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을 보며, 자연 공간을 느끼다
올해도 가을산을 바라보고 있다. 매일 매일 본다. 멀리서 바라보는 가을산은 매일 변하는 그림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가을산을 눈으로 더듬게 된다. 아침과 오후가 다른 것 같은 날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는 시간도 빨라지니,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이면서 동시에 조금 초조해지게 만드는 그림이기도 하다. 이렇게 매력적인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어떤 공간에 들어갔을 때, 단박에 그곳에 매료되어 본 경험이 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곳이 지하에 있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아래에서 새어 올라오는 음악소리가 조금씩 커지는 것이었다. 설레는 마음의 크기가 커지는 것만큼. 그러다가 마침내 문을 열고 한걸음 들어서자 그 음악이 귀를 뚫고 들어왔을 때, 그곳이 좋아져 버렸다. 오후의 커피를 사러 들어간 곳이었다. 서쪽으로 난 창이 통과시킨 햇빛이 내벽의 연회색 페인트와 만나 은은하게 화려한 빛깔을 뿜어내고 있었다. 카페의 공기 가득한 커피 향과 그 빛깔이 만났을 때도 역시 그랬다. 공간에서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일은 대개 우리의 감각이 자극을 받았을 때 일어난다. 소리, 모양과 색깔, 향기나 냄새, 감촉까지도.
가을산은 단연코 빛깔로 보는 이를 잡아끈다. 그날의 최저 기온이 5도 이하로 떨어지면 산에 있는 식물 이파리의 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마치 천천히 그리는 수채화처럼. 물을 듬뿍 빨아들인 붓으로 빨간색과 노란색 물감을 조금만 묻혀 초록색 종이 바닥에 옅게 깔고, 점점 진하게 색을 입혀가는 과정이 곧 가을이라는 계절인 것 같다. 가을산이 신비로운 그림이라면, 가을은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매일 그 그림을 그리는 시간인가 보다.
집에서는 산이 멀리 있어서 아주 작게 보인다. 도시의 전경 대부분은 건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키가 각각인 채 삐죽이 솟아있는 네모들 사이사이 틈으로, 모서리가 둥근 세모가 있는 모양새다. 산과 눈을 맞추기에는 거리가 좀 있지만, 도심 한 복판에서도 작게나마 산을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 산지가 많기 때문이다. 작지만 산그림을 볼 수 있기에, 가을에는 이런 지형이 특별히 더 좋아진다.
자연 공간은 하나의 건축물처럼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당연히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지 않다. 지도를 보면 지구 위에 있는 우리나라의 산들을 모두 눈으로 볼 수는 있긴 하다. 하지만 그곳이 나에게 공간이 되어주고 내가 그곳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전체 국토에서 산지가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꽤 되기에, 크고 작은 산이 아주 많아서 가을산을 보는 일은 어디에서도 할 수 있다. 다만 멀리에 두고 작게 보거나, 가까이에서 크게 본다는 차이는 있다. 나의 시야를 꽉 채우는 큰 산을 보고 싶으면 산기슭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특히 가을에는 더 산기슭이 그립다. 그곳에 나의 집이 있다면,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일이 산 풍경으로 들어가는 일이 되어 가을산을 그리는 일에 흠뻑 빠져들 수 있을 텐데.
산을 바라본다는 것
산을 바라보는 일은 산을 오르는 일도 아니고 타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산 정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산을 올라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산 속에 있으면 모든 감각을 자연 속에 맡기는 셈이 된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인 공간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색들을 보고, 풀과 흙의 냄새를 맡으며, 바람 소리와 흔들리는 이파리 소리 그리고 새소리를 듣는다. 땅을 디디는 발로 흙의 감촉을 느낀다. 내내 바람과 촉촉한 산이슬이 얼굴과 팔다리와 손을 두드려 만진다. 등산을 사랑하는 이유로 충분한 감각의 향연들이다. 그에 비해 산을 바라보는 일은 오로지 눈으로 들어오는 자극만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빨려 들어갈 듯이 가을산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대구에 살 때였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매주 금요일 같은 시간에(오후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운전을 해서 같은 곳에 갈 일이 있었다. 대구는 분지로 이루어진 도시다. 북쪽으로 해발 1km가 넘는 팔공산이, 동남쪽으로 경주와의 사이에 680m의 장육산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경주국립공원이 있는 단석산도 830m나 되는 높은 산이다. 그뿐 아니다. 남쪽으로 쭉 가로 이어진 비슬산(1000m), 최정산(900m), 주암산(850m)이 있으니, 꽤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평지에 세워진 도시인 것이다. 여기에 산을 타고 내려온 금호강과 낙동강이 있어 사람이 살기 좋은 평평한 땅이 되었다.
과거에 내가 지나가야 했던 도로 바로 옆에도 산이 있었다. 앞산을 뒤로 두르고 대덕산, 비파산, 용두산이 사이좋게 모여있는 곳 옆으로 매주 같은 시간대를 지나는 일은 내게 산을 바라보는 일의 즐거움을 알려 주었다.
"얘들아, 오른쪽에 있는 산을 봐. 지난 주에 봤을 때랑 색이 달라졌어. 오늘 이 산을 보면서 색깔을 기억했다가 다음주에 다시 보면 재미있을거야."
아이들 손에 아직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미국에 살 때부터 차로 이동하는 일이 많다보니, 차 안에서 아이들과 말로 놀거리를 늘 찾아내야 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해주면서, 나 역시 산이 뿜어내는 빛깔이 때때로 달라지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갔던 것 같다.
그곳을 다니던 때는 겨울에서부터 봄까지였다. 아쉽게도 가을의 단풍산을 같은 시간대에 관찰하고 감상할 기회는 없었지만, 겨울부터 봄산으로부터도 새로운 것을 알게 된 충분히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크게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초록색 하나에서 변주될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은 늘 변화하고 있음'을 말이다. 그때로부터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어느새 나는 혼자서 산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해마다 아이들이 자라고, 나의 엄마 역할이라는 것도 그만큼 줄어들면서, 산을 유심히 보는 시간이 늘어난 지 몇 해 째. 올해는 가을산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다.
1년을 주기로 살아가는 산 속 식물들에게 가을은 전에 초록(엽록소)에 가려져 빛깔을 내지 못했던 노랗고(황엽), 빨간(홍엽) 색을 재발견하는 시절이기도 하다. 노란 색은 원래 잎이 가지고 있던 색이고, 빨간 색은 새로 만들어진 색이다. 날이 추워지면서 더 이상 광합성 활동을 하지 않게 된 잎에서 초록이 사라지고 나타난 두 색깔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가을산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과정은 식물의 생명 현상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화라서 특정 호르몬이 작용한다고 한다. 꼭 지금의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대 중반은 어떤 고개 하나를 넘는 것만 같은 시간들이었다. 이전에도 인생의 변곡점이라 할 만한 시점이 몇 차례 있었지만, 오롯이 나 자신의 변화를 스스로 감지하고 해석하고 결국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경험이었다. 요즘 거울 앞에 서면, 전에 없던 내가 보일 때가 종종 있다. 10대에서 30대까지 다양한 이유로 가려졌던 고유한 나의 모습, 혹은 내가 되어가고 싶어서 만들어가는 새로운 모습도 거기에 있다. 내 안에 깊숙이 잠자고 있던 노란색이 드러나고, 내가 갖지 못했던 빨간색이 새로이 만들어지는 듯 하다. 마치 가을산의 단풍처럼.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초록빛이 전같이 화사한 빛을 내주지는 못한 데도, 이런 나의 모습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을산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과 똑같다.
산과 나, 우리가 아름다운 건 그 안에 축적된 시간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건 생명 속 초록이 봄여름 내내 광합성을 하며 성장하던 긴 시간이다. 그리고 한껏 원숙한 빛을 내다가 어느 때가 되면, 내년의 생명을 준비하기 위해 가지에서 떨어져 낙엽이 될 준비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자연에서 인생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뇌가 가진 발군의 능력으로 많은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고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의 삶도 자연의 순환 속 하나이기에.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가을산을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대도, 자연이라는 공간의 매력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쓴이 김근영
공간을 느끼고 사유합니다.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30대와 40대 초 타국과 타지역에서 거주하며,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한 가족의 주부로 살았습니다. 다시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온 지금, 다양한 공간을 넘어 다니며 의문을 품었던 것들에 대하여 공부하고 글을 씁니다.
kunyoungk7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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