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첫 뉴스레터에서 말했듯, 여러분은 어떤 식으로든 게임을 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대부분은 친구들이 하는 게임을 따라 한 경우일 것이고, 더 깊은 관심을 가진 분은 직접 정보를 찾아서 게임을 하셨겠죠. 문방구 앞의 오락기에 있던 게임, 지인이 카카오톡으로 초대를 보낸 게임, 학교 친구들이 하던 게임 등... 어떤 식으로 게임을 시작해서 하게 되었던, 여러분이 지금까지 플레이한 게임을 돌아보면 하나의 궤적이 그려질 겁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서든 어택>류의 일인칭 슈팅 게임을 좋아했습니다. 옆집 형네 컴퓨터에 깔려있던 이드id 소프트웨어의 <울펜슈타인 3D>를 시작으로 <둠>, <레인보우 식스>, <하프 라이프>, <카운터 스트라이크>, <메달 오브 아너> 등... 2016년 발매된 <오버워치>부터는 유학 생활을 하느라 바빠서 많이 플레이하지 못했지만, 그전까지 출시된 굵직한 슈팅 장르의 게임은 모두 플레이해 본 것 같네요.
그리고 내러티브 중심의 게임도 좋아했습니다. 초기 게임에서 내러티브는 말풍선으로 스토리를 전달하는 텍스트 기반 게임에서 강조되었지만, 이제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게임에 녹아들고 있습니다. 게임에서 스토리는 중요하지 않다던 <둠>의 개발 철학을 비웃듯 등장한 <하프 라이프>가 영화적 연출과 스토리 전개로 게임계에 크나큰 충격을 준 이후, 스토리의 중요성은 날로 커져서 <바이오쇼크>, <라스트 오브 어스>, <에디스 핀치의 유산> 등 플레이어가 주인공 시점에서 캐릭터를 조종하는 3D 게임에서도 게임 내러티브의 혁신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면에,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 아이템을 수집하고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방식의 역할 수행 게임(롤플레잉 게임)에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더라도 기본 스토리만 플레이하고 부가적인 요소를 발견하기 위해 하는, 흔히 말하는 다회차 플레이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죠. 그리고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플레이되는 게임 중 하나인 <리그 오브 레전드>류의 팀 스포츠 게임에도 흥미를 붙이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대학교 때는 친구 대부분이 피시방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하기 위해 밤을 새울 때 저는 구경만 할 뿐이었죠.
어릴 때는 저의 특정 게임 선호가 왜 나타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나는 슈팅 게임을 좋아하나 보다'는 수준의 설명밖에 할 수 없었죠. 시간이 흘러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지금, 지난날을 돌아보며 제가 해온 게임이 저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있음을 느낍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제가 어떤 게임을 좋아하고 어떤 게임은 왜 큰 흥미를 가지지 못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시간마저 잊는 '플로우' 상태 - 일인칭 슈팅 게임
인간의 잠재력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긍정심리학파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1970년 플로우flow 상태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요, 플로우 상태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잊을 정도로 자신의 정신력을 어떤 경험에 100% 쏟아붓는 상태를 말합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몰입 경험이 중독의 위험이 있지만 적절히 경험되었을 때는 존재의 질을 향상시켜준다고 주장합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 탐구한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은 플로우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소울>에서 무언가에 100% 몰입하여 시간도 잊고 자신도 잊는 플로우 상태는 현세의 사람들이 영혼의 세계와 접촉하는 '사적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입니다. 주인공은 재즈 연주를 통해, 어떤 사람은 명상을 통해, 어떤 사람은 헤지펀드 투자일을 통해 이 공간에 들어오죠 (헤지펀드 매니저는 과다한 몰입으로 일시적으로 괴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FPS(First-Person Shooter)라고 불리는 일인칭 슈팅 게임은 플로우 상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합니다. 일인칭 슈팅 게임은 일인칭이라는 말 그대로 내가 게임 속 캐릭터가 된 것처럼 캐릭터의 시점에서 세상을 묘사하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몰입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화면의 모든 부분을 주시하고 소리에도 주의를 기울여 적이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빠르게 파악하고 반응해야 하기 때문에, 어릴 적 주의가 산만했던 제게 일인칭 슈팅 게임은 시간과 장소를 잊고 순간에 100% 몰입하는 경험을 주었습니다. 주의가 산만한 사람의 특징은 외부 자극에 쉽게 반응한다는 것인데,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에 대해 경계하고 있어야 하는 일인칭 슈팅 게임은 어찌 보면 제게 최적화된 것이었죠. 어릴 때는 이것이 그저 '재미'라고만 느껴졌지만, 생각해 보면 주의산만함이라는 특성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일인칭 슈팅 게임이 제게 좋은 경험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존재냐 소유냐 - 내러티브 중심 게임 vs 성장과 수집 중심 게임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스토리야말로 사람을 몰입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술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야기 속 캐릭터의 희로애락에 우리 자신을 투영합니다. 때문에 수많은 위대한 이야기들이 지금도 시대를 초월해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단순히 재미있기 때문에 찾게 되지만, 어떤 이야기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주제들을 다루면서 경험자의 세계를 확장합니다. 어릴 때부터 모든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궁극적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게임이 제공하는 여러 세계, 즉 이야기들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들을 쫓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게임이 제공하는 세계관과 스토리에 관심이 많았고, 게임이 제공하는 스토리를 끝낸 후에는 더 이상 그 게임에 흥미를 크게 느끼지 않았죠.
제가 내러티브 중심의 게임을 좋아한 반면, 수집과 성장이 주된 요소인 대부분의 역할 수행 게임(RPG: Role Playing Game)은 제게 큰 재미를 주지 못했습니다. 가상 캐릭터의 높은 레벨이나 좋은 아이템이 제게는 그리 큰 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죠.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와 존재는 양립할 수 없는 실존양식이라고 주장하는데요, 그래서 일찍이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스토리에 집중했던 제게는 역할 수행 게임에서 제공하는 가상의 소유가 큰 감흥을 줄 수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메신저 버디버디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아바타를 꾸미는 일에도 크게 열중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창작 등 현실의 능력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더 나은 방식의 자기표현이라고 여겼죠. 어려서부터 상당히 고지식한 면이 있었네요.
아무튼, 내러티브 중심 게임을 좋아하고 상대적으로 성장과 수집이 중심인 게임에는 큰 흥미가 없는 저의 경우와,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말한 소유와 존재의 양립 불가능함을 생각해 볼 때, 게임에서의 내러티브와 성장/수집은 핵심 요소로써 양립하기 힘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용사가 강해져서 마왕을 무찌르는 이야기처럼 성장과 수집이 내러티브의 핵심이 아닌 이상은 말이죠. 실제로 저는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이나 <폴아웃 4>처럼 성장과 수집이 핵심 요소인 게임에서는 스토리를 모두 끝마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병리적 요구 회피? - 1인 게임 vs 팀 스포츠
얼마 전 '돌아온 황제' 프로게이머 페이커의 활약으로 한국팀이 세계 리그에서 우승하여 큰 화제가 된 <리그 오브 레전드>는, 5명이 한 팀을 이루어 상대 팀과 겨루는 팀 스포츠 게임입니다. 이제 <리그 오브 레전드>는 <스타크래프트>를 잇는 국민 게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대중적인 게임이 되었는데요, 저는 <리그 오브 레전드>에 재미를 붙이려고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가 진입장벽이 유독 높은 게임이긴 합니다. 초창기 17개의 '챔피언' 캐릭터에서 시작해 현재는 165개가 넘어가는 챔피언 중 하나를 선택해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데요, 이 챔피언들은 모두 다른 능력과 특성이 있기 때문에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가장 대중적인 챔피언을 선택해서 시작하면 되지만, 결국에는 같은 팀원이나 상대방의 챔피언에 대해서 잘 모르면 게임에서도 승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챔피언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죠.
돌이켜보면, 저는 게임을 위해 공부나 노력을 해야 하는 상황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때문에 <리그 오브 레전드>의 복잡한 전략과 경우의 수는 제게 다소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포지션의 플레이어들이 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는 게임에는 으레 많이 쓰이는 '메타(게임을 플레이하는 특정한 방법)'가 있는데요, 농구에 포워드나 센터가 있고, 축구에는 윙이나 미드필더가 있어서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고 그중에서도 많이 쓰이는 전략이 존재하는 것과 비슷하죠.
농구나 축구를 비롯한 이런 팀 게임의 특징은 처음 플레이하는 사람이 그 게임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메타, 혹은 방법론을 그 이유를 모두 이해하지 못한 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임이 제공하는 상황의 복잡도가 개인의 이해도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농구나 축구에서 각 포지션이 왜 존재하는지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제가 직접 파악하고 납득해야만 하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리그 오브 레전드>같은 팀 스포츠 게임은 제게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축구나 농구 등의 팀 스포츠에서도 저는 젬병이었죠.
발달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뉴슨은 그의 2003년 논문에서 '병리적 요구 회피 증후군'(Pathological Demand Avoidance Syndrom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병리적 요구 회피 증후군은 한마디로 청개구리 증후군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요, 일상생활의 사소한 요구나 기대에도 극심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지는 것'이라고 인식되어 자신의 존재를 침해하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일어나죠. 개인이 통제하기 힘든 변화가 있을 때나, 새롭거나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이는 촉발됩니다.
전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운 팀 스포츠를 유독 힘들어하고, 개인이 다른 개인들을 상대로 하는 '데스 매치'가 일반적인 <퀘이크>나 <하프 라이프>등의 '아레나 슈터'를 더 좋아했던 저를 되돌아보며, 제게도 병리적 요구 회피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완전히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지시에는 강한 거부반응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지시를 '그저 따라야 하는' 복잡한 팀 스포츠 게임은 제게 맞지 않았던 것이죠. 저는 게임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제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따라야 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병리적 요구 회피가 있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전통에 의문을 제시하고, 권위에 저항하는 성격을 갖게 되죠. 지금은 나이가 들며 세상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전통과 권위의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서 요구 회피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만, 요구 회피는 제가 독립적인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당신의 게임과 당신
<세상의 모든 문화> 뉴스레터를 유심히 보신 분은 제가 <우리는 게임을 모른다>를 연재하기 전에 <서린이의 서핑이야기>를 연재한 사실을 아실 겁니다. 서핑도 위에서 이야기한 일인칭 아레나 슈팅 게임처럼 전체적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여러 가지 신호를 빠르게 처리하여 순간에 매우 집중해야 하는 개인 스포츠임을 보면, 제가 서핑이라는 게임에 빠지게 된 이유도 설명이 되는 것 같네요.
이렇듯 한 사람이 좋아하고 플레이해온 게임들, 나아가서 몰입을 주는 모든 활동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다. 대학교 때 만난 어떤 사람은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 <심시티 4>에 빠져 며칠 동안 밖에도 나가지 않고 정교한 자신의 도시를 만드는 데 몰두하곤 했는데요, 그런 인내심이 없는 저는 대체 어떻게 저렇게 복잡한 도시를 설계하고 구축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해했던 생각이 드네요.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 저는 상상할 수 도 없는 대도시 건설을 가능하게 한 거겠죠.
친구들과 가볍게 즐기기 좋은 <카트라이더>, 즉각적인 보상이 특징인 <애니팡>과 <캔디크러시>, 오직 눈앞의 상대방에게만 집중하며 수싸움과 반응속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스트리터 파이터>류의 격투 대전 게임, 추리를 통해 거짓을 반박하고 숨겨진 진실을 밝혀나가는 <역전재판>시리즈 등... 수많은 게임이 서로 다른 경험을 제공합니다. 오늘은 저의 사례를 통해 게임이 한 사람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지 알아보았는데요, 여러분도 지금까지 크든 작던 여러 가지 게임을 플레이해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즐겨온 게임을 잘 생각해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나는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잘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우리는 게임을 모른다>는 오늘로써 연재를 마칩니다. 저는 기회가 되면 게임과 심리학을 접목한 주제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글쓴이 - 지민웅
미국 게임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미국에 온 뒤, 게임을 만들며 게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게임 개발자입니다.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서 취미로 음악과 서핑을 하고 있습니다. <NBA2K> 시리즈와 <레고 2K 드라이브>에 게임플레이 프로그래머로 참여했습니다. 최근 Azusa Pacific University에서 임상심리학 석사과정을 시작해 일과 병행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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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둥둥: https://www.youtube.com/@doong_doong_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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