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지금도 늦지 않은 수선_어느 심리학자의 고백_이지안

충분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2023.04.26 | 조회 1.23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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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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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친구는 어머니가 떠났던 나이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아이들 곁을 지키는 부모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은 큰 상실감을 낳는다. 정채봉 시인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부터 롤랑 바르트의 에세이 '애도 일기'까지 어머니 혹은 아버지에 대한 애도나 그리움을 담은 노래나 시, 산문이 많은 것은 그만큼 부모라는 존재가 가진 정서적인 힘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보여준다.

그 그리움은, 자궁에서 어머니와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었듯,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든 어머니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 줄 거라는 기대에서 나온 것일테다. 나의 부족함과 실패에도 있는 그대로 나를 품고 사랑해줄 거라는 이상이 어머니에게 투영된다. 깊은 상실감이라는 것은 그런 이상화된 존재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부모가 곁에 있었지만 정서적으로 함께 하지 못한 경우에도 비슷한 상실감을 갖게 된다. 단지 방치나 학대받은 경우뿐 아니라 내가 바라는 부모의 모습이 있었으나 그에 미치지 못했던 경우에도 결핍이 남는다. 결핍은 마음에 매듭을 남겨 그 이상 자라기 힘들게 만든다. 부모가 지나치게 비판적이었거나 무력했던 경우, 부모에게 충분한 돌봄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경우, 그 허기를 어딘가에 지니게 된다.

그래서 여러 심리학 이론에서는 어린 시절 양육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유아기 때 부모와 친밀한 정서적 유대감인 애착이 안정적으로 만들어져야만 부모는 긍정적인 존재로 각인되고 자신과 세상에 대한 신뢰가 발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내면에 자리 잡은 우호적인 부모의 표상 덕분에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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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 주는 애착 경험은 어린 시절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데이빗 월런(David J. Wallin) 심리학 박사는 <애착과 심리치료>에서 초기 관계에서 문제가 있었더라도 이후 맺는 관계들이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어릴 적 부모와의 애착이 불안정했더라도, 성장 후 타인과 건강하고 지지적인 관계를 맺어간다면 다시 안정적인 애착, 관계나 타인에 대한 긍정적인 표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리페어렌팅(reparenting), 번역하자면 '재양육'이라는 개념이 있다. 부모가 해주지 못한 보살핌을 어른이 된 우리가 대신 해준다는 의미이다. 나를 좀 더 너그럽게 받아줬었다면 하는 아쉬움부터 내가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줬더라면 하는 서글픔까지, 각자의 결핍은 다 다르다. 내가 바랐던 부모의 돌봄을 결핍이 남긴 상흔을 회복하는 과정이 ‘리페어렌팅’이다. 부모에게 기대했던 다정한 말을 스스로에게 또박또박 말해주고, 자신이 초라하고 미덥지 않아 보일 때도 굳게 믿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내면에 심겨진 비난하거나 무시했던 부모상을 보다 지지적인 모습으로 바꿔갈 수 있다. 스스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잃은 경우에는 상담자가 그 역할을 대신 해주게 된다.


이미지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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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상담은 내내 재양육의 과정이다. 내담자는 어떤 주제라도 가져가서 쏟아놓고, 상담자에게 온전하고 전적인 집중을 받고 또 이해를 경험한다. 그 속에서 어떤 이야기든, 자신의 어떤 모습이든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는 신뢰를 느낀다. 어릴 적 우리가 부모에게 본능적으로 기대했던 바로 그것을 상담자에게 받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한심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겼던 부분까지 상담사에게 꺼내놓고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통해 자기 안의 모순을 긍정하게 된다. 이것은 생각보다 큰 힘이 있는데, 스스로도 용서하기 힘든 모습을 타인에게 받아들여져 본 사람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란 것이 생긴다. 그 믿음에 기대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용기를 내고, 나와 타인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까지 살피게 된다. 그렇게 성장이 멈춰 있던 부분이 재양육 과정을 통해 자라는 것이다.

성장기 내내 아버지에게 '남자가 돼가지고 너무 예민하다'는 비난을 받았던 한 내담자는 중요한 순간마다 스스로 너무 약하거나 남자답지 못한 게 아닐까 고민했다. 상담에서 그의 성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주는 '재양육' 경험을 거치면서 그제야 민감한 성향 덕분에 가족이나 타인을 섬세하게 배려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지자 그만큼 예민하지 않는 척 하느라 애쓰거나 자신을 매섭게 탓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믿어갔다. 부정적인 양육 경험이 우호적인 재양육 경험으로 다시 채워진 것이다.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도널드 위니캇(Donald W. Winnicott)은 좋은 부모는 아이가 필요할 때 곁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아이의 어떠한 행동도 견디는 단단함을 가진 사람이라 했다. 상담자는 정서적으로 안아주는 사람이면서도 버티는 사람이다. '좋은 부모'가 되어 어린 시절 덮던 이불에 듬성듬성 난 구멍을 메우고 새로운 조각천을 덧대어서 다채로운 빛깔과 무늬를 가진 퀼트 이불로 만들어간다.

이미지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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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우리는 상담자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주지 못했던 메시지를 서로에게 건넬 수 있다. 부모에게 원했던 관심을, 안전함을, 받아들여짐을 서로를 통해 조금씩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 누구도 부모를 완전히 대신할 순 없고 모든 결핍을 메울 수 없다. 그런 존재가 되려는 시도 자체가 위험하기도 하다. 다만 서로에게 모남과 흠이 보이더라도 저의에 있는 순한 마음을 공감하고 그 곁에 서줄 수는 있다. 그러한 태도와 언어로, 각자의 건강한 부모가 될 수 있는 만큼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사회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비판적으로 흡수한 언어인 내사에는 이것밖에 못하니’, ‘어린애같이 왜 그래와 같은 부정적인 내사물뿐 아니라 너는 참 좋은 사람이야’, ‘네가 결국 해낼 줄 알았어와 같은 긍정적인 내사물도 있다. 누군가가 내 편에 서서 해줬던 말, 나를 믿고 건네줬던 격려가 자산으로 남아 부정적인 내사물을 조금씩 밀어내어준다.

시험을 앞둔 어스름한 새벽, 자취방에서 나와 학교를 향할 때 그래서 피곤해서 어쩌니라는 다정한 위로의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시절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늦게 돌아오는 내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늘 그리 말씀하시곤 했다. 긴장하고 지쳐있던 나를 토닥이는 목소리에 어둑한 길이 그리 외롭지 않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들려준 너니까 잘 버티고 있는거야”, “네가 아무려면 그렇게 했겠어와 같은 메시지는 유리병에 가득 찬 알록달록한 구슬처럼 차곡차곡 마음속에 쌓여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말을 건네곤 했다. 스스로 형편없다 느끼며 자신에게 어떤 말로 위로할지 모를 때, 이 같은 긍정적인 내사물이 다리에 힘을 주고 무릎을 일으키게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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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서로를 파괴하는 능력만큼 서로를 치유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믿는다. 서로의 곁을 애써 지킨다는 것은 부모가 채우지 못한 결핍이라는 구멍을 부지런히 바느질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마음이 시리고 흔들릴 때마다 덮을 수 있는 퀼트 이불의 한 조각을 그렇게 완성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오랫동안 이어간다면, 언젠가 깊은 자국으로 남아있던 상흔이 옅어져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멋지지 않은가.

 


참고자료

David J. Wallin (2010). 애착과 심리치료. 김진숙 외 역. 학지사.

베셀 반 데어 콜크 (2020). 몸은 기억한다. 제효영 역. 을유문화사.


 

* 글쓴이_이지안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을 공저로 출간하였고,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상담 블로그 https://blog.naver.com/hello_kirin

인스타그램 @kirin_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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