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사이에 평균 수명이 확 늘어난 느낌이다. 올해 여성 평균 수명이 90세라고 한다. 100세 시대라는 말은 다가올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생 2모작이 아니라 인생 3모작까지도 해야 할 판이다. 베짱이처럼 미래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고 살던 나도 이제는 조바심이 난다. 인생의 초반에는 열심히 달렸다가 중반에 걷고 후반에 아예 앉아 쉬고 있는 것 같은, 이렇게 쉬려면 초반에 훨씬 더 빨리 달렸어야 했나 하는, 애꿎은 생각도 든다.
다들 그래서 서울 외곽으로 이사 가고, 귀촌을 하고,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따고 그랬던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퇴직 후 일자리는 없는데, 살아야 할 날들이 많으니 시간과 돈을 들여 ‘중장년 개발’을 하는 것에 열심일 수밖에. 이제 나도 그런 준비들을 해야만 하는 걸까?
얼마 전 핸드폰 정리를 하다 메모장에 적어 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제목은 ‘노후를 조달하는 방법’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홍기빈 소장의 강의 중 인상적인 것을 기록해 둔 모양인데, 그동안 눈에 띄지 않다가 노후 문제가 나의 관심사로 들어오니 눈에 띄었다. 경제학자인 그가 노후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지는 않았을 테고, 자본주의 경제 즉 ‘돈벌이 경제’와 그에 대비되는 ‘살림살이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다가 노후 문제를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것들이 상품화되고 있는 지금, 모든 것들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가치가 확산되면서 우리는 늘 ‘가성비 최고’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물건은 물론이요, 공부할 때도, 친구를 선택할 때도, 직업을 선택할 때도, 결혼을 할 때도 결과적으로 어떤 선택이 비용이 적고, 리스크가 적으며, 수익이 높은 선택이냐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죽음’을 상품 가치로 따져 가며, 쉼 없이 떠들어대는 보험사들의 광고는 화가 나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인생 전체에 걸쳐 남는 장사를 하는 것이 삶의 목표처럼 보인다.
이러다 보니 노후를 준비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한 가지 방법만을 강요받고 있다. 금융, 즉 돈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연금을 굴리거나, 목돈을 넣어두고 예금이자를 생각하거나, 땅을 팔고 서울을 벗어나는 재테크 등 모두 노후 ‘자금’ 마련에 대한 생각뿐이다.
하지만 돈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몇 안 된다. 현 시세로 2억 원 이상을 오롯이 통장에 넣어두어야 약 50만 원 정도의 이자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50만원으로 우리가 바라는 노후의 삶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면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마음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이 역시 시간과 돈이 필요할 뿐 아니라 여기에도 가성비의 법칙은 적용될 터이니 중년이 되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
홍기빈 소장은 노후를 조달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금융(돈)으로 노후를 조달하는 방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 다음과 같은 관점이 필요하다.
첫 번째, 나에게 있어서 ‘좋은 삶’은 무엇인가?
두 번째, 나의 좋은 삶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세 번째 그것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좋은 삶이다. 돈으로 측정되는 삶이 남의 기준에 의한 삶이었다면, 내가 좋아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노후를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삶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인지를 고민하고 정립하는 것과 같다. 내 노후에 꼭 있어야 할 것과 없어도 될 것들에 대해 확실하게 구분하는 것. 이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를, 또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를 생각해 보는 일과도 같다.
두 번째는 그런 ‘나의 좋은 삶’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필요 없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의 좋은 삶이 지구와 인간의 공존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노후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택할 것이다. 남들 하는 해외여행 대신 근거리 숲 여행을 선택할 수 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일 수도 있다. 공동체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거나 자발적인 실천일 수도 있다.
세 번째는 필요한 것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예측할수록 좋다. 이를 돈이 아닌 현물로, 또는 다른 방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굳이 ‘구매’가 아니라 ‘조달’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삶에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누군가에게 얻을 수도, 당근에서 직거래할 수도, 집에 있는 것을 활용할 수도, 직접 만들 수도 있다. 가급적 뭔가를 사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는 저비용 구조를 지향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강사는 위에서 언급한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현물 3~4가지를 준비하자고 제안한다.
첫 번째는 배우자 또는 함께 사는 이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가족 관계이건 동거인이건 이웃이건, 홀로 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해야 한다.
두 번째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꾸준히 만나는, 믿을 수 있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 사회적 지원과 상호부조의 의미일 것이다.
세 번째는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 2~3가지 정도는 배우고 익혀두어야 한다.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고비용 구조로 넘어가는 까닭이다.
네 번째는 적은 돈이라도 부수입을 올릴 수 있는 스킬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꼭 공인된 자격증일 필요는 없다. 뭔가 적은 것이라도 수입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 조건, 즉 나이 들어서 용돈만큼만 벌고 살고 싶다는 생각은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준비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후를 조달하기 위한 현물들을 잘 준비하다 보면 마지막의 연결고리도 어떻게든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생각을 해본다. 살림살이 경제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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