더 시켜 먹었을텐데 다음날 세비야로 가서 계획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니까 더 이상 무리하면 안되겠더라구요. 아쉽지만 다음날 산티아고로 가신다는 가이드님에게 행운을 빌어드리며 야경투어를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왔죠.
다음날 아침 테라스에 나가서 기지개 한번 펴고 호스트가 추천한 숙소 근처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다가 간단하게 배를 채웠어요. 크루아상 샌드위치는 먹어도 먹어도 안 질리더라고요.
택시를 타기 위해 큰 길로 내려가며 예쁜 알바이신 골목 풍경을 한 번 더 눈에 담아주고 우리는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어요. 그라나다에서 세비야까지는 기차로 가든 버스로 가든 시간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아요. 표값은 차이가 많이 나구요. 그리고 세비야로 가는 고속 버스편은 자주 있어서 막내를 오미오에 친구 초대해서 얻은 10유로짜리 크레딧을 사용하기 위해 마드리드에 도착해서 표를 예매해도 문제가 없었어요.
그라나다 고속버스 터미널은 우리나라 중소도시 고속버스 터미널과 거의 흡사했는데요 다만 버스 좌석은 많이 좁더군요. 어깨 넓은 사람들은 같이 앉으면 불편할 것 같더라고요. 스페인에서는 좌석번호와 상관없이 먼저 타는 사람이 임자라는 얘기가 있어서 우리는 출발 20분 전부터 버스 앞에 줄을 서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들 자기 좌석을 찾아서 앉더군요. 사람 사는 세상이 다 똑같다 보니 스페인에도 가끔 경우 없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얘기가 나왔나 봐요. 출발 시간도 도착 시간도 잘 지켜져서 여러모로 편안하게 이용했어요.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서 퍼온다는 생수를 나눠 마시며 그라나다와 이별하고 세비야로 향한 막내와 저는 3시간 만에 세비야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또 잊지 못할 일몰을 구경했다지요. 여러분 다음 주에는 세비야 여행기로 돌아올게요. 수요일에 또 만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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