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밤 우리의 첫 행선지는 <스페인 광장>이었습니다.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는 건 알았는데 캄캄한 밤에 구글맵에만 의존해 찾아가다 보니 처음엔 입구를 못 찾아서 둥근 형태의 건물 외벽을 반바퀴 정도 돌았답니다. 밖에서 볼 때는 불빛이 보이지 않아서 문을 닫았나 싶어 살짝 불안해질 즈음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이 보여 그 앞에서 잠깐 기웃거렸어요. 막내랑 서로 쳐다보며 '여기가 맞나?'하면서 중얼거리는데 누가 나오더군요. 그래서 '스페인 광장으로 가려면 여기로 들어가면 되느냐?'라고 물었더니 다행히 맞다고 해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가 보았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따라 조금 걸으니 마치 '짜짠~'하는 것처럼 뻥 뚫린 광장이 나타나 정말 반가웠어요.
매우 한산했던 광장 건물 바깥쪽과는 달리 광장 안쪽에는 야경을 즐기러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어요. 광장 곳곳에 예쁜 조명들도 많이 켜져 있고 누군가가 연주하는 멋진 색소폰 연주 소리도 울려 퍼지고 있어서 다른 세상 같았죠.
1929년 아니발 곤살레스가 <이베로 아메리칸 박람회>를 위해 설계했다는 <스페인 광장>은 사진으로 볼 때의 느낌보다 훨씬 더 넓고 웅장했는데 반달 모양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따라 인공운하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박람회장이라기보다는 작은 강가에 지어 놓은 고풍스러운 궁전처럼 보였어요.
운하 위에 놓인 4개의 아치형 다리들은 스페인이 통일되기 이전에 있었던 4개의 왕국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색감의 타일과 도자기 재질의 장식들로 치장되어 있어 어두운 밤에 봐도 무척 예뻤죠. 광장 안쪽 벽을 따라 설치되어 있는 49개의 타일 벤치들은 스페인에 있는 도시들의 역사적 스토리를 담은 타일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밤이라서 아주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처럼 보였네요.
광장 중앙에는 초록색 조명을 받는 분수가 시선을 끌고 있었는데 다른 분들 사진을 보니 조명 색깔은 때마다 다른 거 같더군요. 화려한 장식이 있는 분수는 아니었지만 초록색 물기둥만으로도 충분히 보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인증숏 찍을 때 포인트도 되고요.
<스페인 광장>은 24시간 개방하고 있지만 저녁 10시가 되면 분수가 꺼진다고 하니 야경을 보러 가시는 분들은 그전에 가시는 걸 추천드려요.
제가 <스페인 광장>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광장 바닥 장식이었는데요, 옅은 색 자갈을 정교하게 붙여 만든 바탕 위로 짙은 색 자갈들로 기하학적 무늬를 반복적으로 수놓듯이 장식해 놓은 모습이 마치 그라나다 알바이신 지구의 작은 광장들을 크게 확대해 옮겨놓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에요. 초록 조명을 받아 신비함을 더하는 중앙 분수대를 큰 기하학적 문양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멋지던지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그 모습을 감상해 보고 싶은 맘이 들 정도였죠.
운하에는 보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아까부터 울려 퍼지고 있던 색소폰 연주 소리를 들으며 광장 양쪽 끝에 있는 두 개의 아름다운 탑을 배경으로 보트 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로맨틱 영화의 한 장면을 실사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말랑말랑해지더군요. 보트에서 흘러나오는 꺄르르 하는 웃음소리도 참 듣기 좋았구요. 다음에 세비야에 간다면 남편과 함께 보트를 타고 운하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타원형으로 길게 뻗은 회랑을 걸으며 광장을 내려다보면서는 박람회가 열렸을 때 이 광장을 찾아온 사람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잠시 상상해 보았어요. 유럽 도시 어디나 광장은 많지만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은 특별히 더 웅장하면서도 독특해서 당시 구경 온 사람들에게도 많은 감흥을 주었을 것 같아요.
광장의 밤 풍경을 여유롭게 더 즐기고 싶었지만 시내 야경을 구경하러 가려면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에 막내와 저는 마지막으로 2층 전망대에 올라가 보기로 했어요. 저녁을 먹을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서 처음 들어올 때보다 한산해 사진 찍고 구경하기가 좋았어요. 난간에 기대어 잠시 아름다운 광장을 모습을 감상하다가 다음날 아침에 다시 와보기로 하고 광장을 빠져나왔지요. 그리고 트램을 타고 시내로 곧장 향했어요.
지난 주에 보여드린 세비야 시청사 앞 광장의 낮 풍경 기억나시나요? 비가 와서 흐린 날씨라 더 그랬겠지만 좀 을씨년스러웠잖아요?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만에 그 곳이 이렇게 화려하게 변해있었더랍니다. 트램에서 내려 시청사 앞 광장으로 들어서는데 큰 골목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진 화려한 조명들이 어찌나 환상적이던지 마치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죠.
특히 크리스털 커튼과 수십 개의 샹들리에들을 달아놓은 것 같은 루미나리에의 환상적인 분위기는 도저히 사진으로는 다 전달할 수가 없어 정말 안타깝네요. 막내와 같이 '와!'를 몇 번이나 외쳤던지요. 셀카를 찍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우리도 자리를 조금씩 옮겨가며 열심히 셀카를 찍었더랍니다. 하지만 핸드폰으로는 예쁘게 찍히지 않아서 많이 아쉬웠어요.
광장에서 한참을 신나게 구경하다가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 봤더니 크고 화려한 조명들이 좁고 긴 골목을 따라 끝도 없이 매달려있어서 또 한 번 더 놀랐죠. 실제로 보면 사진에서 보이는 것보다 조명들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 아래를 지나가면 진짜 입이 안 다물어지거든요. 막내와 저는 앞선 세 도시에서도 운 좋게 길거리 크리스마스 조명들을 다 구경했지만 세비야가 가장 인상적이라는 데 서로 동의했지요.
화려한 조명에 홀려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다가 밥때를 놓친 우리는 아시안 마켓에서 여러 나라의 컵라면을 사와 호텔방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때웠어요. 돌아갈 짐을 싸며 막내와 저는 '우리 그래도 큰 사고 없이 알차게 즐거운 여행하고 돌아간다'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했지만 '벌써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니!' 하며 많이 아쉬워하기도 했죠.
다음 날 야경 구경 만으로는 많은 아쉬움이 남았던 <스페인 광장>의 일출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왔어요. 한 번 가봤다고 가는 길이 제법 눈에 익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입구를 쉽게 찾았지요. 날씨가 잔뜩 흐리긴 해도 역시 아침이라 그런지 밤보다는 광장 건축물 전체의 색감이 확연히 선명하게 보이긴 하더군요. 타일 벤치들의 색감도 잘 느껴지구요.
그날 아침 광장엔 사람들이 없었어요. 날씨가 워낙 흐려서 아름다운 일출 광경을 기대하기 힘드니까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구름이 짙어서 그런지 하늘은 회색빛 말고는 그 어떤 빛깔도 보여주지 않았어요. 날씨가 좋지 않아도 그동안은 늘 아름다운 일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마지막 날은 아쉬운 마음 남겨 다시 오라고 그러는지 세비야의 하늘은 예쁜 일출 광경을 내어주지 않더군요. 그래도 회랑의 유명한 천장 장식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만큼의 햇빛은 내어주더군요. 운하에 탑이 예쁘게 비치는 모습도 볼 수 있게 해주고요.
비록 아름다운 일출 광경은 보지 못했지만 사람 없는 광장을 한참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꼼꼼히 구경하니 그것도 참 좋았어요. 우리는 서로 잃어버릴까 걱정할 필요 없이 각자 보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돌아보았답니다. 광장 바닥의 기하학적 무늬는 아침에 봐도 참 멋있더군요.
최근 외신 보도에 따르면 현재 24시간 무료로 개방되고 있는 <스페인 광장>이 유료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네요. 아직 징수 시기와 금액이 구체적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시의회 예산만으로는 과잉 관광으로 인해 훼손되고 있는 <스페인 광장>의 유지 보수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내린 결정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세비야로 여행 가시는 분들은 사전에 입장료 징수 여부를 체크해보고 가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가이드 투어를 하기 위해 우리나라 관광객 몇 분이 광장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일출 시간이 한참 지났다는 걸 깨달은 우리는 그때서야 광장을 빠져나와 호텔로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호텔 뷔페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12시까지 충분히 쉰 다음 짐을 챙겨 기차역으로 향했어요.
세비야의 <산타 후스타역>은 기차를 타기 직전 플랫폼에서 짐 검사와 신분증 검사를 하더군요. 이번에는 iryo 2등칸을 탔는데 2등칸 시설도 괜찮더라구요. 마드리드까지 2시간 40분 정도 걸렸는데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텍스 리펀 서류들을 정리하고 아침에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후딱 흘러 금방 도착한 기분이었지요.
<아토차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공항 가는 기차표를 사려고 했는데 어디선가 기차표가 있으면 마드리드 공항까지 가는 공항철도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항철도 입구에 있는 작은 창구의 직원분께 먼저 여쭤봤어요. '세비야에서 Renfe가 아니라 iryo를 타고 왔는데 혹시 공항까지 무료로 갈 수 있느냐'구요. 그랬더니 무료로 탈 수 있다고 하면서 바로 문을 열어주시더라구요. 얼마나 기쁘던지요! 막내랑 진짜 신나하면서 플랫폼으로 내려갔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운은 딱 거기까지였나 봐요.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 플랫폼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는 게 보이더라구요.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하고 있는데 뭔가 딱딱한 말투의 스페인어 안내방송이 나오고 곧 사람들이 투덜투덜거리며 플랫폼을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구글맵으로 우리가 타야 할 기차 도착시간을 체크하는데 시간이 계속 줄어들지가 않는 거죠.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막내가 우리 플랫폼 안내판을 쳐다보며 빠르게 지나가는 스페인어를 받아 적어 핸드폰으로 번역해 보더라구요. 그러더니 '엄마,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사고가 있어서 기차가 안 온다는 얘기 같아요'하는 거예요. 얼마나 황당하던지요.
그런데 갑자기 텅텅 빈 기차 한 대가 들어오더라구요. 그래서 공항철도는 괜찮은가 보다 하면서 탔는데 기차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잠시 후에 어떤 사람이 타더니 우리를 보면서 스페인어와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기차가 안 간다고 하는 거예요. 황당함의 연속이었죠.
결국 다시 플랫폼에서 우리와 같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서로 서로 눈치를 보며 10분 정도 더 버티다가 그 사람들과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안내소로 가서 물어보니 자기들도 기차가 언제 올지 모르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날 탈 비행기가 저녁 9시 3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라 시간이 넉넉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시간이 빠듯했다면 시쳇말로 멘붕이 올 뻔한 상황이었답니다. 예전에 파리에서 비행기를 놓쳐 본 경험이 있었던 저는 살짝 멘붕이 온 것 같은 막내에게 '그래, 이게 유럽이지! 그동안 우리가 너무 운이 좋았다!' 하면서 택시를 타고 가자고 했어요.
<아토차역> 택시 승강장으로 가니 다행히 빈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더군요.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30유로 정액제라고 알고 있었는데 공항까지 가는 것도 정액제인 줄은 몰랐네요. 공유 택시를 탔다면 더 저렴했을텐데 그럴 정신이 없었어요. 공항까지 시원하게 30유로를 내고 편안하게 갔답니다. 제가 막내한테 그랬죠. '네가 그래도 한 번은 유럽을 제대로 느끼고 가는구나'라고 말이죠.
<아토차역>에서 우여곡절이 있었슴에도 <바라하스 공항>에 도착하니 출발시간까지 4시간이나 남았더라구요. 그래서 택스 리펀 서류를 접수하고 잠깐 앉아서 쉬다가 체크인을 하고 출국장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스페인으로 올 때도 비행기가 한 시간 넘게 지연됐었는데 면세점을 잠깐 구경하는 동안 비행기 출발 시간이 한 시간 지연된다는 문자를 또 받았네요. 살짝 짜증이 났는데 공항 라운지를 이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막내와 저는 '비행기 타기 전에 샤워할 시간은 충분하겠다' 하면서 서로를 위로했죠.
제 신용카드 중에 공항 라운지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두 장인데 그 중에 한 카드는 일 년에 두 번만 이용 가능한 대신 동반자가 있으면 동반자를 포함해서 그 두 번의 기회를 한 번에 다 쓸 수가 있는 카드거든요. 그래서 막내와 저는 둘 다 무료로 공항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었지요.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1터미널에서 이용할 수 있는 공항 라운지는 <시벨레스 라운지> 하나뿐이었는데 매우 추천할 만한 곳이더군요. 샤워시설이 좋다는 평이 많아서 기대를 좀 하기는 했는데 예상보다 시설이 훨씬 크고 좋았어요. 음식도 다른 라운지들에 비해 먹을만한 것들이 많았구요. 덕분에 비행기 시간이 지연됐어도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지 않았어요
비행기 출발 3시간 전부터 이용할 수 있어서 우리는 저녁 7시쯤 들어갔는데 그 시간에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막내와 저는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번갈아 짐을 지키며 샤워부터 얼른 마쳤지요.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그 많던 자리가 꽉 차더군요.
참! 저희처럼 <시벨레스 라운지>에 일찍 입장하시는 분들은 처음엔 음식보다 간식 위주로 간단하게 드세요. 8시쯤은 돼야 파스타 같은 따뜻한 음식들이 나오더라구요. 그걸 모르고 찬 음식들로 먼저 배를 채운 저는 배가 너무 부르면 비행기 안에서 힘들 것 같아서 뒤에 나온 음식들은 많지 먹지 않았는데 막내는 따뜻한 음식들이 나오자마자 다시 또 폭풍 식사를 했답니다. 젊어서 그런지 소화력이 확실히 좋더라구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스페인으로 가는 것보다 시간이 좀 덜 들었어요. 그래도 한국에 도착하니 몸이 천근만근이더군요.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어요. 시외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오는 3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요. 버스터미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남편을 만나니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리더군요.
집에 들어서며 '역시 우리 집이 최고다!'라고 느끼는 그 순간이 또 여행의 참맛이 아닌가 싶어요. 막내도 짐을 들여놓자마자 자기 침대로 뛰어가서 털썩 드러누우며 '아~편하다!' 하면서 행복해하더군요.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기분 좋은 안도감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인 것 같죠?
여러분 길고 지루한 여행기 끝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다음 주 수요일에는 아직 못다한 여행 뒷이야기 잠깐 들려드리려구요. 수요일에 또 만날까요?
그동안 묵묵히 기다려준 남편을 위해 우리는 스페인에서부터 챙겨온 맥주와 환타와 온갖 선물들을 풀어놓고 한바탕 수다를 떨었어요. 그리고 그날 밤 정말 깊고 편한 잠을 잤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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