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충분히 괜찮은 엄마라고_어느 심리학자의 고백_이지안

2023.07.19 | 조회 1.69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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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친구는 아이에게 또 짜증을 냈다며 자책했다. 그녀는 내가 아는 부모 중에서 가장 너그러운 부모 ‘Top 10'에 들고도 남을 사람이다. 업무 공과를 두고 상사와 실랑이가 있던 날, 퇴근 후 집에 와보니 아들이 약속을 어기고 유튜브를 오래 보고 있었고, 그대로 짜증이 쏟아졌다 했다. “나 왜 이렇게 맨날 짜증 내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걸까. 좋은 엄마가 아니야, .”

 

양육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일관성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양육자의 기분에 따라 오락가락하지 않고 안정적이고 일관적인 태도로 양육할 때 아이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쌓이고 있다. 아이에 대한 태도가 비일관적일 때, 아이는 혼란스러워지고 분노나 불안, 불쾌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기 힘들게 되며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불신이 깊어진다는 그런 연구 결과들 말이다.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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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를 좋아했다. 그날도 가스레인지 앞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어머니 곁에 서서 엄마, 왜 우리 집은 2층이 없어? 근데 왜 영숙이네 개는 털을 밀었는데?” 하며 '' 퍼레이드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몇 번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못 참겠다는 듯 이제 그만 물어봐, 엄마 바쁜 거 안 보이니?” 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때의 당황스러움과 서러움이 컸던 탓인지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건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짜증 세례를 받는 일은 그 외에도 종종 있었다. 아침에 마음같이 머리가 잘 안 빗겨지는 날에는 머리를 빗겨주던 어머니에게 주인 닮아 머리가 말도 안 듣네라는 꾸중 아닌 꾸중을 듣기도 했고, 저녁에 준비물을 늦게 말한 날에는 벼락같은 호통을 들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어머니는 바쁜 사람이었다. 낮에는 부업 삼아 일거리를 찾아 나섰고 저녁에 되면 아버지가 퇴근하기 전에 저녁을 차려내야 했다. 아버지 퇴근 시간에 맞춰 밥상이 준비되지 않은 날에는 저녁 내내 아버지의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결혼 생활이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는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휴일이면 나와 동생을 데리고 공원이나 유원지로 향하기도 했다. 홀로 도맡은 살림부터 육아에 긴장의 연속인 결혼 생활까지 빠듯한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내가 버거울 때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에 대한 기억만이 전부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내 머리에 공을 들였다. 어느 날은 머리를 정수리에서부터 양 갈래로 땋아 내려 리본으로 묶고 또 어떤 날은 땋은 머리를 돌돌 말아서 양쪽에 작은 모자를 씌운 것 마냥 단단하게 붙여주기도 했다. 하루는 머리 꼭대기에서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어 넘겼는데, 이마가 넓은 편이었던 나는 얼굴의 절반을 반짝이는 이마가 차지했다. 훤하게 벗어진 이마를 보고서도 아이고 우리 딸 참 이쁘네하고 웃으며 바라보던 어머니의 모습도 있다. 3 시절 매일 같이 밤늦게 학교서 돌아오는 나를 기다렸다 내가 좋아하는 쫄면을 끓여주려고 면발을 헹구던 어머니의 바쁜 손놀림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렇듯 나를 대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일관적이지 않다. 어떨 때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화를 내뱉는 사람이었다가, 또 어느 날에는 따뜻하게 덥혀진 온돌처럼 푸근한 어머니이다. 나 또한 지금 나의 딸들에게 그런 엄마이지 않을까 싶다. 간혹은 아이들의 실수에 관용을 베풀며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이다가도, 어떨 때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화를 내는 그런 어머니 말이다. 아이가 냉장고에 주스를 쏟아버리거나 아끼는 컵을 깨버렸을 때도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어” 하며 자못 어른스럽게 아이를 타이르다가도 아이가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하거나 한두 번 말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을 때에는 단전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사실 이마저도 화나는 상황과 아닌 상황에 대한 유형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걱정거리가 많을 때, 남편과 다툼이 있었던 날 특히 화를 참기 힘들어진다.

어린 내가 어머니를 보며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던 만큼 아이도 나에 대해 그렇게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가 자존감이 낮아지거나 정서 조절에 문제가 생기거나 부정적인 문제 행동을 보이게 되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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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깊이 연구한 의사인 마가렛 말러(Margaret S. Mahler)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정서적인 항상성이지 단순한 부모의 영속성이 아니라고 했다. 정서적인 대상항상성이란 부모에게 매우 실망했을 때에도 부모에 대해 좋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아이의 능력을 말한다. 물론 이는 평소 부모와 좋은 경험들이 충분히 쌓여있을 때 가능하다. 부모에게서 기대만큼 다정하거나 온화한 반응을 얻지 못할 때도 있지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이는 좌절감을 견디고 신뢰하는 힘을 기른다. 안정적인 애착이란 바로 그 좌절을 디딤돌 삼아 만들어진다.

현실적으로 언제나 아이의 처지를 공감하거나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행인 것은 평소 주고받았던 호의적인 태도, 부모의 위로의 눈빛과 지지의 메시지, 힘들 때 안기던 품과 같은 것들이 아이의 마음속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엉겁결에 터져 나온 분노나 스스로 아이와의 규칙을 저버린 것, 말실수 같은 것들이 순간 관계를 상하게 만들더라도 관계 자체를 무너뜨리지 않을 수 있다.

여유가 된다면 이후에 그때의 일을 설명하고 아이의 마음을 듣는 시간을 가지면서 애정 통장의 잔고를 쌓아갈 수 있다. 오히려 아이는 친밀한 관계에서 사람이 비일관적이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럼에도 회복하는 제스처를 통해 관계가 단단히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부모가 언제 감정이 불편해지는지 알게 되면서 부모라는 타인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는지도 모른다. 부모 역시 친밀한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배려 받아야 하는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유독 어머니라는 사람은 배려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이 지워지곤 한다. 흔히들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더욱 자애롭고 이해심이 많은 태도를 기대하고, 그러한 시선은 오히려 어머니가 아이 앞에서 자기감정을 속이거나 자책에 빠지게 만든다. 그렇게 어머니는 아이와 나눌 수 있는 정서적인 에너지를 빼앗겨버린다.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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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위니컷(Donald W. Winnicott)은 양육자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한 대표적인 대상관계이론가이다. 그는 아이에게 좋은 어머니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어머니가 아니라, ‘충분히 좋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충분히 괜찮은 양육자로 바꿔 써본다. 좋은 부모에 대한 기준과 정보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우리는 이상적인 부모라는 허상 옆에 자신을 나란히 세워두고 스스로를 책하는데 마음을 쏟기 쉽다. 미더운 부모처럼 느껴질 때에도 평소 아이에게 진심을 다했던 순간들도 함께 떠올려 보면 좋겠다. 아이 또한 그때의 숨결과 온도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어머니가 갑작스레 화를 냈던 장면이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지만, 그 기억이 어머니가 나를 사랑했다는 믿음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내 고통에 나보다 더 아파해하던 어머니의 모습, ‘네가 자랑스럽다며 건네던 따뜻한 미소, 아침마다 두 손 가득 안겨주던 도시락 가방, 그것이 나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라고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를 만들어주었다. 차곡차곡 쌓아온 어머니의 애정 어린 제스처와 그에 대한 믿음을 찰나의 행동이 무너뜨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친구에게 전했다. 오늘 아이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하더라도,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아이의 믿음을 저버리진 못했을 거라고, 그 믿음이 있는 한 아이는 잘 자랄 거라고 말이다.

 


참고자료

* 최영민 (2010). 쉽게 쓴 정신분석이론: 대상관계이론을 중심으로. 학지사.


 

* 글쓴이_이지안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을 공저로 출간하였고,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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