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은 잠깐 불쾌하고 넘길 수 있는 일인데 이상하게 화가 많이 나는 일이 있다. 말실수를 했거나 누군가에게 폐를 끼쳤거나 아이에게 심한 말을 쏟아냈던 일을 곱씹으며 자신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부모님이 무리한 부탁을 하거나 친구가 약속을 어기거나 정리되지 않은 아이의 방을 볼 때, 심하게 화가 나기도 한다. 왜 나는 어떤 상황에서 유난히 화가 많이 나는 걸까.
J는 출근하면서 옆자리 동료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동료는 J를 힐끗 쳐다보고도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실은 며칠 전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의 표정이 좋지 않다고 느끼고 있던 터였다. 괜히 아는 체를 했다고 자책하면서도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상대가 내 인사에 반응이 없을 때 누구나 무안하고 불쾌해질 수 있지만, J가 이 상황에서 유난히 화가 많이 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동료가 인사를 받지 않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때, J의 마음속에서 어떤 신념이 건드려졌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분노는, 특히 자신을 향한 분노는 내 속에 있는 어떤 신념과 맞닿아 있다. J에게는 ‘나는 누구와도 잘 지내야 한다’는 암묵적인 신념이 있었다. 나는 모두와 잘 지내야 하는데, 동료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마음속에서 강한 사이렌이 울린 것이다.
이러한 신념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잘 살펴보면 ‘누구나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거나 ‘실수하면 안 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와 같이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하면 안 된다’의 당위, 혹은 ‘상식’이라고 믿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 막상 이를 직시해 보면, ‘항상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 ‘모두 늘 완벽할 수는 없지’ 하며 그 믿음이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인정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우리가 완전한 진실처럼 믿고 있기 때문에, 영문을 모르는 분노가 요동치게 된다.
오래전 아이가 내 곁에서 공부를 하다가 여러 짜증스러운 일이 겹치자 들고 있던 연필을 바닥에 던지는 일이 있었다. 순간 화가 많이 나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를 나무랐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오랫동안 기분이 나쁜 채로 있었다. 왜 유독 그 상황에서 화를 많이 났던걸까. 저녁에 찬찬히 생각해 보니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랄까 봐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당시 아이에게 존중받지 못했다는 좌절감이 컸던 탓이었다. 그 이면에는 ‘아무리 화가 나도 타인을 배려해야 해야지’하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떠한 신념은 나의 고유한 경험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 내게 강한 감정을 남긴 사건이라거나 누군가 반복해서 해 준 이야기가 내 신념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 ‘남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와 같이 부모님이 거듭 들려준 이야기가 내게 절대적인 진실처럼 남기도 한다. 또는 잘못이나 실수를 했을 때 부모가 실망하는 모습이 괴로웠던 사람이 ‘무엇이든 잘 해야 한다’는 신념을, 따돌림이라는 큰 상처가 있던 사람이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하면 안 된다’와 같은 신념을 갖게 되기도 한다.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절박하게 붙든 보호장치와 같다.
내게 배려가 중요했던 이유도 ‘친절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훈계도 있었지만, 타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 함께 있었을 때의 공포스러웠던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 어린 나에겐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 곧 위험한 일로 여겨졌고, 안전을 위해서는 꼭 배려해야 한다는 암묵적 믿음이 만들어졌다.
‘사람은 아무리 화가 나도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타인을 향한 당위는 실은 내게도 향하고 있었다.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에, 싫어도 거절하지 못하거나 화가 나도 표현하지 못하고 꾹 참거나 마지못해 양보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배려해야 한다'는 경직된 틀에 내 행동을 구겨 넣고 있었다.
신념이 괴로운 이유는 경직성 때문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은 모두 그 자체로 긍정적인 기능을 할 때가 많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타인이 꼭 따라야 하는 원칙처럼 붙들 때 우리는 힘들어진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화가 난다면, 그 아래에 어떤 신념이 자리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봐 주면 좋겠다. 그 신념은 결국 내게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바로 나의 ‘욕구’이다. 신념의 ‘해야 한다’를 ‘하고 싶다’로 관점을 바꾸면,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보인다. ‘사람은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 대신 ‘배려하고 싶다’ 혹은 ‘배려받고 싶다’로, ‘누구와도 잘 지내야 한다’가 아니라 ‘상대와 잘 지내고 싶다’로, ‘모든 일을 잘 해내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면 ‘이 일을 잘 해내고 싶다’로 바꿔본다.
신념을 바람으로 바꾸어 볼 때,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팽팽했던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다. ‘존중’, ‘친밀한 관계’, ‘성취’와 같은 나의 필요를 응시하는 다정한 시선도 덤으로 얻는다. 무엇보다 타인이나 자신을 비난하느라 소모했던 에너지를 이제는 중요한 고민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나의 필요를 어떻게 채울 것인지.
글쓴이_이지안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성격 좋다는 말에 가려진 것들>을 출간하였고,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하였습니다.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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