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
한동안 저는 게임을 해본 적이 없거나 게임을 하지 않는다는 사람을 만나면, "저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해 보면 제 말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죠. 국민적으로 유행했던 애니팡이나 드래곤 플라이트류의 소셜 모바일 게임을 해봤던, 어릴 때 문방구 앞에서 친구와 오락기를 해봤던, 학교 컴퓨터실에서 플래시 게임을 해봤던, 알고 보면 대부분은 게임을 해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게임을 비디오게임으로 한정짓지 않으면 그 범위는 더욱 넓어집니다. 윷놀이, 고스톱, 바둑, 장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어쩌면 지구상에 게임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왜 적지 않은 사람이 제게 게임을 해 본 적이 있으면서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걸까요? 아마도 그들은 게임에 대해, 혹은 '게임을 한다'는 행위에 대해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컴퓨터나 TV 스크린을 바라보며 정기적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깊이 몰입하는 게임만을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뉴스나 미디어에서 사용되는 게임과 게이머라는 단어 또한 어떤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사용된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디어의 용어 사용은 우리가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데 다시 영향을 줍니다.
게임의 중독성과 해악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평행선을 달린 지 십수 년이 되었습니다. '게임 중독'의 실재 여부를 가지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을 보면, 게임을 비판하는 진영에서는 오랜 시간을 반복해서 투자해야 하는 게임을 예시로 들고, 반대편에서는 스토리와 예술성을 강조한 게임을 예시로 들며 게임을 옹호하기도 합니다. '게임 중독'이라는 같은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두 진영은 서로 전혀 다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같은 단어를 두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논의에 진척이 없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게임을 정의할 수 없음: 비트겐슈타인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엄밀히 점검하여 세상을 설명하고자 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을 '언어 게임'에 빗댄 그의 후기 철학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말이 조금 어렵습니다만, 다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모든 게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게임의 특성을 찾을 수 없다는, 즉 '게임'이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특정 활동을 '게임'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그 분류는 항상 어떠한 목적을 반영하며,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이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재미를 주는 활동은 모두 게임 아닌가요?" 하지만, '재미'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날의 많은 게임 기획자들은 게임 기획에 재미fun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재미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 모호하기 때문이죠. 재미는 우리가 느끼는 여러 감정들 중 긍정적인 것들을 뭉뚱그려서 부르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압도적 실력으로 다른 사람을 이길 때 재미를 느끼고, 어떤 사람은 혼자 자신만의 세상을 건설하는 데에서 재미를 느끼고, 어떤 사람은 훌륭한 스토리를 경험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처럼요.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는 게임이 좋은 게임이다'라는 말은 꽤나 무의미한 말일 수 있습니다. 언어를 엄밀히 점검하여 무의미한 말과 무가치한 말을 구분하고자 했던 비트겐슈타인은 이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게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게임을 비판할 수도 없다는 말이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게임에 대한 비판과 우려에 정당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도한 폭력성과 중독성, 사행성은 플레이어에게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게임에 대한 비판에 대항하여 예술적 게임, 혹은 소위 '좋은 게임'을 예로 들며 모든 게임을 옹호하려는 시도는 제게는 다소 유치한 억지로 보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게임'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한 유의미한 논의가 힘들다는 겁니다. 만일 게임의 해악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게임에서 해로울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알고 용어를 좁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중독성이 강한 게임은 대부분 강한 경쟁 요소나 수집/도박적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게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경쟁 게임', 혹은 '수집 게임' 등 수식어를 붙여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게임은 중독적이다"라고만 한다면, 우리는 서로 대화하는 데 큰 장애를 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전혀 중독적이지 않은 다른 형태의 게임을 생각하고 있다면, 서로 완전히 다른 활동을 '게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복싱을 이야기하는데 다른 사람은 꽃꽂이를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게임이 해로운 것이 아니라, 해로운 요소를 가진 게임이 해롭다는 것입니다. 게임을 해롭게 하는 요소를 파악하고 경계함으로써, 여러 다른 형태의 게임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이름을 붙이고,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게임 중독에 빠진 자녀의 부모에게 흔히 하는 조언인 '자녀가 하는 게임을 같이 해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게임이 본격적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기 시작한 때가 온라인 게임의 시대로 접어들면서라고 생각합니다. 게이머들이 실제 세상처럼 소통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온라인 게임은, 실제 세상에 있는 문제를 구조적으로 가지고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온라인 게임이 주는 즐거움과 깊이는 부정할 수 없지만, 초등학생이 입시 경쟁에 뛰어들거나 어른들과 교제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처럼, 온라인 게임이 흔히 제공하는 타인과의 경쟁과 관계성도 같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임이 제공하는 경쟁의 정도와 플레이어 간의 상호작용 정도가 가져올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게임이 결제 시스템과 밀접하게 연동되면서 생긴 게임 내 소액 결제도 많은 문제를 불러들였습니다. 우리가 놀이동산에 갈 때 입장료만 내는 것이 아니라 츄러스와 솜사탕, 그리고 후룸라이드를 타고 나서 구매하는 사진 값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처럼, 이제 게임도 세상을 닮아 게임 내 상점을 통해 소비자의 지갑을 더 적극적으로 유혹하게 되었습니다. 플랫폼이 제공하는 편의성과 접근성 덕에 어린 아이들도 무방비로 노출되었고요. 우리는 게임 내 상점의 형태에 따른 효과와 허용 범위에 대해서도 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게임을 모른다
미디어 이론의 아버지 마셜 매클루언은, 새로운 기술을 접할 때 우리는 나르키소스적 자아도취 마비 상태(Narcissus narcosis)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심취한 나머지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망각한 나르키소스처럼, 새로운 기술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능성에 심취하여 우리는 그 기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무감각한 마비 상태에 빠진다는 것이죠.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전으로 등장한 컴퓨터 게임 역시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인류가 수레바퀴에 대해 이해하고 수레바퀴를 발명한 것이 아니듯, 우리는 게임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게임을 만들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가상세계를 만드는 것이 너무나 멋지고 흥분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제 게임이라는 의미 없는 분류에 현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타인과의 상호작용, 경쟁, 수집, 도박적 보상, 손쉬운 결제 등의 요소가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불러오는지 똑바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기만 하면 어떤 활동도 게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이 가진 특수한 능력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모든 게임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게임에 대해 알게 될수록, 우리는 그 게임이 반영하는 세상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게임에 대해 알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발전시키고 즐겨온 게임은 모두 세상의 어떤 변형이고, 그 게임이 세상을 또다시 변화시키기 때문이죠. 어떤 요소가 게임을 이롭게 만들거나 해롭게 만들 수 있는지, 게임을 발전시킨 세대인 우리는 후세에 알려줘야만 합니다.
우리는 여러 게임을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경험으로 만드는 요소들을 파악하고, 그 요소들에 이름을 붙여서, 종국에는 '게임'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버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롤플레잉 게임이나 1인칭 슈팅 게임 같은 기존의 표면적 장르 분류를 벗어나, <리그 오브 레전드>같은 게임은 e스포츠로, <리니지>같은 게임은 수집성 사회적 게임으로, <라스트 오브 어스>같은 게임은 경험적 스토리 게임으로 부르는 등, 각 경험의 본질을 꿰뚫는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될 지 모릅니다. 그리고 각 게임이 그러한 특징적 요소를 얼마나 이용하는지 그 정도를 파악하고, 측정해서 분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게임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도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 글쓴이 - 지민웅
미국 게임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미국에 온 뒤, 게임을 만들며 게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게임 개발자입니다.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서 취미로 음악과 서핑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발매된 <레고 2K 드라이브>에 게임플레이 프로그래머로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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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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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시
안녕하세요. 지민웅 작가님.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러 형태의 비디오 게임을 매우 즐기고 좋아해온 사람으로서 매우 흥미로웠고 감사하기까지도 합니다. 종종 자라나는 사촌동생, 조카들의 게임 문제에서 나름 게이머의 입장에서 대변하는 경우가 있었는데요. 그때마다 "게임 안에도 아이에게 창의력을 불어 넣어줄 문화적 콘텐츠가 있다. 또 그런 게임을 해야한다"는 식의 다소 방어적인 변호만 가능했거든요. 그러나, 신형철 평론가의 말마따나 "영원히 알 수 없으면 영원히 공부해야 한다" 고 아직 게임이라는 것은 제대로 정의조차 되지 않았음이 또, 세분화가 더 필요하다는 점에서 제게 새로운 관점을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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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주의깊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소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읽어주시는 독자가 계실까 걱정도 되었는데 도움이 되었다니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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