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까지 기차로 3시간 30분 정도 달려 도착하니 해가 벌써 졌더군요. 겨울 스페인은 오후 5시만 돼도 캄캄해지더라구요. 그라나다는 우리나라로 치면 북한산 높이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역 밖으로 나오니 제법 쌀쌀했어요. 택시를 타고 가면서 보니까 길에 사람이 많더군요. 다음날 가이드분에게 들은 얘기인데 그날이 12월 1일이라 크리스마스 기념 조명이 처음으로 켜져서 구경나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해요.
원래 동선의 효율성만 따진다면 바르셀로나에서 그라나다로 바로 오는 것이 맞는데 막내와 제가 마드리드를 먼저 들렀다 온 이유는 바르셀로나에서 그라나다로 오는 기차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어요. 모든 기차가 빨라야 6시간 반, 길면 10시간 넘게 걸리기도 하더라구요. 그래서 바르셀로나에서 오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비행기를 타고 그라나다로 오시더군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비행기 타는 걸 싫어해서 아들에게 마드리드 먼저 들렀다 그라나다, 세비야 순으로 돌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저녁 9시 반 출발이라 세비야에서 마드리드 공항으로 가도 시간이 넉넉할 거 같았거든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그라나다로 먼저 왔다면 그라나다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못 보고 갈뻔했더라구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는 대도시라 그런지 11월 마지막 주에 미리 길거리 조명도 키고 크리스마스 마켓도 오픈했는데 그라나다와 세비야는 12월 1일부터 점등했기 때문에 우리는 동선을 바꾼 덕분에 운 좋게 방문하는 모든 도시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구경할 수 있었던 거죠.
그라나다의 숙소는 에어비앤비로 알바이신 지구에 있는 콘도를 예약했어요. 호텔도 끌리는 곳이 있었지만 원래 주방이 있는 숙소를 선호하기도 하고 우리나라로 치면 북촌 한옥마을같은 알바이신 지구 특유의 분위기를 좀 더 느끼고 싶었어요. 그래서 골목도 좁고 오르막 내리막이 많은 지역이라 불편할 걸 알면서도 그곳을 선택한 거죠.
우리 숙소는 큰 길에서 그렇게 멀지 않아서 예상보다 접근성이 좋았는데 문제는 첫날 택시 기사님이 잘못된 골목에 내려주셔서 숙소까지 큰 짐을 끌고 많은 계단을 내려가야 해서 힘들었어요. 그리고 호스트가 독일에 살면서 에어비앤비 메세지로만 소통하는 사람들이라서 소통이 실시간으로 안되는 문제가 있었네요. 우리는 지내는 동안 별 문제가 없어서 괜찮았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불편했겠더라구요.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구할 때는 출발 전에 호스트와 좀 더 많이 소통해보고 리뷰도 좀 더 꼼꼼하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숙소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고급스러웠어요. 침대도 소파베드를 포함해서 3개나 있었구요. 덕분에 2박 3일 머무는 동안 옛 스페인 가옥의 정서도 느껴보며 진짜 즐겁게 지냈네요.
작은 발코니로 나가보니 알함브라 궁전에 조명이 들어와있는 것이 보이더군요. 추워서 오래 구경하진 못했지만 공기도 상쾌하고 동네 분위기도 정겨워서 좋았어요. 봄가을에 왔다면 발코니에 앉아 좋은 경치 감상하며 밥을 먹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걸 못하는 건 좀 아쉬웠네요.
막내의 마트 나들이는 그라나다에서도 쭉 이어졌는데 마침 숙소 바로 근처에 아시안 마켓이 있다고 신나서 나가더니 토마토소스에 버무린 참치캔이랑 신라면을 같이 사 왔더군요. 그래서 그날 저녁은 라면을 끓여 먹었어요. 남은 국물에 누룽지도 넣어서 얼큰하게 말아먹구요. 쌀쌀한 날씨에 뜨끈한 라면 국물 한 모금 딱 좋더군요. 애들이 다 크고 나서는 라면 먹을 일이 줄어들었는데 스페인 가서 1년치 먹을 라면은 다 먹은 것 같아요.
다음날 아침엔 일찍 숙소를 나와 성 니콜라스 전망대로 향했어요. 해 뜨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 마드리드에서 숨 막히는 아침 광경을 보고 난 후 막내와 그라나다에 가면 또 일출을 보자고 약속했었거든요. 숙소에서 성 니콜라스 전망대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더군요. 가파른 오르막길이 아니었다면 5분 만에 도착했을 것 같아요. 혹시라도 일출시간을 놓칠까 조바심 내며 올라갔는데 다행히 막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더라구요.
여명에 물든 알함브라 궁전은 정말 멋졌어요. 뻥 뚫린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 시에라 네바다 산맥도 보이고 갈색과 오렌지색이 섞인 예쁜 빛깔의 지붕들과 흰색 벽들이 조화로운 알바이신 지구의 모습도 다 내려다 보이고 모든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지요. 우리가 힘들게 스페인까지 날아온 이유가 바로 이런 광경을 보고 싶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막내와 저는 마드리드 왕궁 앞에서 쉴 새 없이 '좋다!'를 연발했던 것처럼 알함브라 궁전을 바라보면서도 또 '너무 좋다! 아침잠을 포기하고 올라와보길 잘했다' 하면서 서로를 칭찬했어요.
성 니콜라스 전망대도 일출보다 일몰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곳이어서 일몰 시간에 맞춰서 오면 플라멩코 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관광객도, 소매치기도 많다고 하는데 해 뜨는 시간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마드리드에서 그랬듯이 인파에 치이지 않고 마음 편하게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죠. 그래도 마침 한국인 가족 한 팀을 만나서 서로 가족사진 품앗이를 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부지런해요.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알바이신 지구 골목골목을 마치 우리 동네인 양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구경했어요. 이른 아침이라 인적이 드물어서 바닥에 깔린 자갈의 형태와 문양까지도 놓치지 않고 다 볼 수 있었지요. 멀리서 보면 다 흰 벽에 갈색 지붕을 얹은 집들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골목 안을 돌아보면 조금씩 색이 다른 건물들도 있어서 분위기가 다르더라구요.
그리고 내려오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면 알함브라 궁전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고 또 한 골목 돌아 고개를 들어보면 고풍스러운 대문들과 하얀 타일 위에 파란 글씨로 예쁘게 이름을 새긴 명패가 보이고 담벼락 안에서 삐죽삐죽 자라고 있는 푸른 사이프러스 나무들과 꽃나무들도 보이고... 800년 전부터 이미 이런 높은 지대에 이토록 아름다운 동네를 만들어서 살았던 아랍인들의 건축 기술과 문화 수준이 정말 놀랍게 느껴졌어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만한 자격이 충분한 곳이었습니다.
골목이 많아서 제법 걸었지만 천천히 구경하면서 걸어서 그런지 중심가까지 내려왔는데도 힘들지 않았어요. 아침을 먹으러 카페에 들렀는데 주문을 할 때 영어가 잘 통하지 않더라구요. 열심히 손짓 발짓 해가며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주문했는데 그냥 크루아상 빵만 갖다 주더군요. 사진을 보여주거나 파파고 같은 어플을 쓸 걸 그랬나 후회가 됐어요. 시간이 많았으면 다시 주문했을 텐데 9시에 알함브라 궁전 가이드 투어를 예약해둬서 시간이 빠듯했죠. 아쉬웠지만 카푸치노 한 잔에 맨빵만 먹고 나왔네요.
그라나다에서 버스를 두 번 이상 타실 거라면 교통카드 꼭 사시길 추천드려요. 교통카드 없이 타면 1.4유로인데 2유로짜리 교통카드에 몇 유로 충전을 해서 타시면 한번 타는데 0.4유로예요. 교통카드 구입 방법은 검색하시면 많이 나옵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교통카드 1장으로 여러 사람이 같이 탈 수 있어요. 이사벨라 광장에서 알함브라궁전으로 미니버스를 탔는데 가는 길이 어찌나 가파른지 버스 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가이드님이 꼭 버스를 타고 오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남편의 고향에 놀러 왔다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만년설과 그라나다의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아예 삶의 터전을 옮겨버렸다는 열정 넘치는 가이드님과 매표소 입구에서 만나 드디어 우리가 그라나다까지 달려온 이유인 알함브라 궁전을 만나러 입구로 향했어요. 투어는 알카사바(군사 요새), 나사리 궁, 카를로스 5세 궁, 헤네랄리페(여름 별궁) 이렇게 총 네 가지 코스로 진행되었는데요 가이드님의 전문성과 세심한 돌봄 덕분에 들인 돈과 시간이 진심으로 하나도 아깝지 않은 투어가 되었답니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니 액운을 막고 건강과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파티마의 손이 우리를 반기고 있더군요. 그리고 햇볕 좋은 곳에서는 어김없이 고양이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요 궁전 사무실 직원들이 돌보는 고양이들이라고 하더군요. 놀랍게도 그 숫자가 60여 마리나 된다고 해요. 사진 속 고양이가 그중에서도 가장 대장이라고 하더군요. 저처럼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분들은 놀라실 수 있는데 사료를 충분히 먹고사는 녀석들이라 사람들을 계속 따라다닌다든가 하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라는 곡 아시나요? 저는 피아니스트 임현정 님이 야외공연장에서 연주하신 버전을 좋아해서 자주 듣는데요, 새소리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떨어지는 물소리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스테인드글라스에 부딪혀 흩어지는 빛의 향연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해서 들으면 저절로 행복해져요. 그런데 그 곡이 친구가 보내준 그림엽서 한 장을 보고 드뷔시가 깊은 감흥을 받아 작곡한 곡이라는 걸 가이드님의 설명을 듣고 처음 알았네요. 천국으로 가는 열쇠가 새겨진 와인의 문(La Puerta del Vino)이라고 부르는 이 건축물이 바로 그 그림엽서에 그려져있었다고 합니다. 고작 이 문 그림 하나 만으로 그런 아름다운 곡을 작곡했다니 예술가들의 감성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네요.
9세기에 군사요새로 지어졌다는 알카사바는 알함브라 궁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알함브라는 '붉은 성'이라는 뜻이래요. 그 지역 토양이 붉은 철이 많이 함유된 진흙이라 그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아올렸기 때문에 성 전체가 붉게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죠. <Alhambra>에서 'h'가 묵음이라 현지어로 발음하면 '알람브라'가 맞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워낙 알함브라로 많이 알려져 있어서 한국 가이드분들은 다 '알함브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전망대로 가는 길에 드라마 <알함브라의 추억>에 나왔던 지하 감옥 입구도 보고 프랑스군이 점령했다가 도망가면서 다 파괴하고 가는 바람에 집터만 남은 군사들의 숙소와 공중 목욕탕 구역도 구경했는데 소중한 유적들이 파괴된 현장을 보니 괜히 제가 다 속상하더군요.
침략해 들어오는 적들을 감시하기 위해 높게 지었던 탑들은 이제 그라나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요 전망대 끝에 서서 내려다보니 입을 다물 수 없는 장관이 펼쳐지더군요. 그냥 하루 종일 서서 구경해도 지루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작년에 친구들과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로마와 베니스, 피렌체가 다 좋았지만 특별히 아시시를 갔을 때 같이 오지 못한 가족들에게 가장 미안한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는 그라나다에서 그때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어요. 이 좋은 풍경을 막내와 저만 보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더라구요. 언젠가는 꼭 우리 가족 완전체로 다시 가보고 싶어요.
아쉽지만 이번 주 여행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는 알함브라 궁전의 가장 핵심 장소인 나사리 궁 탐방기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다음 주도 함께 해주시면 좋겠어요. 여러분 우리 수요일에 또 만나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