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 규현이는 스노모빌을 타기 위해 스키장 안전요원이 되고 싶다고 했다. 『너는 어떻게 학교에 가?』라는 책에서, 미국과 캐나다 국경 지대에 사는 캐나다 아이가 스노모빌을 타고 미국에 있는 학교로 등교하는 장면이 있었다. 처음에 규현이가 스노모빌을 타보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 책에 나온 캐나다의 이 지역에 가면 탈 수 있지 않을까?
- 캐나다를 자주 갈 순 없잖아요.
- 그렇긴 하지.
- 근데 스키장 가면 안전요원이 이거 타고 돌아다녀요.
- 아~ 이게 그거구나.
- 네. 전 이거 꼭! 타보고 싶어요.
- 규현이 스키장 가봤어?
- 네, 엄청 많이요.
- 스키장에서 안전요원한테 한번 타보면 안 되냐고 부탁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 안 될 걸요. 그리고 전...혼자 타고 싶어요.
- 아~ 그래~?
- 전 나중에 크면... 여름엔 잘 모르겠지만 겨울에는 꼭! 스키장 안전요원 할 거예요.
규현이의 쌍커풀 진 큰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아마도 혼자 타고 싶다는 말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규현이가 진짜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규현이의 꿈은 스키장 안전요원이 돼서 스노모빌을 실컷 타는 거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직 스노모빌을 타기 위해서, 규현이는 스키장 안전요원이 되고 싶었다.
장래희망을 묻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는 규현이의 대답이 매우 인상 깊었다. 보통 다른 아이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의사요, 건축가요, 축구선수요, 돈 많이 버는 부자요"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왜 되고 싶냐고 물으면 엄마아빠가 권해서라거나 남들이 좋다고 하는 직업인 이유가 섞여 있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건축가가 되고 싶다길래 이유를 물어보니 미술 분야 중에서는 건축가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들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규현이는 자기 욕망이 뚜렷했다.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고 남들이 좋다고 하건 말건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사실 규현이는 뺀질이다. 책을 안 읽어올 때도 있고 글쓰기를 시키면 "아 쓰기 싫은데~ 얼마나 써야 돼요?" 하고 두덜댄다. 그런데 막상 한 문장을 쓰면 내가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가이드하지 않아도 자기 생각을 다음 문장으로 쭉쭉 밀고 나간다.
책도 대충 읽는 것 같은데 의외로 질문을 던져보면 생각보다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세부 내용도 잘 기억한다. 그리고 어떤 날은 깊은 생각이 담긴 대답을 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때도 있다.
그런 한편 제멋대로이기도 하다. 한 번은 형하고 싸워서 기분이 안 좋다며 지금 수업 못하겠다고 방에서 안 나온 적도 있었다.
나는 규현이가 크면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이 될까 생각했다. 훌륭한 게 아니라 매력적인 거 말이다. 성실하진 않지만 머리가 좋고 주관이 뚜렷한 만큼 제멋대로인 면도 있다. 그런데 경험상 이런 아이는 남자아이들이나 여자아이들이 모두 다 좋아한다.
규현이는 남자아이지만 단발머리에 눈이 크고 곱상하게 생겼다. 이렇게 생기고 그런 성격을 가진 아이가 어느 날 제멋대로 굴면 사람들은 '아 지금 저 아이가 기분이 안 좋은가 보다'하고 너그러이 이해한다. 정우성이 난민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더 주목하고, 잘생긴데다 마음까지 착하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오늘 규현이를 보고 나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곁다리에 눈길을 주지 않는구나, 핵심으로 직진하는구나. 수업이 끝난 뒤 규현이 엄마에게 규현이가 가진 '힘'에 대해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규현이가 스노모빌이 타고 싶어서 스키장 안전요원이 되고 싶어한다는 말을 하자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그런 건지 지금 바쁜 건지 아니면 스키장 안전요원이 되고 싶다는 게 마음에 안 드는지 반응이 좀 시큰둥했다. 그래서 말을 멈추고 나오긴 했는데 그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단발머리인 규현이는 언제부터 단발이었을까? 생각해보니 보통 다른 아이 같으면 엄마한테 "난 왜 남잔데 머리가 길어?"라며 뭔가 '같지 않음'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법도 한데 단발머리를 계속 고수 중이다. 규현이 엄마의 카톡 프로필 사진에 규현이의 어릴 때 모습이 있었다. 짧은 머리였다.
규현이는 단발이 더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규현이의 개성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또 무엇보다 규현이 자신이 단발머리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글쓴이 – 진솔
어린이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독서교실 선생님입니다. 초등 아이 키우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오늘도 새록새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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