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에 걸렸다. 어쩌다 보니 낮 동안 병원에 갈 타이밍을 놓쳐버려 밤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는 병원으로 갔다. 대기자는 스무명 가까이나 되었고, 한참을 지나고야 약국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약국 안에서도 대기줄은 여전했다. ‘여기서도 한참이나 기다려야 겠네’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도중 갑자기 등 뒤편에서 짜증이 더해진 한숨 소리가 들렸다. “얘들아 그만 좀 칭얼대.” 뒤를 돌아보니 대여섯살 정도 되는 남매가 보였고 그들 옆 지친 표정으로 앉아있는 내 또래의 엄마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얘들아 니네는 독감 걸려서 아파? 엄마는 더 아프고 힘들어. 너희들이 일어나기 한참 전 새벽에 일어나서 엄마는 일하러 갔고, 일 끝나자 마자 밥도 못 먹고 너네 데리러 갔다가 바로 병원에 왔잖아.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단 말이야. 엄마 너무 힘들어. 그러니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엄마 좀 도와줘.”
순간 그녀의 목소리와 지친 표정 너머로 그녀의 하루가 어땠을 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해가 뜨기도 전에 아이들 아침을 준비하고 출근을 했겠지? 회사에서도 아이들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일이 손에 잡혔을까? 아마 일을 하고 있어도 머릿속 한쪽에서는 아이들 걱정에 애태우지 않았을까? 그러니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아이들을 데리러 달려왔겠지. 병원에 왔어도 사람들 가득한 곳에서 아이들 챙기느라 시간이 밤 8시가 한참 지나도 아픈 아이들만 보였겠다. 나는 타인의 하루를 상상만 했는데도 이미 나는 목 끝까지 숨이 차 올랐다.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엄마의 마음을 느꼈는지 몰라도 그녀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꾹꾹 눌러 담은 그녀의 마음이 이렇게 라도 터져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뒤 약국을 나서며 아이들은 다시 엄마 주변을 맴맴 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의 긴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라는 마음과 함께 “휴…”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후 집으로 돌아오자 나를 기다린듯한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한참이나 오래 걸렸네. 몸은 좀 나아졌어? 뜨거운 것 더 먹을래?” 나에게서 감기기운을 살짝 옮아버려 목소리가 좋지 않았는데도 엄마는 날 먼저 챙기려 했다. ‘이미 다 커버린 어른인데 엄마 눈에는 아직 나는 아픈 아이로 보이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며 엄마가 아팠던 때를 떠올렸다. 여러 번 되짚어 보아도 엄마가 아픈 날에도 나는 엄마가 챙겨준 밥을 먹고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시작했다.
대신 한 가지 기억이 더 떠올랐다. 한동안 엄마에게서 이유 없는 짜증 섞인 목소리가 늘어났던 순간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왜 그렇까’라는 생각이 먼저 따라왔다. 그리고 엄마보다는 나에게 집중하느라 그 때를 유심히 바라보지 않고 지나쳐 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때 엄마는 “나도 힘들어.”를 말하고 싶었는데. 나는 자녀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 목소리를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며칠 뒤 친한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며칠 전 독감에 걸려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고, 친구네 가족은 괜찮았는지 물어보았다. 친구는 아이들 둘을 키우는 엄마였고,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그녀의 집 식구들도 한달 내내 A형 B형 독감을 번갈아 가며 감기를 달고 살았다며, “내가 상전들 모셨지 뭐” 라며 푸념 어린 목소리까지 덧붙였다. 나는 며칠 전 약국에서 보았던 가족들이 떠올랐고, 친구는 괜찮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이어 나갔다. “내가 아픈 건 아무도 몰라줘. 그러니 우리 몸은 우리가 직접 챙겨야 해. 알았지?”
친구와의 전화를 끊자 마자 '상전' 이라는 한 단어가 머리에 맴돌았다. 사실은 엄마도, 친구도, 우리 모두는 상전이었는데, 누구는 엄마라는 타이틀 하나를 더 달아서 잊힌 것이 아닌가 싶다.
“너희만 아파?” 엄마라는 이름 안에 감춰진 여러 마음들이 이제야 아주 조금씩 들리는 것 같다.
* 글쓴이: 지은이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만든 순간을 기록합니다.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며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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