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팀?”
“와~”
“백팀?”
“와~”
한쪽 팔을 들고 콩콩 뛰는 아이들의 함성이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어쩜 이렇게 가을 운동회 하라고 하늘은 높고 청명한지 학교에서 날짜를 기가 막히게 잡았구나 싶다. 사실 아침부터 운동회 오기 좀 귀찮았는데 칼칼한 바람이 눈을 스쳤는지… 애들이 너무 열심히 해서 눈물이 났다. 뛰는 아이들 사이로 “청팀! 청팀!”하면서 점프하는 우리 아이의 얼굴이 나왔다 들어갔다 했다.
애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이상하게 목까지 메였다. 한편 마이크 잡고 운동회를 진행하는 사회자의 우렁찬 발성과 분위기를 띄우는 그 노련함에 탄복하면서 왠지 웃음도 나고, 그런 일을 매일 하는 생활이란 어떨지 잠깐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떤 아이는 머리까지 흔들면서 뛰었다.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누가 볼까봐 슬쩍슬쩍 눈물을 닦아냈다. 예전에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처음 공연할 때 꿀벌 날개를 달고 앞으로 뛰었다가 뒤로 뛰었다가 했을 때도 거의 오열할 뻔했다.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꿀벌 머리띠를 하고 동작이라고 하기도 뭐한 동작을 엇박자로 하는데 ‘쟤가 무대에서 저런 걸 할 수 있다니…’ 하면서 감격했었던 것 같다. 네가 이만큼 컸구나… 매트에서 기어다니던 아이가 무대에서 말똥말똥 서 있는 걸 보는 게 왜 그렇게 뭉클했던 걸까?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광부인 아버지는 성인 무용수가 되어 무대에 선 아들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걸 보며 전율을 느낀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아들이 동네의 발레 수업에 다닌 유일한 남자아이였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에 아들이 춤추는 것을 반대해 아들과 갈등을 빚다가, 나중에야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아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는 것도 안다. 아들과 자신의 그런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아버지의 눈에 드디어 장성한 아들이 힘차게 뛰어오르는 장면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순간 아버지에게 아들은 빼어난 무용수로서 성장한, 낯설고 아름다운 존재로 느껴진다.
그와 비슷한 감동이라고 한다면 좀 과장일 수 있겠지만, 갓 태어나 눈만 껌벅거리고 좀 자라서는 이유식을 입 주변으로 다 흘리며 먹던 아이, 걷기 시작했을 때는 걷는 폼이 너무 어설퍼서 넘어질 것 같았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 무대에서 나름의 제 역할을 하는 걸 보는 건 감동이었다.
무대 밖에서는 내가 코도 닦아주고 아이가 원하는 무언가를 해줄 수 있지만 무대 위에서는 아이 스스로 모든 걸 해내야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이가 잘하는 거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아이는 나 없이도 아주 잘 하고 있었다. 나는 그순간 아이를 나와 분리된 존재로 느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자기 팀이 졌을 때도 인솔자가 박수 치라는 대로 열심히 박수를 쳤다. 이제야 내가 있는 걸 발견한 아이가 손을 먼저 흔들었다. 오늘의 목적인 아이에게 ‘눈도장 찍기 완료’다. 햇살이 점점 살아나는데 아이에게 선크림을 발라줄 걸 하는 후회가 스쳤다.
문득 내가 청팀이었던 육학년 때 운동회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때는 나도 청팀의 승리에 목숨 걸고 사력을 다했던 것 같다. 마지막 운동회였는데 우리 팀이 진 게 못내 아쉬워서 멋진 말로 여운을 남기고 싶었다. 폐회식 때 내 주위 아이들이 듣고 있다는 걸 의식하며 “이번이 마지막 운동횐데…이렇게…패배로…끝나다니...”라고 했었던가? 생각보다 말이 한 번에 제대로 안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그때 어떤 아이가 “너 멋있는 말 하려고 했는데 말이 잘 안 나오지?” 하면서 놀렸는데 그 창피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운동회가 뭐라고. 저것도 한때지. 저 때 뿐이지. 청팀의 승리에 목숨 걸고 오늘 하루만큼은 청팀에 뜨거운 소속감을 느끼면서 청팀을 응원하는 아이들. 정말 인생에서 몇 번 되지 않는, 금방 지나가 버리는 순간인데.
한 단체전이 끝나고 반 아이들과 같이 대기석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로 갔다. 대기석과 대기석을 둘러싼 펜스 사이가 좀 멀어서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펜스 구멍으로 보이는 아이의 표정이 아까와 달리 좀 시무룩해 보였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왜’라는 입 모양을 해 보였다. 그랬더니 아이가 주먹 쥔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졌어!”라고 했다. 스마트워치를 차고 있는 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괜찮아. OO이 때문이 아니야.” 손목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한 아이는 마음이 조금 풀렸는지 엄지와 검지를 오므려 ‘오케이’ 표시를 해보였다.
해가 점점 높아졌다. 운동장에서 뙤약볕을 맞으며 두 시간째 서있었더니 다리가 아팠다. 이제는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꾸 나를 보면서 손을 흔들어서 튈 수가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면서 속으로 말했다. 그래, 너의 뒤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멀리서 너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감각을 주려고 지금 나는 여기 서 있다.
*글쓴이 – 진솔
어린이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독서교실 선생님입니다. 초등 아이 키우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오늘도 새록새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진솔의 브런치 – https://brunch.co.kr/@kateinthe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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