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인정의 사슬에 묶여_김혜민

2024.09.15 | 조회 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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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Unsplash의Vitaly Gariev
Unsplash의Vitaly Gariev

영어가 좋은 거야, 싫은 거야

아침 8시 15분,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아직 몽롱한 상태에서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회사 캘린더를 확인한다. 오늘 9시로 잡혀 있던 미국 동료와의 미팅이 8시 반으로 앞당겨졌다. 미국 시간으로는 오후 4시 반이다. 그들은 4시 이후로 회의를 피하려한다. 요즘 자주 이야기하는 동료 톰은 늘 이렇게 말한다. “4시 반이 넘어서 회사에서 나가면 교통 체증 때문에 집에 가는 길이 완전 지옥이야". 몇몇 동료는 캘린더에 4시 이후를 '방해 금지' 또는 '퇴근 시간'으로 지정해두고, 그 시간대의 미팅 요청은 자동으로 거절한다. 철저한 퇴근 준비다. 이러니 그들과 미팅을 잡기가 쉽지 않아, 주로 이메일로 소통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럼 언제 얘기할 수 있는 거니?' 하는 얄미운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눈치 보지 않고 워라밸을 지키는 그들이 부럽기도 하다. 나도 특별히 간섭받지 않지만, 혼자 사는 싱글이라 일찍 퇴근하기가 어쩐지 주저된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나만 혼자 동료들 눈치를 본다.

미팅까지 15분. 세수는커녕, 간신히 눈꼽만 떼고 티셔츠로 급하게 갈아입는다. 5분 만에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책상 앞에 앉는다. 방금 일어난 부운 얼굴을 감추기 위해 '비쥬얼 효과' 기능을 켜고 화상 회의에 접속한다. 뇌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로, 멍한 얼굴로 동료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 그래 4시 반이면 일하기 싫겠지. 미팅 빨리 끝내자." 스몰토크를 5분 정도 나누다가, 슬슬 일 얘기로 넘어간다. 평소라면 미팅 30분 전에 물어볼 내용을 미리 영어로 대충 정리해뒀을 텐데, 오늘은 준비할 시간이 없어 그대로 들어갔다. 역시나 영어가 자꾸 버벅거린다. 머릿속에서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해 말로 내뱉는 과정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아, 그 단어가 영어로 뭐였더라?' 문법이 엉망인 문장을 내뱉고, 나조차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혼란스럽다. 동료가 갸우뚱하는 모습에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너, 내가 방금 한 말 이해했어?" 다행히도,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똑똑한 동료 덕분에 겨우 원하는 결론을 얻고 미팅을 마무리한다. 화상 미팅이 종료되자마자,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하, 내가 영어로 스트레스 받지 않는 날이 오긴 할까? 오늘 저녁엔 꼭 영어 수업 하나 듣고 자야지…'

1년 전, 동영상 플랫폼의 ‘쇼핑 기능’을 담당하는 지금의 팀에 합류했다. 이 기능은 크리에이터가 판매하고자 하는 상품을 영상 화면에 표시해 주는 것이다. 시청자는 영상을 보면서 상품 정보를 확인하고, 화면의 링크를 클릭해 즉시 구매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기능은 크리에이터가 시청자에게 상품을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다. 우리 팀은 비교적 새로운 팀이라 스타트업처럼 일한다. 해외 개발자들과 함께 결정해야 할 사항이 많아, 영어로 미팅을 자주 한다. 

나는 영어가 서툴러서 긴장되고, 미팅 전 미리 내용을 준비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팀에 처음 합류했을 때, 호주 억양이 매우 센 동료들과의 회의에서는 30분 동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질문이 나오면 “미팅 후 확인해서 알려줄게”라고 넘기고, 미팅 후에는 “인터넷이 좋지 않아 놓친 부분이 많아서 그러는데 이메일로 내가 확인해야 할 내용을 보내줄 수 있어?”라고 부탁했다. 와이파이가 빵빵한 회의실에서 이런 요청을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이전 팀에서는 한국인 상사와 대부분 현지 팀원들과 일하다 보니, 외국계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영어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는 것이 불만이었는데, 막상 영어 미팅을 계속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니 스트레스가 밀려온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다. 난 영어로 미팅을 하고 싶은걸까, 안하고 싶은걸까? 영어 널 증오해 아니 영어와 가까워지고싶어.. 진짜 내 마음은 뭘까?

 

새로운 팀, 눈치 보는 인간

새로운 팀으로 옮기면 일이 더 재미있을 줄 알았다. 이전 팀에서는 게임 광고주들이 원하는 타깃 유저층을 정확히 찾을 수 있도록 기술적인 솔루션을 개발했다. 문제는, 내가 게임을 거의 아니 아예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회의에서 게이머들의 성향에 대해 논의할 때도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게임에 관심이 없으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고, 사무실에 앉아 게이머들의 마음을 추측하는 일은 점점 지루해졌다. 그래서 ‘내가 자주 사용하는 제품과 관련된 일을 하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새로운 팀에 지원했다.

새 팀에서의 첫 몇 달은 정말 신났다. 내가 자주 보는 영상을 만드는 크리에이터들과 직접 소통하며 그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들을 수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자들에게 개선 요청도 했다. 상황을 영어로 설명하는데도 그렇게 힘들진 않게 느껴졌다. "이 크리에이터는 상품을 찾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다고해요. 더 간단하게 만들어야되요." 개발자가 "다른 크리에이터들도 똑같이 느낄것 같네요. 좋은 피드백이에요. 다음 업데이트에 반영할게요."라고 말했을 때, 오랜만에 일에서 성취감을 느꼈다. 보통 신입 팀원에게 3개월 정도의 적응 기간을 준다. 이 기간 동안에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해도 눈치 주지 않고 누구나 친절하게 답해준다. "신입 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니까 마음껏 질문하세요."라고 말해준다. 덕분에,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없이, 마음껏 궁금한 걸 물어볼 수 있었다.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점점 싫어지고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도 영어로 미팅을 미리 준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팅 준비를 할 때면 ‘내가 이걸 어떻게 잘 정리해서 말해야 상사가 나를 신뢰할 수 있는 팀원으로 여길까?’ 하는 생각만 가득했다. 한 주 내내 머릿속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생각들로 채워졌다. 크리에이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보다는 ‘이렇게 정리해서 메일을 보내면, 동료가 다음 평가에서 나에게 좋은 피드백을 주겠지? 상사도 이 메일을 볼 테니 내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겠지?” 같은 생각들에 갇혀 있었다. 발표 준비를 할 때도, 내 생각을 주관 있게 표현하는것이 아니라, ‘이 아이디어가 틀리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에 이미 검증된, 안전한 방법들만 고수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걸 발표하기 전에는 몇 번씩이나 동료들의 동의를 구했다. 영어에 대한 강박과 남의 시선에 얽매이는 내 태도는 결국 나에게서 일의 여유를 빼앗고, 재미마저도 앗아갔다.

 

그냥 사람 대 사람

아침에 눈을 뜨고 회사에 가기 싫은 날들이 반복되면서, 상담을 받기로 했다. 상담을 통해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집착을 버리고 내 생각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실수하더라도 짤리겠어? 짤리면 다른 데 가면 되지'라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대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한 대만 상사가 기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어? 저렇게 경력 많은 사람이 저런 질문을 하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물어보면 된다는 사실을. ‘이 질문을 해도 될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고민을 접고, ‘그냥 내가 모르는 것이니까 질문하자’라고 단순히 생각하게 되었다. 질문을 했다고 해서 아무도 나를 바보로 보지 않았고, 회사에서 쉽게 짤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런 불필요한 고민을 줄이니 일이 훨씬 더 척척 진행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영어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대화할 때는 거의 입을 떼지 못했다. 언어에 대한 열등감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맞물려, 마치 내 입에 테이프를 붙여버린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비슷한 영어 실력을 가진 동료가 외국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표정과 몸짓으로 공감하며 반응했고, 그 덕분에 분위기는 한층 더 편안해졌다. 외국인 동료들 역시 그의 반응에 더욱 친밀하게 다가오는 듯했다 그 동료는 긴 문장 대신 짧고 간결하게 말하며 가끔 버벅거리기도 했지만,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 이 사람은 동료들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없구나. 내가 동료들을 비즈니스적으로만 대하려 하고 인정받으려하는 반면, 이 사람은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진정성 있게 대화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하늘 아래 수백만 개의 회사 중 하나에서 일하며 월급을 받는 비슷한 사람들이 아닌가. 서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영어는 내 모국어가 아니니 완벽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예전에는 동료들 앞에서 유창하게 보이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 긴장되고 버벅됐다. 이제는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보다, 그걸 통해 원활하게 소통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영어는 나에게 꼭 필요한 도구이지만, 그 자체로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이 도구는 매일 조금씩 다듬어가면 된다. 당장은 더디게 느껴질 수 있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5년 후엔 지금보다 자연스럽게 사용할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장기적인 시각으로 조급함을 내려놓고 나아가려 한다.

회사의 좋은 평가도 중요하지만, 인정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히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결국, 회사 일도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다. 동료들에게 사람으로서 관심을 가지고, 서로 연결되고 공감하면 일이 더 잘 풀리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일은 내가 가진 의견에 그들이 가진 생각을 더해, 함께 더 나은 아이디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이 과정을 '회사 생활에서 네트워킹의 중요성과 내 목소리를 높여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긴다면, 부담과 긴장이 더욱 커질 것이다. 대신 이를 단순히 '동료들과 진정성 있게 소통하며 연결되기'나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진다. 

물론 아직도 업무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과몰입하지 않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더 좋은 의견과 제품을 만들어가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내가 부족한 부분을 매일 다듬어 나가면, 좀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뭐 실수해도 어떤가? 대체로 큰일 나지 않는것 같다.

 

* 글쓴이 - 김혜민

엔지니어. 삶의 여러 이야기를 시트콤의 한 에피소드처럼 유쾌하고 가볍게 대하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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