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개월은 '인생은 계획대로 따라가지 않는다.'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올해 초, 나는 대학원 졸업을 위해 6개월의 휴직을 시작했다. 그리고 봄이 올 무렵, 오랫동안 암투병을 하던 아빠는 하늘나라로 멀리 여행을 떠나 버렸다. 하지만 눈물 속에 오래 빠져 있기는 어려웠다. 가족들은 각자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나 또한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논문을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에 하루하루 일상이라는 톱니 바퀴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몸도 마음도 조금씩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오월이 되자 '가족 여행' 이라는 이야기가 조금씩 식탁 앞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숨가쁘게 달려왔던 시간 속에서 모두에게 잠깐의 멈춤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장소는 아빠가 좋아하던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여수로 정해졌고, 열차표를 예매하고 호텔을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떠나고 싶다'와 '떠나고 싶지 않다'의 마음 두가지 사이에서 시소를 타고 있었다. 그때는 논문을 위한 실험을 하고 있었고, 매일 최소 세 시간씩 진행 상황을 살펴보고 정리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떠나는 전날까지 옷가방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노트북 가방에 충전기와 마우스가 들어 있는지 여러 번 살펴봤다. 기차가 출발해도 내리기 전 오늘 할 일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마음에 창밖의 풍경을 보기 보다는 타다닥 타자를 치며 모니터와 시계를 번갈아 바라봤다. 해야 할 일이 따라온 여행이었지만, 바다 앞에서 만은 모니터를 덮고 싶기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 마음은 ‘떠나고 싶다’쪽으로 한참 더 기울었던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유 없이 바다를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이 유난히 좋았다. 서울에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 말고는 저 멀리를 바라볼 수 없는 순간이 갑갑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무언가 가득 차 있을 때마다 바다에 가고 싶었다. 저 멀리 수평선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덩어리들이 훅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이번 여행에서도 그런 수평선이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다.
여수에 도착하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을 땐 뭔지 모를 가벼움이 따라왔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이미 끝냈고, 차가운 커피 한모금과 달달한 케이크를 번갈아 입에 물었는데 눈앞의 통유리 너머엔 바다까지 펼쳐져 있으니, 진짜 떠나온 것 같았다. 사실 여행을 고민하던 마음 속에는 ‘며칠 동안 여행을 가버리면 지금 쓰는 논문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졸업은 해야 할 텐데,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의 마음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수평선 너머 졸업 논문을 손에 쥔 내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렇게 바닷물 속 동글동글 포말 속에 나의 걱정도 함께 담겨 수평선 너머로 스르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저녁이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우리 내일은 순천으로 갈래?" 동생과 엄마가 순천으로 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순천? 이름으로만 들어본 그곳엔 바다도 없을 텐데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한시간 만에 도착할 정도로 가깝다고 하지만, 다녀와서 밤에 또 컴퓨터를 켜고 일을 해야 할 나에겐 조금 귀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족들이 가고 싶어하는데 굳이 반기를 들고 싶지 않았고, 이번 기회가 아니면 순천이란 곳엔 다시 시간 내고 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일찍 가족들과 함께 순천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순천에 도착해서도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진 않았다. 작은 역 앞에서 우리는 택시를 탔고, 순천만으로 가는 길목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 어디에도 바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시골길로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씨도 어제보다 더워 밖을 돌아다니면 덥고 짜증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따라왔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점점 더 별게 없을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같이 온 여행에 굳이 투덜대고 싶지 않아 괜스레 유난히 쨍한 햇살을 탓하며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입구 안으로 들어서니 서울대공원에서 타는 코끼리 열차와 비슷한 커다란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방송에서는 5분 정도 후 순천만에 도착한다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정류장을 지나 점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 3분 정도 흘렀을까, 꼬불꼬불한 길이 지나 눈앞에는 초록과 청록 어느 중간의 색이 가득한 갈대들이 들어왔다. '어라 이게 뭐지?' 순천만에는 갈대가 많다고 했는데, 내 눈앞에는 평소 알고 있던 누런 황토색이 아니라 초록과 청색의 중간 즈음의 물을 가득 머금은 갈대숲이 보였다.
시선을 올리자 일렁이는 갈대가 저 멀리 끝없이 이어져 마치 수평선이 눈이 들어오는 듯했다. 분명 숲인데, 내 눈에는 이미 바다가 한가득 들어왔다. 푸른 빛을 가득 머금은 갈대 잎사귀들은 쏟아지는 햇살을 조금씩 반사해 반짝거리는 윤슬을 뿜어냈고, 바람에 몸을 맡겨 좌우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반짝이는 파도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일렁이는 갈대숲은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졌고, 저 멀리 끝지점은 지평선이 아니라 수평선으로 보였다. “우와….” 이런 곳을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과거의 나에게 반성하라 속으로 말하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곧이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우리랑 같이 이 좋은 풍경 보고 있지?" 나도 엄마의 이야기에 이어 "아빠가 같이 왔으면 진짜 좋아했을 텐데"라 덧붙였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아빠 우리 잘 지내고 있죠? 아빠가 그렇게 기다리던 졸업도 하고, 잘 살게요, 지켜봐 줘요' 하늘과 땅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선 고개를 들지 않고 저 멀리 바라보고만 말해도 내 목소리가 하늘까지 재빨리 닿을 것만 같았다. 곧이어 휘리릭 바람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났는데, 마치 “응”이라고 대답하는 목소리 같이 느꼈다. 그렇게 툴툴거리며 시작한 순천여행에서 나는 또 다른 바다를 만나버렸다.
우연히 만난 갈대 수평선의 모습들은 차곡차곡 휴대폰에 담겨 여행이 끝나고도 내 곁으로 따라왔다. 일상에서는 또다시 숨가쁜 나날들이 이어졌다. 때때로 불안한 순간도, 걱정도 찾아왔다. 하지만 막막할 때면 그 안에서 멈춰 있지 않고 주머니 속 잠자고 있던 일렁이는 갈대 파도와 수평선을 꺼내 보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차곡차곡 쌓인 짐들이 사르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이번 여행에서는 바다 수평선 말고도 또다른 초록 수평선을 찾은 것 같다. 그렇게 답답할 때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공간을 지도에 한곳 더 찍었다는 생각에 든든해진다. 올해를 다 보내고 내년 오월이 되면 또 다시 순천만에 가보고 싶다. 그때는 흔들리는 갈대 수평선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빠 저 이번 한 해도 잘 살았죠?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아가 볼게요.” 라고 말이다. 그리고 흔들리는 갈대 소리 대답을 듣고 나면,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는 일상을 살아갈 것 같다.
* 글쓴이 - 지은이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만든 순간을 기록합니다.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며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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