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연휴에 강원도 고성의 책방, 북끝서점을 찾았다. 맹그로브 고성과 함께, 나만의 고성 대표 명소로 자리 잡은 곳이다. 첫날은 책방을 휘둘러보고 나왔고, 둘째 날엔 어쩐지 내가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제목의 책을 품고 나왔다. 한수희 작가의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이었다. ‘인생여행자’인 내가, 산책을 좋아하는 내가, 한수희 작가의 전작을 인상 깊게 읽었던 내가 놓치면 안 되는 책과 ‘운명적인 만남’을 한 것만 같았다.
‘교토라서 특별한 바람 같은 이야기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 뒷면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 시간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위해 나는 교토로 간다.” 지금의 나를 매혹하는 문장이었다. 시간을 허비하고 싶었고, 시간보다 빠르게 달려 나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수록 무언가 놓치고 있지 않을까? 마음속 어디선가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여기다 싶었다. 시월, 나만의 가을을 보낼 최적의 장소처럼 느껴졌다. 막연히 ‘천년고도’로만 알고 있는 교토행 항공권을 끊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음 가는 대로 저지르고 있는 요즘의 나로서도 과감하고 빠른 ‘선택과 이행’이었다. 당장 오는 시월 십오 일, 일요일에 교토로 간다. 항공권만 예매했을 뿐, 숙소도 동선도 정한 것이 없다. 나름 'J형'으로 오래 살아온 내가 이렇게 막무가내여도 될까? 문득 우스운 마음이 들었다.
비빔밥 한 그릇을 싹싹 비워내듯이,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을 에필로그까지 다 읽고 나니, 한수희 작가가 미워졌다. 교토를 안 가도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제주에서도, 서울에서도 충분히 느끼고 누릴 수 있을 만한 경험이라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어떤 시선으로 사람과 장소를 바라볼지, 거기서 무엇을 느끼고 경험할지에 대한 질문과 삶의 지혜를 마주하자 떠날 이유가 별로 없어졌다. 난 속았다. 한수희 작가에게.
그럼에도 난 교토행 항공권 예매를 취소하지 않았다. 이곳 한국에서도 느낄 수 있을 법한 감정이지만, 왠지 그가 걸었던 ’철학의 길에서 난제지를 거쳐 게아게 역을 지나 산조 거리까지‘ 걷다 보면 나도 짧은 글 한 편, 단편 소설 한 편 써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호두나무 카페’를 가지 않아도, ’피스 호스텔‘에서 묵지 않아도, ’70년 된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홀짝이지 않아도, 나는 나만의 여행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솔솔 올라온다. 어쩌면 아리시야마의 치쿠린에서 대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며 산책만 해도 충분할지도 모른다.
P.S. 때마침 출간된 유홍준 작가의 <여행자를 위한 교토 답사기>도 주문해서 읽고 있는데 도통 어렵다. 나만의 <인생여행자의 교토 답사기>를 써봐야겠다.
* 글쓴이
인생여행자 정연
이십 년 가까이 자동차회사에서 HR 매니저로 일해오면서 조직과 사람, 일과 문화, 성과와 성장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몸으로 답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지층처럼 쌓아두었던 고민의 시간을 글로 담아, H그룹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칼럼을 쓰기도 했다. 9년차 요가수련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을 인생여행자라고 부르며, 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는다. 현재는 H그룹 미래경영연구센터에서 조직의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다.
* <인생여행자의 조직문화 탐사기> 대신, <인생여행자의 교토 답사기>가 3회 연재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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