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장면들
“아기야 집 아니야. 이삿집이야.”
둘째가 26개월 때, 우리는 이사를 했다. 월세가 많이 내린 틈을 타서 미국 생활 4년 만에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던 싱글하우스로 이사를 한 것이다. 조그맣지만 단정한 앞마당과 뒷마당이 있고, 한 대의 차가 들어가는 차고도 있는 집에 살게 된다는 기쁨에 두 아이들 데리고 하는 이사가 힘든 줄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막 말문이 트인 두 살 아이에게 이사란 전혀 다른 의미였나 보다. 매일 정리의 연속으로 정신없는 날들이 2주 정도 지났을 때, ‘우리집’이라는 말을 하는 내게 돌아온 아이의 답이었다. ‘아, 그랬구나... 너에게는 이 이사가 너의 집을 잃고 낯선 집을 만난 일이었구나.’
알고는 있었다. 그리고 나름 신경을 쓰기도 했다. 육아책에도 아이들에게 이사는 하나의 이별이며 그래서 일종의 상실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었다. 준비하는 동안 우리가 이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살던 집과도 작별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아이에게 자기가 하루를 보내던 공간과 이별을 했다는 사실이 없는 일이 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두 살 아이가 자신이 겪고 있는 상실의 아픔을 그때 바로 표현해준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달랐다. 여러 번의 이별로 인한 슬픔이 매번 나를 찾아왔다가, 아무도 맞아주지 않아서 숨어버렸다는 것을 나는 아주 오래 지나서야 깨달았다.
결혼 후 이사를 많이 했다. 낯선 나라에서도 살았고, 친지와 뚝 떨어진 먼 지역에서도 살았다. 그때마다 나는 물건을 정리하고 짐을 쌓고 풀면서, 마땅히 맡길 곳이 없어 아이들까지 챙겨야 했다. 새로 이사한 곳에서도 아이들의 적응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혹시 낯선 환경에서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지 않을까, 이사 직후에는 더 많이 챙기고 놀아주었다. 조금 커서 아이가 기관에 다닐 때도 또, 신경이 많이 쓰였다. 혹시 철모르는 아이들이 텃세를 부려 적응하기 힘들까봐 나의 낯가림, 나의 소심함은 야멸차게 던져버리고 같은 반 엄마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엄마니까, 이 잦은 이주에 아이들은 아무 책임도 없으니까 그래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렇게 10년 정도를 보내고 나니, 나에게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불쑥 찾아온 슬픔
얼마 전 리모콘으로 채널을 넘기면서 무심히 티비를 보고 있을 때였다. 미국에 살 때 자주 가던 식료품점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길래 무슨 프로였는지도 모르고 ‘잠깐만’을 외쳤다. 그리고는 그 장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30초가 지났을까. 그냥 눈물이 불쑥 나왔다. 뺨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을 그대로 두고, 내 마음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두 아이들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막 돌아왔을 때, 살던 곳을 많이 그리워했다. 일곱 살, 세 살 각자의 나이대로 표현했다. 그 후로도 그런 마음을 종종 내보이곤 했다. 그래선지 아이들에게는 미국이라는 나라, 우리가 살던 동네가 늘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단편적으로 그리워하는 것들은 있었지만, 다시 그곳에 가서 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딱히 그곳에서의 삶이 구체적으로 힘들었다기 보다, 그저 정착하고 다시 떠나오는 일의 힘듦이 떠오르면 자동으로 눈이 꾹 감겼다. 마음이 더는 생각하기 싫다고 떠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랬었는데, 무심코 마주한 화면의 공간을 보며 저 깊은 속마음이 건드려졌던 것일까. 생각이 올라오려 하는 걸 잠시 멈추고 그저 내 감정이 어디로 흐르는지 살폈더니, 나는 그곳의 생활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떠나고 싶지 않다’는 그 시절 날것의 나의 마음이 느껴졌다. 가만히 앉은 채로 한동안 내 안에서 저 혼자 깊어지고 단단해진 그리움에게 곁을 내 주었다.
미국에서 보냈던 5년이 모두 좋았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두 살 아이의 마음을 살피느라, 조금 지나서는 둘째의 임신과 출산 때문에 늘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둘째도 두 돌이 지나고, 한인 교회에도 잘 적응하면서 조금씩 그곳의 삶이 좋아지기 시작했었다. 함께 하는 교회 목장 식구들과 친해지고 아이들도 여러 사람들과 잘 어울리게 되면서 오랜만에 하루하루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다시 갑자기 그곳의 생활을 정리해야 했던 것이다. 남편이 한국의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3개월이 채 안 걸렸다. 급하게 일손이 필요했던 직장의 사정이 있었다. 그렇게 서둘러서 그곳에서의 5년의 생활- 나의 서른부터 서른다섯까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냈던 그 시간을 엉겁결에 보따리에 싸서 동여매어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낯선 지역에서 숨 가쁜 정착 생활을 시작했었던 과거의 나. 한참의 시간이 흘러 그랬던 내가 이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나보다.
모빌리티 사회, 장소와 이별하는 우리들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소중한 장소와 이별을 하며 살아간다. 나처럼 배우자의 일 때문에, 우리 아이들처럼 부모의 이직으로, 혹은 살던 공간이 재개발되면서, 그리고 또 다른 각자의 사정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이동 사회(모빌리티 사회)가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먼 거리가 사람들의 이동에 장벽이 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먼 나라에 가서 살 수도 있고, 한 두 시간 거리는 일일 이동권이 되었다. 이렇게 사람들의 이동반경이 커질수록 한 장소에 머무는 시간도 짧아지게 되었다. 못 갈 곳이 점점 줄어들면서 우리에게 점점 새로운 곳에 도착하는 일도, 지내던 곳에서 떠나는 일도 잦아지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계속 머무르고 싶어도 더는 있을 수 없어서 떠나야 하는 일도 많아졌다. 도시 역사가 50년이 넘어가면서 지었던 건축물들이 허물어져야 하는 상황이 자꾸 생겨나고 있다. 최근 익숙했던 건물들이 폐관되고 철거된다는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 앞으로 계속 그렇겠지. 공동주택뿐만 아니라 소극장, 호텔 등 한때 공들여 지었던 공간들도 하루아침에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오래된 탓에 건물 내 안전 문제가 생긴 경우도 있지만, 건물이 위치한 지대의 용적률 문제와 그로 인해 발생할 수익을 늘리기 위한 경우도 있다. 이렇게 공간이 사라지게 되면 그곳에서 삶을 가꾸던 사람들, 추억을 쌓았던 사람들은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장소를 상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잃어버린 장소를 애도하는 작업들
청소년 소설 <기린 놀이터에서 만나>의 저자 문은아는 얼마 전 재개발된 둔촌주공아파트에서 어린 시절 쌓았던 추억이 많다. 소설은 80년대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던 엄마 수림의 흔적을 찾는 열세 살 딸 이든이의 이야기이다.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에서 엄마가 지금 자기의 나이였을 때를 더듬는 장면들에는 곧 사라질 공간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묻어 있다. 이든이는 오래 된 책상 서랍에서 엄마의 어릴 적 일기장을 찾고, 엄마가 묻어둔 타임캡슐을 찾기 위해 전략을 짠다. 엄마가 읽던 책의 어느 페이지, 베란다 유리문 구석에 어린이 엄마가 붙여두었던 검은 별 스티커를 찾으면서 이든은 점점 엄마가 태어나 자라고 할머니가 38년째 살아온 둔촌주공아파트를 탐험한다. (강동구 둔촌동에 위치한 둔촌주공아파트는 1979년 준공했으며, 143개동 5,930세대가 거주했었다. 현재는 재건축을 앞두고 철거된 상태)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이 사랑했던 장소, 둔촌주공아파트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별로 인한 상실감은 적절한 애도 작업을 통해 비로소 심리적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많은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들이 이야기한다. 그들은 애도의 과정을 일반화하고 단계별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사람마다 그 과정도 시간도 다르다고 한다. 이 소설의 작가처럼 글을 쓰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 기록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 작업을 하는 작가들도 있다. 예술이라는 표현 방법을 가진 창작자들의 애도 작업은 이렇게 작품으로 말을 한다.
또 하나의 이별 앞에서
우리는 살면서 몇 번이나 이별을 경험하게 될까. 잠시 멈추어 떠올려 보아도 쉽사리 숫자 하나로 답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떠나온 장소들, 그리고 함께 떠나온 사람들, 나를 떠나간 사람들. 살아온 시간만큼 쌓여온 이별들. 당장 해결해야 할 과업으로 인해 제때 어루만져 주지 못했던 상실의 아픔들.
나는 오늘 또 하나의 이별을 하게 되었다. 올 2월 이곳에 <공간 인문학 산책>이라는 작은 팻말을 걸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총 열두 편의 글을 쓰는 지난 일년 동안 이 온라인 공간은 내게 아주 큰 의미가 되어주었다. 애초에 무언가에 끌리듯 ‘공간’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공부를 시작했던 것도 반복된 이주로 인한 과거의 상실에 대한 애도 작업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공부하고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막상 이곳을 열고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생겼다. 개인 SNS 외에 처음으로 글을 쓴 곳, 떨리는 마음으로 적어 올리는 글을 읽어주는 고마운 독자들을 만난 곳, 나에게 전해준 고맙고 힘이 되는 메시지가 담긴 곳, 그리고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던 내가 담긴 곳. 그렇게 열두 번 이곳을 찾을 때마다 비록 컴퓨터 화면 속 공간이지만 올 한 해 그 어떤 현실 공간보다 제일 설레고 따뜻하고 든든한 곳이 되어주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이곳의 <공간 인문학 산책>은 문을 닫는다. 그렇게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는데, 아마도 내게 허락되었던 이 공간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이 시대의 장소 상실에 대한 글은 오래 전부터 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이 공간과의 이별에 대한 애도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별 없이 살 수 없다. 어처구니없이 폭력적으로 기습하는 이별은 최대한 막고 피해보려 해야겠지만, 그렇게 피할 수 없이 훅 찾아오는 이별과 상실은 어쩔 도리없이 맞을 수밖에. 김형경은 애도심리에세이 <좋은 이별>에서 이렇게 나를 찾아온 이별과 잘 작별하며 애도 작업을 하게 되면, 결국 우리는 심리적으로 훌쩍 성장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진정으로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아마도 상실에 맞서 애도하는 작업이 시간이 흘러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한때 마음을 썼던 공간, 어느 시절 나의 삶이 담겨져 있는 곳, 그 안에서 함께 한 사람들과 다양한 추억들을 맘껏 떠올리고 이야기하고 기록하기. 그렇게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페이지들을 주체적으로 써내려가기. 사랑했던 공간, 나를 새겨 넣었던 장소와 이별하는 우리들이 이런 작업을 통해 인생을 성숙하게 가꾸어 나가기를 소망한다.
*그동안 <공간 인문학 산책>을 읽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앞으로도 계속 공간에 대해 공부하고 다양한 사유를 글로 풀어가려 합니다.
혹시 저의 글이 보고 싶어지면, 제 SNS에 놀러와주세요.
그곳에서 추후에 있을 새로운 연재 계획도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언젠가 이별할 지라도 지금 애정가득한 공간과 장소에 있으시다면, 그곳에서 맘껏 행복하시길 바라며. 따뜻한 연말연시 되세요!
글쓴이 김근영
공간을 느끼고 사유합니다.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30대와 40대 초 타국과 타지역에서 거주하며,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한 가족의 주부로 살았습니다. 다시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온 지금, 다양한 공간을 넘어 다니며 의문을 품었던 것들에 대하여 공부하고 글을 씁니다.
kunyoungk7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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