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지구'라는 말 뭔가 좀 근사하지 않나요? 바르셀로나의 원도심 지역을 고딕 지구라고 부르더군요. 로마시대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고 700년 이상 된 건축물들과 카탈루냐 주청사, 바르셀로나 시청사 등이 모여 있어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랍니다.
고풍스러운 거리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지역이기도 하고요.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아들과 저는 야경투어를 예약해두었지요. 그 지역이 야간에 치안이 좋지 않다고 소문이 난데다 크리스마스시즌에 관광객을 겨냥한 소매치기들이 많이 설친다고 해서 우리끼리 다니기 무서웠거든요.
가우디 투어가 끝나고 호텔에서 몇 시간 아픈 발을 주무르며 쉬었지만 여전히 발바닥과 발목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제가 야경투어를 잘 따라다닐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죠. 그렇다고 막내 혼자 가라고 할 수도 없으니 조금이라도 걷는 거리를 줄이려고 고딕 지구까지 택시를 타고 가자 했어요. 그런데 길이 많이 막히더라구요. 미팅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우리는 속이 바짝바짝 탔어요. 막내에게 '가이드분께 혹시 늦어지면 어디로 가면 되는지 톡으로 여쭤보라'고 했더니 이동이 많고 투어 중에는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지각하면 찾기 어려울 거라고 답이 온 거예요. 그 순간 우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서로 눈치만 보게 되었죠. 아들에게 괜찮다고, '혹시 투어를 못하게 되면 우리끼리 잠깐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가면 된다'라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택시를 타고 가자고 했던 것이 미안해서 발을 동동 굴렀어요. 막내도 '네. 맞아요' 라고 태연한 척 대답은 했지만 계속 두리번거리며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게 느껴지더군요.
약속 시간이 3분쯤 남은 상황에서 구글맵을 보니 택시 위치가 약속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았어요. 차를 타고 가면 빙 돌아가야 되지만 작은 골목길로 뛰어서 가면 빨리 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우리는 택시에서 내리기로 했어요. 그 순간은 발이 아픈 것도 잊어버렸어요. 막내에게 먼저 뛰어가라고 하고 저는 최선을 다해 뒤따라갔죠. 때마침 노바 광장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어서 그걸 구경하러 모인 많은 사람들을 헤치며 만남의 장소까지 가려니 등에서 진땀이 다 나더군요. 브라보! 절뚝거리며 뛴 덕분에 자기 소개가 끝나고 사람들이 막 이동하려는 순간 미팅 장소에 도착해 아들과 저는 가이드님으로부터 무사히 무전기를 건네받을 수 있었답니다.
처음엔 서로 괜찮냐, 다행이다 하며 숨을 돌리느라 보이지 않던 풍경이 5분쯤 지나니까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크리스마스 마켓 노점들의 뾰족 지붕도, 대성당의 아름답고 화려한 외관도, 구경나온 사람들의 설레임 가득한 눈빛들도 우리 같은 여행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한 분위기더군요.
아름다운 조명 장식으로 치장한 고딕 지구의 밤거리는 로맨틱했어요. 안전하기만 하다면 젊은 연인들이 데이트하기에 참 좋은 장소인 것 같더군요. 무전기를 통해 아름다운 배경음악까지 들으면서 걸으니까 마음이 더 몽글몽글해지기도 했고요. 가이드님이 사진을 찍어주실 때마다 아들과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면서도 속으로는 모태솔로인 막내가 자꾸 측은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애들이 중고등학교 때는 혹시 연애라도 할까 봐 경계하게 되더니 성인이 되니 제 나이에 연애도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하게 되니 엄마들의 마음은 참 간사한 것 같아요.
고딕 지구에는 중세 시대 건물들이 많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들이 많아서 가이드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라몬 베렝게르 3세 광장, 레이 광장, 자우메 광장, 산펠립 네리 광장, 아우렐리아의 내리막길, 아비뇽길, 레이알 광장을 거쳐 람블라스 거리의 리세우 대극장까지 천천히 옛 바르셀로나의 정취를 느끼며 걷고 있자니 우리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 시대 한가운데에 들어와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갔어요.
아경 투어가 끝나고 돌아올 때는 전철을 탔습니다. 천천히 걷기도 했고 중간중간 앉아서 쉴 기회도 많아서 발 상태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괜찮았거든요. 마지막 장소인 리세우 대극장 바로 앞이 전철역이기도 했고요.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이후 처음 타보는 전철이었죠. 교통카드를 사려고 정보를 검색해 보니 스페인의 교통카드는 우리나라처럼 나중에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카드가 아니더라구요. 대신 한 장만 사도 여러 사람이 같이 사용할 수 있더군요. 들어갈 때 이미 과금을 하기 때문에 앞 사람이 결제를 하고 들어가면 그 카드를 바로 받아 뒷 사람이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더라구요. 버스를 탈 때는 사람 수만큼 터치를 하거나 기사님에게 몇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터치하면 되고요. 교통카드로 결제하는 티켓값과 일회용 티켓값을 비교해 보니 두 번 이상 탈거라면 보증금을 물고라도 교통카드를 사는 게 맞더군요.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 확실히 자유여행을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나요. 패키지 여행을 오면 따로 대중교통을 타고 현지인들의 삶을 직접 느껴볼 기회가 많이 없잖아요. 이 나라의 전철은 어떻게 생겼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는 풍경은 이렇구나 알게 되죠. 내가 만약 여기서 산다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같은 상상을 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요.
관광객과 그곳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차림새부터 표정까지 다 다르죠. 관광객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반면 현지인들은 주로 시큰둥한 듯 피곤한 듯 무심히 땅을 보고 있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거나 하죠. 물론 연인들이 서로 껌딱지처럼 껴안고 서있는 건 유럽 어디나 다 똑같은 것 같았지만요. 막내는 혹시라도 소매치기가 붙을까 잔뜩 경계한 눈치였지만 저는 든든한 아들이랑 같이 있어서 그런지 여유 있게 아픈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재미있게 전철 안 풍경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타파스 바 중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대표 맛집은 두 군데입니다. 비니투스(Vinitus)와 시우다드 콘달(Ciutat Comtal)이죠. 스페인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뽈뽀도 물론 맛있지만 일명 꿀대구라고 불리는 메뉴가 맛이 있기로 유명한 곳들이예요. 우리는 호텔에서 좀 더 가까운 비니투스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이미 웨이팅이 많아서 30분쯤 기다렸다 들어갔어요. 다음날은 예정된 투어가 없었기 때문에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여유 있게 저녁식사를 즐겼습니다.
뽈뽀와 꿀대구는 말할 것도 없이 맛있었구요, 감바스와 푸아그라가 올라간 안심스테이크와 미니 햄버거까지 모든 메뉴가 맛있었어요. 그리고 클라라 맥주는 완전 우리 취향이었지요. 상큼함과 달달함이 적당히 가미된 데다 도수가 약해서 술에 약한 사람도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는 맥주였어요. 서빙하시는 분들도 간단한 한국말로 인사도 해주시고 '북한과의 문제가 잘 해결돼서 한국이 빨리 평화로워지기를 바란다'는 깜짝 덕담도 곁들이며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고단했던 하루를 훈훈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답니다. 호텔로 돌아와서는 아들과 여행 뒷얘기로 한참 즐겁게 수다를 떨다가 푹 잤어요.
다음날 아침엔 짜장 컵라면으로 가볍게 배를 채우고 다시 누워서 뒹굴뒹굴하다가 심심해질 때쯤 호텔 근처에 있는 현지인 맛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어요. 충분히 쉬어서 그런지 발도 가볍더군요. 맛집이 맞는지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곧 만석이 되더라구요. 막내가 이것저것 시켜주는 대로 먹었는데 좀 느끼하기는 해도 맛있었어요.
배부르게 먹고 나와 이제 어디를 갈까 의논하면서 큰길이 아닌 뒷골목을 어슬렁어슬렁 걷는데 아들과 단둘이 스페인에 와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더라구요. 마치 유학온 아들 집에 놀러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요? 목적 없이 동네 산책하듯 걸어서 그랬나 봐요. 명소를 콕콕 찍어 돌아보는 가이드 투어도 재미있지만 자유여행으로만 즐길 수 있는 이런 여유로운 순간들도 참 여운이 길게 남는 듯해요.
우리는 의논 끝에 서로 하고 싶은 걸 하나씩 하기로 하고 먼저 막내의 픽으로 카탈루냐 음악당을 구경하고 제 픽으로 기념품 쇼핑을 하기로 했어요. 택시를 타고 카탈루냐 음악당 근처에서 내렸는데 음악당이 큰 길가에 있는 게 아니라 골목 안쪽에 있더군요.
골목 모퉁이를 돌자마자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건물이 눈길을 끌길래 대번에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카탈루냐 음악당이구나' 했죠. 2층 외부 발코니의 화려한 기둥들과 건물 모서리에 장식된 웅장한 대리석 조각을 보니 홀린 듯 저절로 핸드폰을 들게 되대요.
음악당이 좁은 골목 안에 있다 보니 건물 외부가 다 나오게 찍는 게 어려웠는데 그래도 즐거워하는 막내를 보니 없는 실력이지만 열심히 인증샷을 찍어주게 되더라구요.
입장권을 사려고 입구를 찾아 들어가 보니 카페와 레스토랑이 먼저 보이더군요. 미리 알았더라면 여기 와서 점심을 먹을 걸 그랬다 하면서 아름다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음악당 내부를 구경했죠. 먼저 2층 발코니부터 구경했는데 유명한 포토스팟이라 그런지 사진을 찍으려고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장미꽃이 만발한 공연장이라니! 제 눈을 의심했네요. '바르셀로나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만 있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부터 들더군요.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아르누보 양식의 결정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당이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 직접 보면 알게 되실 거예요. 인터넷에 떠도는 전문가들이 찍었다는 사진들도 실제로 보는 모습을 완벽하게 담지는 못하더군요. 화려함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생동감 넘치는 대리석 조각들과 내부를 뒤덮은 화려한 장미꽃 장식들 그리고 중앙 천장에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모양으로 붙어있는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자, 이것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면 만들어봐라!' 라고 외치는 듯했어요.
지난 번에 말씀 드렸었죠? 카사 예오 모레라를 만든 가우디의 스승 도메네크 이 몬타네르 말이예요. 카탈루냐 음악당은 그의 작품이랍니다. 바르셀로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산파우 병원 역시 몬타네르의 작품인데 그 병원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병원으로 불린다고 하네요.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산파우 병원도 보러갔을 텐데 못 보고 와서 아쉬워요.
막내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공연장 내부를 구석구석 돌아보길래 저는 2층 중앙 객석에 앉아 아들이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렸어요. 사실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기간 동안 카탈루냐 음악당에서 기타와 플라멩코 공연이 열린다고 해서 보려고 했었는데 리세우 극장에서 열리는 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을 먼저 예매하는 바람에 시간이 맞지 않아서 포기했거든요.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데 정말 아쉽더라고요. 피아니스트 조성진 씨의 공연도 열렸었다는데 이런 공연장에서 그런 훌륭한 공연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텅 빈 무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네요.
막내가 마트 구경을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음악당 바로 앞에 큰 까르푸 마켓이 있었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겠죠?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신나게 아이쇼핑을 하는 막내에게 방울 토마토 한 팩과 파인애플 한 팩을 대충 쥐어주고 대성당이 있는 노바 광장으로 끌고 갔어요. 카탈루냐 음악당도 고딕 지구에 있기 때문에 대성당까지 걸어가는데 5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밤에 본 고딕 지구가 로맨틱했다면 낮에 본 고딕 지구는 예뻤어요. 대성당의 파사드 장식도 새삼 아름다웠고 쨍한 햇빛이 밝게 비추는 골목도 더 이상 무섭지 않았죠.
그리고 쇼핑하기에 너무 좋았어요. 노안이 와서 밤이 되면 무엇이든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데 햇빛이 좋으니 크리스 마켓의 예쁜 소품들도 골목 안 작은 상점들의 물건들도 다 잘 보이더라구요. 제가 자꾸 발길을 멈추고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니 참을성 있게 잘 따라다니던 막내가 결국 '엄마 시간이 없어요'하면서 재촉하더라구요. 역시 쇼핑은 여자끼리 다녀야 해요.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던 아트숍에서 마음에 쏙 드는 기념엽서를 10개 사고 야경투어 가이드님이 추천해 주신 사바테르 비누 가게에서 선물용 비누를 20개나 사버렸더니 막내의 눈이 개구리처럼 튀어나오더라구요. 물론 저도 너무 많이 샀나? 생각했지만 돌아와서 나눠주고 보니 결코 많은 게 아니었답니다. 발걸음을 옮겨 카사 아마트예르 초콜릿 가게로 가서 또 이것 저것 담다 보니 생각보다 예산이 초과되었지만 명품 키링 한 개 값도 안되는 돈으로 수십 명의 지인들을 즐겁게 해줬으니 후회는 안 해요.
여러분 그거 아세요? 콘데스 데 바르셀로나 호텔이 자리하고 있는 그라시아 거리는 명품 쇼핑 명소랍니다. 스페인은 택스 리펀 받기도 쉬운 나라이고 특히 루이비통 매장 같은 경우는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FTA 서류까지 알아서 챙겨주기 때문에 그라시아 거리에 있는 명품숍 앞에 가면 관광객들이 오픈런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초록 창에 바르셀로나 명품 쇼핑, 혹은 바르셀로나와 특정 상표명을 함께 넣어 검색하면 많은 블로거들이 어느 가게에서 어떤 물건을 사면 진짜 이득인지 친절하게 가르쳐 줍니다. 택스 리펀 받는 방법도 물론 친절하게 알려주죠.
그런데 참 다행이죠? 제가 명품에 취미가 없어요. 만약 제가 명품을 좋아했다면 우리는 스페인에서 돌아오자마자 집 기둥뿌리를 뽑아야 했을 거예요. 비누나 사고 초콜릿이나 사는 정도로 만족하는 여자라서 바르셀로나를 떠나는 날까지 루이비통 매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으니 진짜 다행인 거 맞죠?
아무튼 이렇게 자유여행다운 자유여행을 즐긴 하루가 끝나가고 이제 우리는 드디어 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을 보러 리세우 대극장으로 갑니다. 다음 주에도 저희들의 좌충우돌 여행기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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