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교회 제자반 모임에서 구원과 중생 그리고 천국에 대해서 배우는 중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어떤 집사님이 자꾸 천국이 나온다는 드라마 이야기를 하셨다. 마음속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으면 말하지 않고 참기는 힘든 법이다.
몇 개의 클립을 찾아보니 설정이 재미있다. 죽은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지옥 역에서 빨려 나가기도 하고 공항처럼 보이는 천국 역에서 내려 수속을 밟기도 한다. 사랑하는 남편과 꿈꿔왔던 큰 집, 아프지 않고 건강한 젊은 남편, 예쁜 아가씨가 되어 지켜보는 고양이, 주인을 기다리는 반려견들, 밝고 맑고 아름다운 날씨 등등, 현실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천국을 표현하고 있다.
어제 살아있던 사람이 오늘 죽었다고 해서 어떻게 그 존재 자체가 이제는 소멸되었다고 여기겠는가? 꼭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상갓집에 가면 좋은 곳에 가셨을 거라고 위로를 건넨다. 이렇듯 사후세계는 우리의 관심 주제 중 하나다. 폴 영의 <오두막>에서는 주인공이 먼저 하늘나라로 간 어린 막내딸이 푸른 잔디밭에서 예수님과 뛰어놀고 있는 장면을 보고 오열한다.
판타지 웹툰이나 드라마뿐 아니라 천국을 소재로 하는 문학작품도 많이 있다. 천국까지 가는 여정을 다룬 번연의 <천로역정> 같은 고전은 나다나엘 호오돈에 의해 <천국으로 가는 열차>라는 단편으로 재창조되기도 한다. C.S. 루이스의 꿈이라는 형식을 빌린 <천국와 지옥의 이혼>도 천로역정이나 천국으로 가는 열차의 오마주가 강하게 느껴진다. (So I awoke, and behold it was a dream! ) 천국을 소재로 삼은 근래의 문학작품으로는 미치 앨봄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스캇 펙의 <저 하늘에서도 이 땅처럼>이 있다. 두 작품 모두 천국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로 유명한 미치 앨봄이 만나야 할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천국 이야기를 썼다면 정신과 의사였던 작가인 스캇 펙이 그려낸 천국의 이미지는 개인의 선택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 죽음 이후 별다른 가구가 없는 작은 방에서 눈을 뜬 주인공은 이곳에서도 꾸준한 성장과 더 큰 일에 대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 작품 다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가 나와서 이 글을 쓰면서 이 내용이 이 책인지 저 책인지 헛갈리기도 하였다. 남편들이여, 아내에게 잘하자)
교회에서도 가정이 천국의 모형이라고 배우긴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문학 작품에서 그리는 천국과는 꽤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하여 비유로 많이 말씀하셨다. 비유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경우도 있었다. 내세가 없다는 사람들이 한 여자가 남편이 죽어 여러 남자와 결혼하는 경우 천국에서는 누구의 아내가 되냐는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 목적의 괴상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의 대답을 그대로 옮겨 놓자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중략)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 하시니라 마가복음 12:24-27
오해,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천국이 이러하다 저러하다 그래서 가능하다고 한 사람들은 숱한 오해를 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만들고자 하는, 이상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한 사람들은 되려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아리안 주의 이상 사회를 꿈꾸었던 나치 독일이나 빈부격차가 없는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킬링필드도 마다하지 않은 크메르루주 정권 등 역사의 과오가 다 천국을 자기 맘대로 만들겠다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그러나 천국은 마치…로 시작되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양과 염소가 나뉘고 알곡과 가라지가 나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천국은 겨자씨와 같고 가루 안에 넣은 누룩과 같다. 예수님은 자라고 성장하며 팽창하고 역동적인 이미지의 천국을 알려주셨다. 고정된 어느 장소로서가 아니라 천국은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셨다. 신학자들은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이 땅의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결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구절이 있다. 선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은 구원을 ‘이 땅에서는 천국을 살고 죽어서는 천국을 가는 것’으로 정의하셨다. 예수님 믿은 지 얼마 안 된 친구가 불편한 관계였던 어떤 학부모에게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함께 녹색 어머니 봉사를 하고 어색하게 다가가 사과를 했는데 생각 외로 쿨하게 사과를 받아주더라고 했다. 집으로 오면서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단다. 그야말로 천국을 누린 것이다.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대 교황들이 거처했던 사도 궁에서 나와 산타마르타 게스트 하우스의 소박한 방에서 생활하셨다고 한다. 어떻게 당연한 것으로 주어진 권리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싶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있는 성당에 매일 전화를 하시며 큰 위로를 주셨다는 교황님은 참으로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다가 천국을 가신 분이 아니셨을까.
-가정의 달 5월, 천국의 모형인 가정에서 천국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