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친구와 둘이서 일본 여행을 갔다. 개학 전에 다녀온다고 2월 말 경 여행 일정을 잡았다. 다 큰 아이가 집에 있으나 없으나 내 삶이 크게 달라질 건 없는데도, 여행을 가고 없다고 생각하니 내가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이 좋은 시간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이럴 땐 빠른 판단력과 자유에의 강렬한 의지, 그리고 약간의 금전적 여력을 확보할 수 있으면 된다. 그래, 무주로 가자!
10여 년 전 무주에 터를 잡은 후배가 있다. 학창 시절 알게 된 후배인데, 한동안 연락이 끊어졌다가 우연한 기회에 내가 활동하던 단체와 인연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시 만난 후배는 생태주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터를 잡은 곳이 무주였다. 딸아이가 여행을 간 다음날 아침, 나는 남부터미널로 갔다. 예매를 하지 않고 고속버스를 타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무턱대고 내려가겠다며 이틀 전에 전화한 선배를 흔쾌히 받아준 후배가 고마웠다.
폐가를 얻어 최소한의 수리만 해서 살고 있는 그의 집은 무주 공용버스터미널에서 버스로 15분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에 있다. 오래전부터 그는 못쓰게 된 조각 천들을 모아 가방과 지갑, 필통, 노트북 집 등을 만들고, 면이나 삼베를 이용해 손수건, 생리대, 수세미 등을 만들어왔다. 그가 만든 천연화장품은 놀랍게도 피부를 맑고 밝게 만들어주어 이미 우리 가족은 단골이 된 지 오래다. 술도 잘 만든다. 수제막걸리와 수제 맥주의 맛은 전문 주점에 견줄 만하다.
오랜만에 온 그의 집은 몇 년 사이에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마당이 복잡해졌다. 마당 여기저기에 밭을 대신하는 크고 작은 흙 화분들이 놓여 있고, 한쪽에는 작은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야채들을 키워서 먹는 후배가 겨울에도 채소를 공수하기 위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처마 밑에는 빗물을 받아두는 재활용 용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빗물을 주면 물도 아끼고 식물들도 잘 자라는 까닭이다.
마당에 있는 화분들은 모두 버려진 재활용품이어서 도시농부들이 옥상에서 가꿀 법한 반듯한 화분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닐하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가지런히 잘 만들어진 하우스가 아니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그저 자신이 편하게 여닫을 수 있고 바람을 막아주면 되는 그런 비닐 덮개였다. 누군가는 조악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충분히 그 답다고 느꼈다. 올해는 땅콩도 심고, 생강도 심었다. 두 작물 모두 들이는 수고로움에 비해 훌륭한 먹거리를 생산해 준다며 가성비 좋은 작물이라고 나에게 강추한다. 그가 수확한 땅콩은 두 줌 정도였다.
부엌에 들어서자 창고를 대신하는 것 같은 수납대가 한가운데 놓여 있는데, 뭔가 잔뜩 채워져 있다. 몇 년 전에는 없었던 것들인데, 발효음식이나 발효초, 시럽, 담금주 같은 것들이다. 저장음식을 만들기 위한 도구들, 용기들, 향신료나 부재료들도 많았다.
최소한으로 재배를 해도 때로는 풍성한 수확을 안겨주는 기특한 작물들이 있다. 그래서 오래 두고 먹는 저장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나처럼 지인들이 찾아올 때 혹시 필요한 것들이 있는지 묻고 아낌없이 내어준다. 그런 후배의 마음이 따뜻하고 예뻤다.
눈치챘겠지만 후배는 육류를 먹지 않는다. 가끔 생선류를 사 먹거나 얻게 되는 경우가 있어 냉동실에 보관하기도 하는데, 오늘은 손님이 온 날이니 냉동실에 있는 오징어를 꺼내 오징어 꽈리고추볶음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다. 직접 담은 양념소스를 활용해 만들었다. 메인 메뉴는 오징어 꽈리고추볶음. 맑은 콩나물국에 볶음김치, 현미밥에 김. 정성이 담긴 맛있는 밥상이었다.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내자 나보다 더 기뻐한다. 아니 이렇게 기뻐할 수가! 혼자 어떻게 사나 싶을 정도다. 밥 먹기가 바쁘게 작년부터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는 보이차를 내어준다. 예쁜 다기 세트에 적당한 온도로 우려낸 보이차를 마시니까 몸도 마음도 차분해지고 힐링이 되는 것 같았다. 여러 번 마시다보니 몸이 후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보이차가 싫지는 않았지만 사실 나는 커피가 고팠다. 후배에게 커피가 땡긴다고 했더니 후배도 기다렸다는 듯이 생두를 꺼내 왔다. 아니 원두가 아니라 생두를? 후배는 이참에 미뤄두었던 일을 해야겠다며, 볶아서 같이 먹기도 하고 집에 갈 때 갖고 가라고 한다. 무쇠 프라이팬을 꺼내더니 생두를 쏟아붓고는 나무 주걱으로 이리저리 볶는다. ‘촤르르 촤르르’ 구르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는 커피를 좋아하고 오래 마셨지만,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졌거나 커피의 맛을 이런저런 향으로 평가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로스팅이 별거냐며, 원하는 색깔이 나올 때까지 볶으면 되는 거 아니냐며 나에게 나무 주걱을 건넨다. 그래서 후배 덕분에 커피 로스팅이란 걸 생전 처음 해보게 됐다.
여기 와서 이런저런 소박하고 작은 행동으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갓 볶은 커피는 맛과 향이 너무 좋았다. 밖에 나가지 않고, 실내에만 있었는데, 멋진 풍경을 본 것처럼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이 순간을 위해 나는 무주로 왔다. 무주에 오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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