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공기가 차가워졌다. 낮아진 건 바람의 온도만이 아니다. 살림살이처럼 잘 흘러가야 할 것들이 차갑게 얼어버리고 있는듯하여 쌀쌀하고 외롭다. 당장 바람을 데펴서 기온을 높일 수 없으니, 따뜻한 것들을 찾게 된다. 붕어빵도 좋고 핫팩은 주머니 속 필수템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의 품도 있다.
지금은 바쁘게 살고 있는 20대 딸이 한창 사춘기 때의 일이다. 첫 아이의 성장통 앞에서 잔뜩 불안함으로 마음이 얼어있던 날들이었다. 그날은 그냥 나에게도 힘 빼고 쉬자고 말해주고 싶었나보다. 딸의 방으로 가서 말없이 아이 옆에 누웠다. 조금 있으니 둘째도 나를 찾아 누나 방으로 들어와서 같이 누웠다. 비좁았지만 바짝 붙어서 두 팔로 두 아이를 감싸 안고 그대로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아이들을 내 품에 안고 누운 게 얼마만인지를. 곧 옆구리가 뜨듯해 왔다. 그래도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이 하루하루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얼마나 더 가면 다시 아이의 밝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그렇게 가만 누워 있으니 생각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 딸의 어린 날, 미숙한 엄마였던 나를 불러내고 있었다. 그때 내가 아이한테 너무 했던 걸까. 그렇게 생각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옆을 보니 내 양쪽 품 안에서 두 아이들이 잠들어 있었다. 행여 깰까봐 조심스레 내려다봤다. 딸의 얼굴은 참 오랜만에 평화로웠고, 아들은 쌕쌕 귀여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그때 그 순간 만큼은 참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내가 조금 괜찮은 엄마 같이 느껴졌다.
품이라는 최초의 공간
두 팔을 모아 손을 맞잡으면 둘레의 길이가 대략 2미터보다 짧은 원이 생긴다. 그 아담한 공간에 누군가를 들이면 그곳은 ‘품’이라는 공간이 된다. 그 안에서는 체온이 온열기가 되어 공기를 훈훈하게 해준다. 그야말로 ‘안온한 공간’이 되어주는 것이다. 특별한 재료를 쌓아 만드는 건물도 아니고, 아름다운 것들로 채울 필요도 없이, 마음을 내어 팔만 뻗으면 만들 수 있는 공간. 친구와 연인, 딸 아들과 부모님, 선후배, 동료, 그리고 반려동물, 아 그리고 식물도, 소중한 사물들까지도 그 안에서 품어줄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이 품이라는 공간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속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엄마의 자궁이라는 완벽한 공간에서 안정적으로 머무르다가 갑자기 바깥으로 나오면, 세상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기억할 수는 없어도 그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하지만 아기는 자기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도와준 이의 품에 안기고, 그 안에서 점점 안정을 찾아간다. 태어나는 아기를 받아 안는 어른의 두 팔이 만들어 내는 품은 그렇게 한 생명체의 최초의 공간이 되어 세상과 이어준다.
도널드 위니코트 ‘안아주기’
양육자의 품은 이제 한 생명이 자라는 데 더욱더 중요한 공간이 된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소아과 의사인 도널드 위니코트(D. W. Winnicott 1896-1971)는 한 사람이 태어나 초기 유아기에 거치는 정서적 발달 단계를 깊이 탐구했다. 그는 저서와 강연을 통해 유아가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 양육자의 안아주기 holding가 매우 중요함을 강조했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아기에게 양육자의 따뜻한 품은 단순히 배고플 때 수유의 장소가 되고, 졸릴 때 침대가 되어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유아는 태어나서 얼마간 ‘절대적 의존 단계’에 있는데, 이는 자신이 돌봄을 받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아직 언어를 익히지 못한 작은 아기를 품에 안은 양육자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아기의 욕구를 채워주게 된다. 위니코트는 이 ‘절대 의존’ 단계는 한 사람이 독립적인 ‘자아’를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보았다. 아기는 양육자의 품 안에서 돌봄을 받고 있음을 점점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이를 표현하고 그 피드백으로 다시 돌봄을 받으며, 점차 또렷이 ‘자기self’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다. 생애 초기에 절대적이고 충분한 돌봄이 있어야 건강한 독립이 가능하기에, 이 시기 양육자의 ‘주의 깊게 안아주기 attentive holding’는 매우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렇게 두 팔로 만든 품 안에서 아이가 신체적 만족을 얻는 것이 곧 심리적,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토대가 된다니, 그 작은 공간이 내뿜는 온기가 가지는 힘, 해내는 역할은 매우 커다란 것이었다.
나를 품고, 타인을 품는 일
절대 의존 단계를 빠져나와 어른이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도 때때로 따뜻한 품 안에 들어가고픈 순간은 찾아온다. 내가 누군가에게 또 누군가가 나에게 두 팔 벌려 품을 만들어 내어주기도 하겠지. 그리고 그 품은 내가 나 자신에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양팔을 각각 반대쪽 어깨에 올리고,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이며 셀프 포옹해주기. (‘나비 포옹법’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나의 두 팔로 나를 안아줄 때, 세상에서 제일 작을 것만 같은 공간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공간을 꽉 채우는 내가 있다. 그곳이 나를 위해 스스로 지은 공간이라고 생각해보면, 어쩐지 조금 더 안온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절대적 의존 상태에 있던 나처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품 안에 절대적으로 기대어 안길 수도 있다. 그 순간은 내가 아주 작은 아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위니코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정서 발달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리 인간에게 ‘완전한 독립이란 없다’고 한다. 건강한 개인은 절대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는 언제나 환경 즉, 외부 세계 그리고 타인과 상호 의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어쩐 일인지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고 살고 있었던 듯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왠지 살아가는 일의 막막함이 조금 덜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품이라는 공간의 마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어린 아기일 적에 매일 속해 있던 양육자의 품을 떠나 독립을 했지만, 그때의 그 따뜻했던 기억은 우리의 몸 어딘가에 남았다. 꿈틀거리며 성장하던 감각이 새겨진 것 같기도 하다. 그때 이미 우리는 품 안에 들어가고 다시 품을 내어주는 일의 벅찬 유용함을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양육자의 품, 그 절대적 공간은 이제 외부로 점점 확장되고, 그 안에서 자라난 우리는 그렇게 세상과 연결되어 성장하며 살아온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제일 먼저 만났던 이 작은 공간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초겨울의 문턱에 서서 주섬주섬 담요를 챙기고 수면양말도 꺼내어 신는 것처럼, 갑자기 칼바람이 마음을 베어버릴 것만 같을 때면 품이라는 공간으로 조용히 쏙 들어가 안겨 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나를 품어주고, 나를 품어줄 누군가를 찾아가고, 나를 찾아와 안기는 이에게 내 품을 허락해주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랑이라는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글쓴이 김근영
공간을 느끼고 사유합니다.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30대와 40대 초 타국과 타지역에서 거주하며,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한 가족의 주부로 살았습니다. 다시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온 지금, 다양한 공간을 넘어 다니며 의문을 품었던 것들에 대하여 공부하고 글을 씁니다.
kunyoungk7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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