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항암 생활

암입니다.

왜 하필 저인가요?

2024.07.23 | 조회 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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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 이럴 때는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주 좋은 일이 있거나 친구가 아프거나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목소리로 짐작하건대 무슨 일이 있음이 분명했다. 친구는 암 진단을 받았다. 3년 반 전, 대장암 3기 진단을 받고 투병했던 나와 앞으로의 과정을 의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치료를 시작하는 마음가짐부터 앞으로의 검사 과정과 수술, 그 후의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이겨내는 방법을 하나씩 알려 주었다.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친구는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전화를 걸어왔다. 

며칠 전 스콜 같은 장맛비 소리를 들으며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있었다.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는 메이와 사츠키 옆에 커다란 덩치의 토토로가 든든하게 서 있는 장면을 보다가 예상치 못하게 눈물이 툭 떨어졌다. 옆에 서 있는다는 것. 그저 옆에 함께 있어 준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무섭지 않을 수 있다. 그때였다. 나의 투병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내고 희망을 품을 단 한 사람이 있다면 나의 경험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웃집 토토로 한 장면: google
이웃집 토토로 한 장면: google

투병기를 쓰겠다는 결심이 쉽지 않았다. 진단을 받고, 수술하고, 항암치료 했던 시간을 기억하기 싫었다. 누군가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힘이 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것이 효율성 높은 삶을 살아온 나의 생각이기도 했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누가 읽겠으며, 괜히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쓰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이제 온전한 사람이 된 것처럼 아플 때의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었다. 

항암의 고통을 잊을만하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들이 암에 걸렸다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8차에 걸친 지독한 항암치료를 끝내고 짧은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친한 언니의 가족이 나처럼 대장암이라며 내가 지나온 과정들을 알고 싶다고 전화를 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나이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단지 같은 대장암 3기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마치 오랜 친구처럼 길게 통화를 했다. 그 뒤에도 몇 분들이 연락을 해왔고 그들은 나라는 사람을 암을 이긴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며 부러워했다.

입원실에 망연하게 누워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간절하게 읽고 싶었던 글은 누구누구는 이렇게 해서 암을 완치했다 식의 이야기였다. 충격과 공포, 자기 연민으로 꽉 찬 내용 말고 암 환자도 즐거울 수 있고, 희망이 있고, 예쁘게 옷을 입을 수도 있다는 그런 글을 찾아서 읽고 싶었다. 만약 항암으로 머리가 다 빠진다면 내 머리형에는 어떤 가발이 어울릴까도 찾아서 읽고 싶었다. 실제로 많은 가발들을 찾아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가발을 찾지 못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스타일 좋은 가발도 못 쓴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몇 날을 가발에 꽂혀서 인터넷을 검색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장암 항암치료는 머리카락 빠지는 부작용이 없었다. 운이 좋았다. 

아픈 나를 위해 친구가 만들어 준 인형
아픈 나를 위해 친구가 만들어 준 인형

몸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2020년 봄부터였다. 머리를 들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고 아침마다 배가 살살 아팠는데 평소에 앓고 있는 갑상선 기능 저하증 증상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화장실을 가는 횟수가 잦아지고 복부 팽만감이 심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건강검진을 신청했다. 내시경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검사 전에 걱정하지 말라며 싱글거리던 의사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혀 있었고 나는 바로 아산병원으로 전원 되었다. 아산병원 내과 의사는 내가 가져간 CD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암 진단을 받고 하염 없이 걸었던 강변의 나무
암 진단을 받고 하염 없이 걸었던 강변의 나무

“검사 하나마나 대장암이에요. 종양이 이렇게 크다니! 지금 죽을 수도 있어요. 천공 직전이라고요! 당장 입원하세요”

환자에게 알려야 하나 마나 고민하는 우아한 과정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얀 마스크를 쓴 의사는 소리소리 지르며 온 세상에 내가 암 환자라고 알리고 있었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진료실에서 나가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서 잠시 서성이다가 안내 데스크로 가는 길에 비로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천만다행으로 입원실이 있었고 아무런 빽이 없었는데도 그 어렵다는 대학병원 입원 예약에 성공했다.

다음 날부터 아산병원 암 병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유기농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고, 온갖 운동을 하고, 일 년 내내 감기조차 걸리지 않던 내가 암이라니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입원하는 날에 나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버버리와 눈에 띄는 초록색 골덴 바지를 입었다. 그때까지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예쁜 옷을 입고 싶었고 내가 좋아하는 비누 향기를 맡고 싶었다. 향 좋은 비누도 챙겨 갔다. 그러나 밤마다 어느 병실에서 흘러나오는 으악! 하는 짐승 같은 비명을 들으며 꼼짝없이 암 환자가 되었음을 실감해야 했다.

입원과 함께 삼 일 동안 위 대장 내시경, CT, MRI, 심전도, 폐 기능 검사 등 밤낮없이 검사를 받았다. 소화기 검사다 보니 3일간 금식하며 링거로 영양을 보충했다. 아침마다 체중을 쟀는데 신기하게도 체중에 변화는 없었다.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간병하는 보호자 한 명 외에는 면회조차 되지 않았다. 외로웠다. 열심히 살았고, 술 담배도 안 했고, 자야 하는 시간에 자고 일어나야 하는 시간에 일어났는데 왜 하필 나였는지 자꾸 억울했다. 살고 싶어서 외로움을 외면하기로 했다. 각종 주삿바늘을 꽂은 채 챙겨 온 영화를 보면서 웃었다. 어두침침한 기분에서 나 홀로 머물고 싶지 않았다. 병실 밖에 있는 사람들처럼 웃고 싶었다. 외로움의 구덩이에서 스스로 기어 나오고 싶었다. 

검사 결과, 2기 말이라고 예측했던 암은 3기 중반을 넘기고 있었다. 다행히, 이것은 정말 다행인데, 입원한 지 3일 만에 검사가 끝났고 수술 날짜가 이틀 후로 정해졌다. 외과 의사 선생님이 와서 3일을 굶었는데 앞으로 3일을 더 굶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틀 후 수술을 받게 되었다. 건강 검진을 하고 수술까지 대략 열흘이 걸린 셈이다. 어떤 롤러코스터도 이만큼 스릴 넘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입원실에서 보았던 다큐멘터리
입원실에서 보았던 다큐멘터리

수술실은 그다지 재밌는 곳은 아니지만 크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수술은 복강경으로 진행되었고 나중에 전해 들으니 대략 두 시간 정도 걸렸다고 했다. 정상 대장의 길이는 120cm인데 30cm 정도를 잘라내는 수술을 했다.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황을 감사하게 생각했고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수술 후에는 부지런히 운동을 했다. 병원 안에서 운동할 만한 장소를 찾아서 계속 걸었다. 환자복은 매일 갈아입었다. 예쁜 옷 대신 깨끗한 옷이라도 입고 싶었다. 링거를 맞은 지 일주일 가까이 되자 흙이라도 파먹고 싶을 만큼 배가 고팠는데 드디어 첫 식사가 나왔다. 멀건 흰 죽과 간장이었다. 황후의 밥상이 따로 없었다. 

 

2부 계속됩니다.

 

글쓴이: 구경희 

미술대학입시 전문 컨설턴트이다. 인생 이야기를 즐겨 읽다가 글쓰기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아이를 키우며 자신까지 해방된 운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고 한때 바위타기를 꿈꾸었다. 요가, 글쓰기, 그림 그리기를 인생의 동반자로 삼고 있다

브런치 https://brunch.co.kr/@cesil1004

코너명 소개: 슬기로운 항암 생활: 

암에 걸렸다. 대장암 3기였다. 명랑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눈물 흘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완치까지 1년 반이 남았다. 요가도 하고 수영도 하고 해외여행도 하고 출근도 한다. 아직, 절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희망을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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