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기다림'이라는 말은 일상과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유독 회식이 많았던 첫 직장에서 숙취로 고생하는 게 일상이었던 나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 회사 근처 병원에서 수액을 맞는 일이 잦았다. 여의도 한복판에 위치한 회사 주변에는 수많은 병원들이 있었는데 가장 가까운 곳을 방문하면 열댓명의 대기자가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시간도 없는데 여기서 기다릴 수는 없지 하고 곧바로 옆 병원을 찾아가서 30분 수액을 맞고나면 몸이 금세 회복돼 오후 업무는 쌩쌩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극심한 생리통과 습관성 어깨 탈골을 달고 사는 나는 살면서 구급차에 실려간 경험만 4번이 있다. 길거리에서 악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거나 집 안에서 처음으로 어깨가 탈골되면서 꼼짝도 못했던 날마다 내가 직접 119에 전화하면 5분도 안 돼 구세주처럼 구급차가 등장했다. 아픈 날 뿐이랴. 야근으로 피곤에 쩔어 밤늦게 귀가해도 원하는 메뉴를 주문하면 금방 배달해주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 덕분에 30년 넘게 배고플 새 없이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무엇이든 신속하게 필요한 것들을 처리하는 것이 당연했던 내가 2년 전 독일에 온 후로 가장 힘들었던 건 거의 모든 것이 내가 원할 때 이뤄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독일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배운 단어는 ‘테아민(Termin, 예약)’이었다. 비자 신청은 물론이고 각종 행정 처리, 통장을 개설하기 위해 은행을 방문하는 것까지 모두 테아민이 필요했다. 비자 예약까지 무려 2달을 기다려야 했던데다 결국 나의 비자는 첫 발급까지 무려 1년 반이 걸렸다. 운전 면허 교환을 하기 위해 담당 관청을 방문했는데, 예약도 인기 콘서트 티켓팅하듯이 새로고침해가며 겨우 할 수 있었던 데다, 예약 시간에 방문해도 수십분 기다리는 건 일상이다. 통장을 개설하고 싶으면 은행에 방문해서 다음날 예약을 잡을 수 있고,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면 다음날 은행에 방문해 서류를 제출한 후 3일이 지나야 우편으로 새 비밀번호를 받을 수 있다.
그나마 행정이 느린 것은 견딜 만하다. 아플 때 병원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건 가히 절망적이다. 극심한 감기 몸살로 병원을 예약하려고 하면 가장 빠른 일정이 한 달 뒤인 경우는 부지기수다. 한 번은 기차역에서 극심한 생리통으로 쓰러져 구급차를 불렀다가 30분 정도 걸린다는 말에 그냥 택시를 잡아 대학병원을 간 적도 있다. 남편이 허리를 삐끗해서 병원에 방문하니 의사가 물리치료 진단서를 써준 적이 있는데, 허리 통증이 이미 사라지고 난 후에야 10회의 물리치료가 끝이 났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연휴가 끼면 2주가 더 지연되다보니 다친 허리도 집에서 푹 쉬고 다 나아버렸고 이미 예약한 물리치료를 억지로 다 받았던 적이 있다. 새벽 4시가 넘어서 맹장이 터져서 응급실을 방문했던 한 친구는 지금 와도 대기를 하면 결국 일반 병원 업무 시간이 시작된 후일테니 그냥 아침에 다시 다른 내과를 찾으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 친구는 결국 새벽에 집에 돌아가서 다시 오전 9시에 병원을 찾아 맹장 수술을 받았다.
예약을 미리 한다고 해서 병원 진료를 정시에 맞춰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약 시간에 맞춰 병원을 찾더라도 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의사를 볼 수 있는 경우는 너무 흔해서 대기 시간이 지루하지 않게 늘 핸드폰 배터리는 든든하게 충전하고 가야한다. 읽을 책을 가져가도 좋다. 물론 의사를 만나면 아주 상세하게 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긴 대화를 통해 진단을 내려주기는 하지만 나와의 진료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뒷 사람들의 대기 시간이 길어지겠구나라는 생각을 늘 하곤 한다. 이쯤되면 병원가는 일이 너무 큰 스트레스라서 어지간한 불편함으로는 병원을 찾지 않는다. 늘 상비약을 다양하게 구비해두고 스스로 내 몸을 돌보는 데 더욱 신경쓸 뿐이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게 당연해지다보니 내가 원할 때 원하는 서비스를 받고 싶다는 기대조차 사라진다. 당장 내가 필요하면 은행이든 관청이든 병원이든 예약없이 찾아가서 번호표 뽑고 기다리면 바로바로 원하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행정의 천국 한국을 떠올리면 가끔 꿈만 같다. 심지어 오늘 밤에 주문하면 새벽에 집 앞에 물건을 가져다주는 로켓배송이 일상이 되고, 24시간 영업하는 식당이나 편의점, 카페가 많은데다 새벽에도 원하는 음식을 시켜먹을 수 있는 서울의 편리함은 비현실적일 정도다. 덕분에 나는 30년 이상 완벽한 편리를 누릴 수 있었고, 기다림이라는 말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반면 그래서인지 독일에서 사는 사람들은 기다리는 걸 정말 잘 한다. 식당에서 주문을 15분째 받지 않아 미어캣처럼 고개를 쑥 내밀고 두리번 두리번 나와 한국인 친구가 종업원과 끊임없는 아이컨택을 시도할 때, 우리보다 먼저 온 독일인 할아버지들은 이미 대화 삼매경에 빠져 있다. 언젠가 주문을 받겠지라는 생각인건지 재촉할 생각도 없어보인다. 바쁘게 일하는 종업원들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면 주문을 받으러 갈테니 기다리라는 말만 들을 뿐인데도 답답해하며 초조한 눈빛을 계속 보냈다. 생각해보면 저녁 식사를 15분 늦게 주문한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닌데도 나와 친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주문을 왜 안 받는지 꽤 오래 답답해했다. 독일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고 나서야 외식하는 날은 반드시 시간을 여유있게 마련하고, 한 시간만에 후딱 먹어치워야 하는 촉박한 일정에는 무조건 테이크아웃만을 하게 된다. 이제는 나도 식사 시간에 ‘기다리는 시간'을 당연하게 고려하게 된 것이다. 주문을 받는 것은 물론 계산을 하는 것도 하세월인 독일의 레스토랑에서 언제까지고 혼자서 미어캣마냥 고개를 쑥 빼고 초조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기한 건 계속 기다리다보니 이젠 기다리는 것도 꽤 잘하게 됐다. 내 순서가 오지 않으면 답답해하고,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신경질적으로 주문벨을 누르지도 않고(사실 독일은 주문벨도 거의 없다), 내 뜻대로 안 되면 화가 팍 나버리는 급한 성격도 잠잠해졌다. 애초에 서비스라는 것은 나 아닌 타인이 나에게 제공하는 것인데 내가 원하는 대로 100% 맞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체득하게 된 것이다. 담당 공무원이 3주씩 휴가를 가서 내 서류가 밀려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래도 휴가는 다녀와야지 하고 받아들이게 되고, 당장 뼈가 부러지거나 죽는 병도 아닌데 아프면 약 먹고 잘 쉬면서 버티면 되지하고 기다리게 된다. 도를 닦으러 산에 올라갈 필요 없이 독일 소도시에 살다보면 그야말로 기다림만큼은 고도로 수련할 수 있다.
독일에서 기다림이 길어질 때마다 한국이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좀 더 느린 이 곳의 생활에 더 적응하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한국에서 뜻대로 안 되면 강경한 컴플레인으로 어떻게든 원하는 걸 얻어내고야 마는 서비스직에 대한 갑질을 뉴스로 접하면 ‘저 사람도 기다리는 능력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타인을 기다리는 것도 훈련이 필요한데, 우리 사회가 애초에 기다림을 훈련할 기회가 없는 것 아닐까. 모든 서비스가 너무나 빠르고 완벽한 나머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의 인격은 지워지고 소비자의 니즈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편리만이 남은 사회에서는 모두가 급해지고, 쉽게 화를 내고, 기다릴 줄 모르게 된다. 서비스 자체보다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타인을 하나의 인격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좀 더 익숙해질 때까지 느리고 답답한 독일에서의 생활을 좀 더 수양(?)하고 싶다.
*사실 독일에서도 도시 중심에 있는 대형마트 몇몇 곳은 흔히들 손이 안 보인다고할 만큼 계산원들이 일처리가 빠르다. 독일 아마존에서도 로켓배송까지는 아니지만 바로 다음날 배송되는 아마존 프라임 서비스를 제공한다. 유럽의 수많은 나라 중에서 독일 정도면 그래도 일처리가 정확하고 빠른 편에 속한다고들 한다. 독일은 모든 서비스가 다 느린 것은 아니지만 한국처럼 모든 서비스가 빠르지는 않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제아무리 익숙해지고 있다고 해도, 가끔 당일 처리되는 한국의 행정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뻥 뚫리는 쾌감이 있다. 이 편리함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짜릿하고 중독적이라 익숙해지면 끊어낼 수가 없다.
* 메이 -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프리랜서로 일하며, 독일어를 배우면서, 일상의 풍경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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