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을 이고 앞장선 사람‘_당신의 이야기가 한 점 그림이 될 때_김상래

2023.04.25 | 조회 1.18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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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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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내게는 독서와 그림, 영화, 음악이 그런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것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삶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공기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 같은 것이다. 삶에서 이런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이면 나는 어쩐지 사람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송장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그럴 때의 나는 텅 비어버린 느낌이다.

 

학교 다닐 때 줄곧 팀 버튼이란 별명으로 교정을 누비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수업 외의 것들에 관심이 많아 종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혼자만의 작품세계에 몰두했었다. 그는 꿈꾸던 영화감독은 되지 않았지만 비슷한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학기 초, 선배들이 주는 술을 몽땅 받아 마시던 탓에 만취한 나를 집까지 잘 데려다준 의리있는 ’남사친‘이기도 하다.

 

그런 친구에게 전시회 초대장을 받았다. 코로나로 한차례 미뤄진 이진경 작가의 <먼먼 산 헤치고 흐르고> 초대전이었는데 장소는 고암 이응노 화백의 집이었다. 이진경 작가는 인사동의 쌈지길을 기획한 장본인으로 제5회 고암 미술상을 수상했다. 꽃 피는 봄이 오는 4월의 초입이라 한 시간 반이면 넉넉하게 도착할 곳까지 3시간이나 걸렸다. 고암 이응노 화백의 집엔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몰렸다.

 

고암 이응노 화백은 시대적 비극을 온몸으로 겪고 프랑스로 떠나 예술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으로 돌아오기 삼일 전 프랑스에서 타계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준비된 전시는 천도재 <저 하늘에서 이 하늘로>를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응노 화백이 수없이 그려낸 군상 속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내는 천도재처럼 보이기도 했다. 술은 역사 속에서 그 깊이를 드러낸다. 동학, 독립운동, 분단과 동백림 사건, 그리고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숱한 역사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을 모두 불러내 그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천도재 후에는 친구와 친분이 있는 B 역사 강사의 당시 시대상을 4시간에 걸쳐 들을 수 있었다. 오후 1시에 시작한 모든 스케줄은 밤 9시가 되서야 끝이 났다.

고암 이응노/수탉/1977
고암 이응노/수탉/1977

 

’불꽃을 이고 앞장선 사람‘의 이야기를 듣자니, ’나는 왜 고애신이 되지 못했던 것일까‘란 내 책의 문장이 떠올랐다. 감옥에서 배식으로 나온 밥알과 김치 국물, 간장을 아껴가며 수많은 작품을 만들고, 단단한 골판지로 배변을 닦을지라도 하얀 휴지를 모아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고암 이응노 화백의 넋을 나도 조금은 건네받고 온 시간이 아니었을까. 문득 그때 그 자리에서 이진경 작가가 하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내가 그때 태어났다면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손톱을 빼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나는 독립을 외칠 수 있었을까?'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독립투사의 마음만을 품은 채 매 시절을 건너는 나는 밍밍한 바람 같다고 생각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생을 제멋대로 재단했다. 인생이란 끝까지 가 봐야 아는 것일텐데. 어쩌면 아이가 지금 보다 조금 더 성장한 어느 때에 나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불꽃을 이고 앞장까진 아니어도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일었다. 이토록 무언가 간절한 내게 파도 파도 끝이 없는 깊은 우물과 같은 에너지가 용솟음칠 수 있기를. 금세 사라져버릴 날의 시간들을 고이고이 쌓아갈 수 있도록 맑은 정신이 오랫동안 허락되면 좋겠다.

 

고암 이응노(1904년 2월 27일~1989년 1월 10일)​ 전시에 초대받아 갔던 자리에서 그 시절의 역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암 이응노 화백의 초기작 수탉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난의 시절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수탉’은 굵직한 붓 터치로 단단한 기개와 넘치는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한 발로 꼿꼿하게 서 그 넘치는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닭은 어둠을 밝히고 아침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죠. 하늘로 잔뜩 치솟은 꼬리에서도 절대 지지 않겠노라는 힘이 느껴집니다.​ 가족과 함께 찾아간 고암 이응노 화백의 집에서 역사 이야기를 듣던 제 마음이 그랬나 봅니다. 집으로 돌아와 글을 쓰며 또 한 번 제 안의 어떤 심지 같은 것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글을 쓰며 찾아갑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고 말이죠.

 

* 글쓴이 - 김상래

도슨트, 예술 강사. 누구나 미술관에 놀러와 좋은 추억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쉽고 편안한 전시해설을 한다. 학교와 도서관에서 창의융합예술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성인 대상으로 미술 인문학, 미술관 여행강의 및 강연을 한다. 궁극적으로 문화·예술로 가득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알차게 살아내고 있다. 

 

저서로 <실은, 엄마도 꿈이 있었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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