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이런 제주는 처음이에요.”
제주 한달 살이를 하는 중 동생이 지인과 함께 주말을 보내러 왔었다. 토요일 하루는 자기들끼리 여행을 하고, 일요일은 나도 합류했다. 아침 일찍 나서서 어두워질 때까지 셋이 함께 하루종일 구경을 다녔다. 검붉게 물드는 한라산을 등에 업고 숙소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 지인이 나른한 듯 기분좋은 목소리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툭 내뱉은 말이었다. 제주를 자주 왔고, 몇 달 전에도 왔지만 이런 풍경, 이런 모습의 제주는 처음이라 했다. 안내 해준 나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고 제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하나 늘어서 기뻤다. 겨우 몇 달 전에야 제주에 처음 와본 사람이 제주 홍보대사라도 된 양 제주의 아름다움을 알리는데 열심인 것도 참 재밌는 일인데, 제주에 겨우 서너 번 와본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많이 제주 방문한 사람을 가이드 하고 칭찬을 받은 것도 재밌는 일이었다. 제주 초심자가 찾아낸 아름다운 제주와 제주 오름을 몇 군데 추천한다.
백약이 오름
제주도 동북쪽에 다수의 오름이 몰려있고, 이를 동부 오름 군락지 혹은 동부 오름군이라 부른다. 이렇게 오름이 여럿 몰려서 생성된 것 또한 제주 오름의 특징 중 하나다. 용눈이 오름, 다랑쉬 오름, 아부 오름, 따라비 오름 등 유명한 오름들이 동부 오름군에 속한다. 용눈이 오름, 아부 오름과 멀지 않은 곳에 백약이 오름이 있다.
백약이 오름은 주차장이 넓고 산책로가 잘 정돈되어 있다. 또 많이 높지 않아 쉽게 오를 수 있는 반면 정상에 오르면 제주 동쪽 해안 절반이 탁 트이게 보이는 전망이 참 아름답다. 북쪽의 세화해변부터 동쪽의 성산 일출봉, 남쪽의 표선 해안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해안선 안 쪽으로는 동부 오름군이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해안 반대편으로는 한라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또 용암이 분출된 후 화구 한쪽이 무너져내린 말발굽형 화구 주변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특유의 지형을 구경하기에도 좋고, 무엇보다 오름 자체가 무척 예쁘고 싱그럽다.
이렇게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오름이지만, 동부 오름군 소속이라 주변에 유명한 네임드 오름이 너무 많고, 백약이 오름 근처에는 유명 관광지가 없다보니, 보통 관광 코스에는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관광객이 많지 않고 비교적 조용하게 자연을 즐길 수 있다. 중부 산간 도로를 거쳐서 방문하게 되는데, 백약이 오름을 가는 길에 계절에 따라 말과 소가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 혹은 황금색 억새가 들판을 가득 채우고 바람에 따라 이리 눕고 저리 눕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게 되고, 이 또한 백약이 오름을 굳이 찾는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제주의 숨겨진 풍경이다.
둔지 오름과 냥끼 오름
둔지 오름과 냥끼 오름은 직접 오르기 보다는 주변 풍경이 아름다우니 산책이나 드라이브를 추천한다. 제주 특성 상 어느 계절에 가도 나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만, 둔지 오름은 9월에 방문하면 ‘모멀꽃(메밀꽃의 제주어)’이 가득한 들판을 볼 수 있다. 나는 메밀꽃이 핀 들판을 제주에서 처음 봤는데,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들판 전체가 초록으로 그리고 그 위에 하얀 꽃들이 가득 뒤덮인 체 바람에 흔들리는 광경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너무 놀라 차를 급히 세우고 한참을 구경했었다. 이런 모습이라서 메밀꽃밭이 그렇게 많은 예술 작품에서 이야기가 되는구나 납득이 갔다.
냥끼오름은 위에서 말한 백약이오름과 냥끼오름을 잇는 도로를 드라이브 해보기를 추천한다. 나는 늦가을 어느 맑은 날 오후에 갔었는데, 가을 답게 볕이 섬세해서 얇은 황금색 거미줄이 드리운 것 같았고 길 양쪽으로 그 가을볕을 받은 억새밭이 찬란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같이 갔던 남편에게 “천국이 있다면 이런 풍경일 것 같아”라고 했더니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웃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길을 지나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평안해지는 길이다.
물영아리 오름
여행을 갔는데 비가 오면 참 난감하다. 특히 제주처럼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 여행이나 휴가를 가면 외부 활동을 많이 계획하기 때문에 날씨에 민감하게 된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비가 와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랑비가 살짝 내리든 조금 굵은 빗줄기가 내리든 우산이나 비옷을 챙겨들고 가볼만 한 곳이 많다.
비 내리는 날에 갈만한 많은 장소 중 특히 물영아리 오름은 꼭 비오는 날에 가야 한다. 영아리는 신령스러운 곳이란 뜻인데, 물영아리는 굼부리에 물이 고여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처럼 흐리거나 비가 내리는 날 가면 오름과 오름을 둘러싼 초원에 안개가 가득하고, 오름 산책로 주변에 가득한 삼나무가 비에 젖어 바람에 흔들리며 비익비익 하는 소리와 빗방울, 그리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물들이 뒤섞여 신화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뿌옇게 안개가 내린 화구호에 물영아리 전설에 등장하는 신령님이 나타나도 하나도 놀랍지 않을 것 같고, 숲 냄새가 가득한 비에 젖은 산책로 주변으로 물의 요정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물영아리 오름의 정상에 있는 분화구는 물이 마르지 않는 산정화구호로, 퇴적된 습지 퇴적층에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하고 특히 멸종 위기종들이 서식한다. 보존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으로 인정되어 2006년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었다.
‘오늘도 오른다’
백 개의 제주 오름을 오르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고, 현재 스코어는 30/100 입니다. 제주 오름을 왜 오르게 되었는지, 제주 오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름을 오르면서 어떤 순간들을 만났고 어떤 생각과 감상이 있었는지 글을 통해 공유하겠습니다.
서하도
처음 방문한 제주도 동쪽 끝에서 ‘하도리’라는 자신의 필명과 동일한 동네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 곳에 정착할 꿈을 꾸게 된 초보 작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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