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하루

무해한 애정_ 지은이_ 우연한 하루

2024.09.16 | 조회 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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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교복을 입던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여의도와 15분 남짓 떨어져 마음만 먹으면 뮤직뱅크 혹은 음악중심 방청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가끔 학교에서는 꺅꺅 소리를 지르거나, 한 손을 번쩍 들고 교실 문을 여는 친구들을 만나곤 했는데, 이들이 한껏 들떠 있던 이유는 비슷했다. 바로 전날 학교 끝나자 마자 달려간 방송국에서 좋아하는 아이돌을 만났고, 때로는 손끝을 스쳤다는 무용담이 이어졌다. 가까운 거리와 팬심이 콜라보가 된 그곳에서, 나는 다양한 덕후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 중에 나는 늘 예외의 인물이었다.

물론 나 또한 당시 제일 유명했던 가수인 god의 시디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조용한 학생이던 나는 하교길 친구들이 함께 방송국에 가자는 이야기에 선뜻 대답하진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누군가 혹은 무엇이 좋아 지갑을 열거나 시간을 따로 내는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줄로만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삼십대가 가까워질 즈음부터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빠져 버린 대상은이었다. 십여년 전부터 페이스북 피드에는 친구들이좋아요버튼을 누른 글들이 가끔 올라왔다. 시간이 흘러, 취향이 맞는 글을 한두개씩 챙겨보다 보니 어느 새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기 위해 글 구독 서비스에 돈을 내고 가입하는 나를 만났다. 코로나가 시작된 후에는 '모임'이라는 곳에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글을 쓰는 작가들을 종합선물세트로 만날 수 있다는 북토크 공고를 보고 두려움을 이겨내려 마스크 두겹을 쓰고 모임에 가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글 덕후'가 되어 버렸다.

글을 좋아하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오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갈 즈음,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써보고 싶다'라는 욕구가 피어올랐다. 때마침 좋아하던 작가의 ‘온라인 글쓰기 수업'공고를 발견했고, 망설임 없이 수강 신청서에 이름을 적었다. 수업에서는 서울, 부산, 대구는 물론이고 미국, 독일에 사는 이들을 만났다. 거리와 시차의 벽은 온라인 통로 앞에서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때로는 새벽 한두 시까지 열정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인연은 이어졌다. 이년 전부터 한달에 한 번, 수업 때 만난 이들과 함께 온라인 공간에서 모임을 만들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토요일 오전 나는 부산의 작은 서점 앞을 서성이며 하루를 시작했다. 온라인 모임에서 주기적으로 만나며 함께 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된 허태준 작가와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십대 초반 현장실습생의 경험을 담아 교복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라는 책을 쓴 작가이자, 모임 안에서도 다른 이들보다 유난히 세심한 피드백을 주는 이였다. 이런 그를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몇 주전, 우연히 찾아온 부산행 일정 속에 그를 만날 계획을 채워 넣고 싶었다. 갑자기 연락하면 어색하진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잠시 망설이다 카카오톡에서 다음주에 부산에 가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실 때 계신 곳에 놀러가도 될까요?”라 보냈다. 이렇게 나의 생각은 순식간에 행동이 되어버렸다.  

작가가 글쓰기 모임도 하고 일을 하고 있다는 서점 앞에서(직접 찍은 사진)
작가가 글쓰기 모임도 하고 일을 하고 있다는 서점 앞에서(직접 찍은 사진)

서울에 살고 있는 내가 집에서 15분이 아니라, 15배나 떨어진 곳으로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 이는 과거의 나였다면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무작정 약속을 잡고 어느새 몸은 부산의 서점 앞에 서 있었다. 막상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함과 여러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사실, 그와는 온라인으로만 만났을 뿐 ‘친구’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애매한 나보다 열한살이나 어린 사람이었다. 제대로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했는데, 만나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어색하진 않을까, 갑자기 긴장감이 몰려왔다. ‘에라 모르겠다 이미 와 버렸는데’의 마음이 뒤섞일 즈음,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

꽤 오랫동안 모니터로 만나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그의 모습은 새로웠다. 화면 속에서의 그는 따뜻함 가득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예상보다 더 다부진 체격에 선한 눈매를 지닌 청년이 눈앞에 있었다. 약속 장소로 오는 길에 내가 커피를 사오겠다고 하자, 그는 연신 자신이 사야 한다며 미안해하기도 했는데, 이런 그의 모습에서 온라인에서 느꼈던 따뜻함이 왠지 실제 그의 성격에서도 묻어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와 대화하던 서점 안(직접 찍은 사진)
작가와 대화하던 서점 안(직접 찍은 사진)

서점 안 테이블에서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불과 20여분이 지났을까, 얼마 전까지 품었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느꼈다. 처음 만난 이와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우리에겐 글쓰기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기에 대화의 물꼬는 쉽게 트였다. 어느 새 주제는 각자의 삶으로 물 흐르듯 이어졌다. 각자의 경험은 달랐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는 여러 난관을 겪은 접점도 찾았고, 넘어지고 울었던 고생 스토리를 나누며 맞장구를 치기도 고생했다는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대화가 깊어져 가자 우리는 서로에게 조언자가 되기도 했다. 대학교 4학년인 그가 진로 고민을 털어놓자, 나는 자연스럽게 대학원 진학이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비추었다. 반대로 그는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내게 작가의 시선을 담은 조언을 건네주었다. 이렇게 우리의 대화는 점점 깊이와 폭을 넓혀갔다.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진지하게 고민을 나누었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 새 휘리릭 흘러 버렸고, 각자의 일정 때문에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일정은 그의 책에 사인을 받는 것이었다. 그날 서점에서 구매한 책을 스윽 들이민 내게 그는 '작가님께'라는 문구가 포함된 사인을 해 주었다. 아직은 너무나도 어색한 '작가'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붙여주는 사람을, 아마도 내가 ''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것 같다.

삶과 글을 나누는 책방이라는 말이 유난히 와닿았다(직접 찍은 사진)
삶과 글을 나누는 책방이라는 말이 유난히 와닿았다(직접 찍은 사진)

이제 부산에 가면 만날 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이 경험은 단지 부산에 국한되지 않을 것 같다. ''을 향한 무해한 애정은 앞으로도 마법의 열쇠가 되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인연의 문을 열어줄 것만 같다.

허태준 작가의 책 일부(직접 찍은 사진)
허태준 작가의 책 일부(직접 찍은 사진)


서울, 부산을 넘어 다음에는 어느 도시에서 뜻밖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를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여정들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 글쓴이 - 지은이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만든 순간을 기록합니다.감정을 글로 풀어내면 좋은 건 알겠는데, 좋은 걸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하지?' 고민 하다 '글쓰기'가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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