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에 바나나

춤추듯 출산할 수 있다면_탱고에 바나나_보배

자연주의 출산을 결심했다.

2023.10.25 | 조회 1.17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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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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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옮기려고 하는데요.”

산전 검사부터 우리 부부를 맡아주신 산부인과 과장님은 눈이 동그래졌다. 늘 잘하고 있다며 칭찬 일색에 반가움이 얼굴에 가득했던 젊은 의사 선생님이었다. 그는 내가 자연주의 출산(이하 자출)을 하겠다고 병원을 옮기겠다고 하자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아니, . 나도 무통주사 안 놔줄 수 있는데. 아니, 산모가 그런 쪽에 관심이 많으면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아니, 안 아프고도 아기 낳을 수 있는데 대체 왜아냐 아냐. 산모 당사자가 제일 열심히 고민했겠죠. 그래요. 아니 정말 근데 왜?“

나중에 나처럼 같은 병원에 다니다 자연주의 출산을 하겠다고 병원을 옮겼다는 요가원 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분의 담당 의사 선생님은 본인 동생이 자출을 하겠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렸을 거라고 했단다. 흔히 자연주의 출산이라고 하면, 무통주사를 맞지 않고, 출산 3대 굴욕이라는 회음부 절개, 관장, 제모 등을 하지 않는 걸로 알려져 있다. 가끔 맘카페를 둘러보다 보면 자연주의 출산을 하는 사람들을 아주 유난스러운 사람들로 보는 시선을 느낄 때가 있다.

자연 분만을 하면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장내 유익균으로 가득하다는 세균 샤워라는 걸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무통 주사조차 쓰지 않는다니. 아이를 만나기 위해 엄마가 큰 고통을 감내하고야 마는 아주 대단한 모성애라며 유난스럽다는 시선을 보내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자연주의 출산도 무통 주사나 회음부 절개, 관장 등을 무조건 안 하는 건 아니다. 필요하다면 무통 주사를 맞기도 하고, 유도 분만을 하기도 한다. 다만, 의료진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가장 자연스럽게 출산할 수 있다면, 그렇게 진행할 뿐이다.

나의 경우, 처음 자연주의 출산을 결정한 게 아이 때문은 아니었다. 평소에 워낙 걱정도 겁도 많은 데에다 기억력도 좋은 탓에 아직도 10년 전에 있었던 새언니의 출산이 생생하다. 일하고 있던 친오빠는 병원에 바로 올 수 없었고, 근방에 있던 내가 진통 중인 새언니와 동행했다. 새언니는 출산 병원에 도착해서는 갑자기 대학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아이는 곧 무사히 태어나 병실로 옮겨졌지만 수술실 문 앞까지 튄 새언니의 핏자국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고생해놓고 새언니는 본인이 아니라, 우리 오빠에게 출산 트라우마가 생길까 걱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임신부터 출산, 거기에 남편의 트라우마 걱정까지 그 지난한 과정은 오롯이 여자의 몫인 걸까. 남편도 분담이 가능하다면, 아내의 몸도 마음도 훨씬 가벼워질 텐데. 사실 임신하고 가장 많이 느끼는 건, 심리적으로 불편할 때면 여지없이 신체적으로도 반응한다는 점이다. 남편이 곁에서 잘 보살펴만 주어도 널뛰기를 하는 호르몬 변화도, 늘상 토할 것 같은 입덧도, 밤이면 당기는 배뭉침도 다 견딜 만하다. 출산도 좋아하는 탱고처럼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편들도 자기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낼 수 있는데, 세상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우연히 알게 된 자연주의 출산은 내가 바라오던, 남편과 아내가 함께 만들어가는 출산의 모습이었다. 남편과 내가 한 쌍이 되어 춤을 추듯 말이다. 아기를 품는 것도, 낳는 것도 엄마의 몸이지만 임신기를 잘 버틸 수 있게 하는 데에는 남편의 역할이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 남편의 섬세함과 성실함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아기를 위해, 가족을 위해 건강식을 챙겨 먹거나 함께 아침 운동을 가는 일, 혹은 역아를 돌리기 위한 체조까지도 말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아기가 거꾸로 자리 잡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고, 다음번 진료까지는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함께 자기 전에 간단한 몇몇 동작을 하라고 안내 받았었다. 내가 침대에 옆면으로 누워 다리를 바닥 쪽으로 이완하고 있으면, 남편이 내 골반을 양손으로 밀어 몸의 균형을 잡아주면서 아래쪽으로 충분히 이완할 수 있게 해주는 사이드라잉동작이나 역자세 같은 것들을 30주차부터 주 2~3, 많게는 주 5회씩 했다. 사이드라잉 같은 경우에는 한 번 하면 15~20분 정도 남편의 힘이 필요하다.

사이드 라잉 동작. 출처 www.spinningbabies.com 
사이드 라잉 동작. 출처 www.spinningbabies.com 

출산 당일에는 가정집과 비슷한 분위기의 방에서 남편과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도 하고(조산사 선생님은 영화를 받아오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탱고 영상을 볼 생각이다), 기운이 빠질 땐 음식을 먹기도 하면서 진통 시간을 보낸다. 필요하다면 물속에서 진통을 줄일 수 있게 수중 감통도 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출산을 기다린다. 차가운 수술실에 혼자 묶여 있거나 낯선 간호사가 내 배를 눌러 아기가 회음부를 터뜨리고 나오지 않아도 된다. 그저 호흡을 하면서, 출산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사랑 호르몬, 옥시토신 분비가 충분히 이루어지도록 남편의 손길을 느끼며 기다린다. 물론 아기가 나오기 전까지의 진통이 죽음 코 앞의 진통이라는 점은 모든 형태의 출산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진실일 테지만 말이다.

출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 선택이었다. 남편과 많은 과정을 함께 할 수 있다면, 불안하고 초조한 임신 기간이 조금이나마 괜찮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사실 이 선택에 특별한 용기 같은 게 필요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7년 전부터 탱고 파트너십을 시작하고, 서로를 알아가고, 그에 맞춰 조정해 나갔던 과정들처럼 출산을 준비하는 과정도 비슷하겠거니 했다. 운동이나 식단은 꼭 출산이 아니더라도 탱고라는 취미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몸에 밴 좋은 습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단하게 운동 습관이나 식성을 바꾼다기보다는 원래의 일상에서 ‘탱고’라는 목표 외에 ‘출산’이라는 또 다른 경유지 하나를 추가한 것 뿐이다.

한 달 남짓 남은 출산에서 남편과 춤을 추듯이 아이를 낳고 싶다. 혼자 추는 춤이 아니라 함께 걷는 춤인 탱고처럼 말이다. 너무 고통스러울 때에는 여름 휴가로 이탈리아 남부로 갔던 탱고 여행을 떠올릴 수 있게 가볍고 경쾌한 Osvaldo FresedoIsla de Capri(카프리 섬)을 듣고, 좋아하는 아르헨티나 댄서 노엘리아의 한창 시절 영상을 틀어놓고 그녀의 깃털 같은 춤에 감탄하다가 출산 중인 것도 까먹어 버리고 싶다.

짐볼로 골반 풀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남편하고 탱고를 추면서 어이가 없어 웃다 보면 어느새 아기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자연주의 출산을 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면 골반을 풀기 위해 진통 중에 춤을 추기도 하니까 우리는 우리의 탱고를 추면 되지 않을까. 남들은 탱고 추다가 감정에 북받쳐 울기도 한다던데, 나도 드디어 탱고 추면서 울어볼 기회가 생긴 걸까. 살며시 흐르는 반짝이는 우아한 눈물이라기보다는 왠지 포효하는 야생동물의 눈물일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보기만 해도 경쾌한 노엘리아의 공연 <Isla de Capri>
여름의 카프리 섬, 출처 @Abrazo TV
여름의 카프리 섬, 출처 @Abrazo TV

 

* 글쓴이 - 보배

탱고 베이비에서 탱린이로 변신 중. 10년 정도 추면 튜토리얼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열심히 고군분투하...다가 출산 준비 중. 공저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청년>에 참여했습니다.

 

* 작가의 브런치 https://brunch.co.kr/@s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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