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대의 독일 본(Bonn) 시내로 향하는 지하철은 늘 한산해서 문이 열리면 얼른 빈자리에 앉을 마음으로 탔다. 그런데 오늘은 문이 열리자 8살쯤 되어보이는 꼬마들이 단체로 소풍을 가는지 한 칸을 가득 메웠다. 소리지르거나 떼를 쓴 건 아니었지만 아이들 특유의 웅성거림으로 지하철 안은 꽤 떠들썩했다. 아이들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바람에 대부분 어른들은 서서 가고 있었지만, 누구도 아이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지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웅성거림이 조금씩 커질 때면 누군가 호통이라도 치지 않을까 괜히 나까지 눈치를 봤지만, 아이들이 모두 내릴 때까지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피곤하고 영혼없는 표정으로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서도 어린이들의 재잘거림 정도는 이해해주는 어른들의 무심한 듯한 배려에 괜히 마음도 좋아졌다.
유독 이 장면이 낯설어 보였던 건 서울에서는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 단체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본 적이 드물어서다. 무릇 어린이 소풍은 버스를 대절해서 꼭 선생님과 아이들로만 채워지는 게 ‘국룰’ 아니었던가. 하지만 독일에 있다보면 선생님을 따라 무리지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7-8살 정도 되어보이는 어린이들도 있는가하면 아장아장 걷는 미취학 아동들도 더러 보인다. 한번은 지하철에서 악을 쓰는 성인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서 웬 취객인가 쳐다봤더니, 아이들을 인솔하는 선생님이었다. 선로에 위태롭게 발을 내밀거나, 지하철이 오나 고개를 내미는 아이들에게 갈라진 목소리로 “안 돼!"를 고래고래 외치는 선생님을 보며, 저렇게 어린 아이들을 수십명씩 데리고 대체 어떻게 대중교통을 타는지 의아했었다. 나도 모르게 ‘그냥 안전하게 전용 버스를 대절해서 다니지 뭐하러 고생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할까’라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이번에 한국 갔다왔는데 애들 데리고 갈 수 있는 카페가 정말 없더라.” 독일에서 2살 딸과 1살 아들을 키우는 지인이 푸념을 했다. 요즘 유행하는 디저트와 음료들을 맛보며 모처럼 한국을 누리고 싶었지만 지도 어플로 검색하면 대부분의 카페가 ‘노키즈존'이라고 못 박아 놨기에 엄두를 못 냈다고 한다. 애들을 어 린이집에 맡겨야 겨우 예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할 수 있고, 유모차를 끌고 들어가지 못하는 곳도 많아서 산책이나 몇 번 했다는 말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결혼 2년차인 우리 부부도 아이를 고민하고 있기에 남 이야기 같지 않았다.
종종 이 가족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잠깐이나마 부모의 고충을 느낄 수 있다. 잘 먹다가도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며 우는 아이 때문에 당황해서 급히 달래다보면 그새 첫째 아이는 어디론가 달려간다. 첫째를 잡아오는 사이 둘째는 식탁을 내리쳐서 포크를 떨어트리고 종업원이 달려와 얼른 새 포크를 가져다준다. 이쯤되면 동행한 우리 부부도 어쩔 줄 몰라서 주변 테이블 눈치를 보게 되고 아이를 달래려 안간힘을 쓰지만 아직 말도 못하는 이 아이들이 우리 마음을 알아줄 리가 없다. 아이 엄마는 연신 미안해하지만 종업원은 익숙하다는 듯 웃고, 주변을 둘러봐도 우리 테이블을 신경쓰는 손님들은 없고 각자 대화에 열중한다. 종종 아이가 귀여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소란스러움에 불쾌함을 표현하는 경우는 없었다.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의 미국 발령으로 첫 육아를 미국에서 시작한 다른 친구는 돌잔치를 위해 출산 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후로 육아는 미국에서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식당에서 아이가 울자 곧바로 “아이가 왜 우냐"는 따가운 한 마디가 날아왔고 식당 전체의 냉랭한 시선이 아이에게 꽂히면서 결국 가족 식사 자리에서 친구만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인터넷에서 “식당에서 왜 아이 이유식을 먹이느냐"는 비난어린 글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는 친구에게 미국은 다른지 물었다.
유모차만 끌고 나가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베이비 퍼스트'를 외치며 도와줘서 늘 고마움을 느낀다고 한다. 만 한 살이 안 된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울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하면 “아이는 원래 우는 거잖아요"라는 말도 감동적이라 잊을 수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아이를 안고 식당에 가면 당연하게 아기용 의자를 가져다주고, 이유식에 대한 제지도 한 번도 없었다. 아이가 운다는 이유로 따가운 눈초리에 식사를 중단한 경험도 한국에서 처음 겪는 일이란다. 물론 내 주변의 일부 사례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개인적인 경험들이 쌓여 한 사회의 분위기를 조성하게 되고, 아이를 불편해하는 감정이 사회 전반의 일반적인 감정으로 표현되기 시작할 때 ‘노키즈존'도 더욱 힘을 얻고 확산될 것이다.
아이를 키우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에는 수많은 예산과 정책도 필요하겠지만 아이를 수용하는 주변 사람들의 자세도 중요하다. 결국 아이 엄마가 직접 만나는 세상은 카페와 식당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출산율이 낮다며 온갖 언론이 떠들고 전문가들이 토론을 하는 와중에도 눈치를 줘서 아이와 엄마를 식당에서 기어코 나가게 만든다거나, 다른 손님에게 방해가 되니 모든 아이들의 출입을 원천 차단하는 노키즈존이 이렇게 많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아이는 원래 울고, 시끄럽고, 어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아이를 낳든, 낳지 않든 이 사회에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기여를 한다면 그것은 주변에서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무뎌지고, 커피 한 잔 하러 들른 카페 테이블을 커다란 유모차가 가로막더라도 불편한 내색 없이 돌아가는 것이리라 생각을 해본다.
아이와 아이 엄마가 살기 좋은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키즈 카페가 많고 유아용품이 풍족한 사회일까? 어린이들은 어린이 버스에만 타고 엄마들만 입장 가능한 “맘 전용 식당"이 생기면 아이를 낳고 싶어질까. 간혹 출산과 육아를 장려한답시고 어린이 전용 각종 시설과 서비스가 언급되곤 하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어색하고 기괴하게 보였다. 특별히 아이라고 더 대우해줄 필요 없이 그냥 남들 가는 곳 다 갈 수 있게 해주면 된다. 결국 노키즈존이라는 것도 다른 손님들이 끊임없이 식당 사장에게 컴플레인을 거니, 영업을 위해 사장이 나서서 엄마와 아이를 거부하는 것 아닌가.
내가 사는 독일의 본 지역은 오후 시간대가 되면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젊은 엄마 아빠를 자주 볼 수 있다. 햇살 좋은 날 야외 카페에는 테이블 옆 아이 유모차가 있고, 아기용 의자에 작은 아기들이 앉아있다. 엄마는 함께 온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다. 그 옆 다른 테이블에는 주인이 일행과 커피를 즐기는 동안 함께 온 대형견이 조용히 테이블 아래에 앉아있다. 아이 엄마의 반대쪽 옆 테이블에는 담배를 연신 피우는 흡연자가 커피를 마시고 있다. 아이 엄마는 대형견 주인에게 “왜 개를 데리고 카페에 오느냐"고 따지지 않고, 흡연자에게 “아이가 있는데 담배를 왜 피냐"고 따지지 않는다. 아이에게 위험해 보이는 이 상황을 보며 괜히 조마조마한 건 나 뿐인 것 같다. 독일에서는 흔히 보이는 풍경이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데려오고, 견주는 대형견을 데려오고, 흡연자는 자유롭게 흡연하되 서로의 룰을 지킨다. 엄마는 아이를 방관하지 않고, 견주는 반려견을 엄격하게 훈련시키고, 흡연자는 절대 실내에서는 담배를 피지 않는다. 큰 룰만 지킨다면 이들의 존재 자체를 아무도 비난할 수 없다. 아이라는 이유로 꼭 완전히 무해한 곳에서만 키우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독일은 사람들이 선하고, 한국은 고약한 사람들이 많아서는 아닐 것이다. 한 사회가 작동하기 위한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합의를 떠올리면 오히려 다른 생각이 든다. 적어도 독일 사회에서는 “불편함의 제거"가 그 자체로 규범이 되진 않는 것 같다. 공공 예절은 지켜야 하지만 어린 아이가 성인과 똑같이 규칙을 지키는 것은 합리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불편함을 감수한다. 상습적인 파업으로 불편함에 투덜거려도 파업 자체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그들의 상황과 당위에 공감한다면 기꺼이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막론하고 오직 나에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존재 자체를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사회는 늘 날이 서있을 수밖에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에게 바랄 수 있는 합리적인 기대와 나의 불편함은 과연 정당한가를 돌아보는 한 번의 노력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 메이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프리랜서로 일하며, 독일어를 배우면서, 일상의 풍경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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