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항해하는 마음으로, 글쓰기_어느 심리학자의 고백_이지안

2023.09.13 | 조회 1.57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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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모닝페이지’를 쓰기 시작한 지 두어 달이 되었다. 모닝페이지는 줄리아 카메론(Julia Cameron)의 저서인 <아티스트 웨이>에서 소개한, '아침마다 의식의 흐름대로 매일 세 페이지씩 쓰는 것'이다. 이 단순한 방법으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는, 간증과도 같은 경험담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언젠가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동안 아껴두고 쓰지 않았던, 귀여운 노트를 펼쳤다. ‘아직 졸린다거나 오늘 일이 많은데 괜찮을까같이 그때그때 떠오르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요즘의 걱정이나 기분에 대한 글로 이어졌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고민하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만 파고드는 날도 있었다. 세 페이지를 못 채우는 날이 허다했지만, 세 페이지까지 쓰는 날은 뭔가 달랐다.

많이 귀여운.. 노트
많이 귀여운.. 노트

 

사실 오랫동안 머뭇거렸던 아침의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어서 지금의 내 마음을 정확히 알고 싶어서였다. 이전의 경험을 돌아봤을 때, 잘 알고 있고 확실하다고 생각한 마음도 후에 지나보면 진짜 내 욕망이 아니었던 순간이 종종 있었다.

대상관계 이론가인 로널드 위니컷(Donald W. Winnicott)은 어린 시절 부모나 사회의 기대에 맞춰진 거짓자기로 살아갈 때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때로는 거짓자기로 자신을 보호하고 때로는 참자기인 자신을 드러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거짓자기의 힘이 센 경우 친밀한 관계나 상담과 같은 투명해도 괜찮은 관계에서조차 거짓자기의 모습으로 앉아 있곤 한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우리 모두는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좋은 사람' 혹은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되고자 거짓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포장할 때가 많다. 때로는 진정한 자기 욕망이라고 착각하기도 하면서.


 

수년 전 큰아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7년 동안 지내던 동네를 떠나게 되었었다. 전원마을이라 초등학교가 멀어서 이사를 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가깝게 지내던 동네 어르신들, 어린이집을 함께 보내며 끈끈해진 동네 친구들을 떠나는 것이 아쉬웠지만 오랜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고, 옮겨갈 동네도 찾았다. 객관적인 조건들이 좋았다. 괜찮은 혁신학교와 학부모 커뮤니티가 있고 육아 도움을 받는 시가와도 가까웠다. 회사에서 좀 멀어지긴 했지만 남편의 통근거리는 나쁘지 않았다. 아이를 마음에 드는 학교에 보낼 수 있어 만족스러웠고, 학부모들과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티를 실험해본다는 설렘도 있었다.

하지만 이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울적한 기분을 느끼는 날이 많아졌다. 도서관, 마트, 공연장과 같이 예전 동네에 없었던 인프라를 누리고, 학부모 모임에서 훌륭한 분들도 만나고, 좋아하는 활동을 찾아서 해도 자주 울적해졌다. 언젠가부터는 그렇게 즐거워하던 독서모임이나 생태모임에도 심드렁해졌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내가 무엇에 결핍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음이 통했던 이웃, 인적이 드문 전원주택이라는 공간, 회사와 가까웠던 거리 같은 것을 나는 많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내가 좋다고 생각했던 '객관적인 조건'에는 나의 진짜 욕구라는 것이 듬성듬성 빠져있었다. 가족의 편의와 필요를 고려하는 것이 우선이라 믿었고, 오랜 벗과 헤어지기 싫다거나 회사와 멀어져서 힘들다는 이유는 소소한 것이므로 나의 '중요하고 심오한' 욕구 목록에는 끼워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절실히 느꼈다. 우리가 얼마나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의 욕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변색시킬 수 있는지 말이다. 사회의 압력이나 기준, 부모나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같이 방어할 새 없이 우리에게 심겨진 가치를 나의 바람으로 착각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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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나의 거짓 욕망에 속지 않고 싶었다. 사실 모닝페이지는 ‘의식의 흐름 글쓰기’라는 글쓰기 치료 기법 중 하나와 유사하다. 글쓰기 치료는 심리적 외상이나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심리적 고통을 조절하고 성찰을 돕는 치료방법이다. 글쓰기를 심리치료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지만, 글쓰기를 통해 우울,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인 반추, 불안감이 줄어들고 행복감과 같은 긍정적 정서가 커진다는 결과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심지어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혈압과 심장박동수가 떨어지고 면역기능이 강화되며, 실제로 병원을 찾는 횟수가 줄어드는 등 건강이 개선되기도 한다.

의식의 흐름 글쓰기는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그대로 쉬지 않고 쓰면서 자신의 생각이나 표현을 제한하는 내부 검열관에게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기법이다. 이 방식의 뿌리는 프로이드의 자유연상기법과 닿아있다. 자유연상기법은 환자에게 떠오르는 생각을 판단 없이 그대로 말하게 하여 억압되었던 감정이나 생각이 드러나게 돕는 기법이다. 이를 통해 분석가는 환자 무의식의 갈등과 충동을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나에게 있어서도 글을 쓴다는 것은 무의식을 찾기 위한 여정과 같았다. 백지라는, 아무런 판단도 기대도 하지 않는 여백 위에 생각의 보따리를 가져와 아무렇게나 풀어놓으면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기억에 닿아있거나 내부 검열관을 피해 숨어 있었던 마음이 더듬더듬 고개를 들이밀곤 했다. 백지가 상담자와 같이 무의식을 끌어내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상담과 닮아있었다.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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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억압된 것이 많을수록 편견은 많아진다고 했던가. 좋은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기준이 촘촘할수록 그렇지 못한 나는 꺼내놓기 부끄러워진다. 세속적이면 안 된다거나 이타적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꼿꼿한 자기 관념에 들어맞지 않은 생각은 저 뒤로 숨어버린다. 그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생각만 늘어놓기 바쁘다. 나의 욕구는 고상하고 상식적으로 올바른 모습이어야 하는데, 진짜 욕구가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저급하고 유치해 보일 때, 이를 똑바로 응시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모닝페이지'는 세 페이지까지 쓴다는 원칙이 있다. 이 세 페이지라는 기준은 어딘가에 흩어져있었거나 가려져 있던 마음까지 나오게 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제임스 페니베이커(James W. Pennebaker) 교수의 글쓰기 치료 연구에서도 총 4일에 걸쳐 일정 시간 동안 글을 쓰게 하는데, 그는 셋째 날의 글쓰기에 주목한다. 어떤 사람들은 셋째 날에 이르러서야 첫째와 둘째 날에 회피해 왔던 가장 심각한 문제를 털어놓기 때문이다. 억압했던 마음은 걸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생각의 흐름대로 글을 쓰다 보면 첫 장에서는 주로 내가 평소 의식하고 있는 내용이 글이 되어 나왔다. 이를테면 나는 어떤 삶을 원하나?’라는 질문에 누군가에게 쉼과 위로가 되는 사람이라는 자주 생각해왔던 답이 비어져 나왔다. 한 페이지가 넘어가면 이런 물음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가 진짜 그럴 때 충만함을 느꼈던가?’ 자동적으로 나오던 답에 제동을 거는 질문이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자 실은 내가 원하기보다 그게 중요하다고 말한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 심겨진 것이면 어쩌지?’하는 질문들이 가지를 뻗어가며 확산되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휩쓸리지 않고 내 행동과 감정의 이유를 알아차릴 때 어느 때보다 충만하다 느꼈었어하고 마음 한구석에 있던 바람도 목소리를 높였다. 의식 속에 가득하던 사회의 시선이나 기대를 걷어내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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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과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거듭 강조했던 이야기,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했던 말이나 글과 같은 것들을 내 생각이나 욕구로 여기기 쉽다. 인간이 사회의 기대나 요구에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과연 내 생각인지, 그 기대에 맞추는 것이 합당한지, 다른 생각은 가능하지 않은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회의 판단이나 기대에서 한 꺼풀 벗어날 수는 있다.

'모닝페이지'나 ‘의식의 흐름 글쓰기’와 같은 글쓰기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하나의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바람이나 충동이 외부 사회에 조화롭게 잘 편집된 편집본이다. 저 아래에 있는 잘린 원본을 찾아가는 과정이 글을 쓰는 과정이다.

사회에 잘 길들여진 의식화된 메시지 말고 무의식에 있던 메시지가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도록, 거짓자기에 가려진 참자기에 다다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 동안 백지 위를 항해해 보면 좋겠다글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른 채 목적 없이 넓은 바다를 부유하듯 그때의 바람과 조류에 의지하여 글을 써내려가다 보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섬에 닿아 닻을 내릴 수도 있다. 부유하던 마음이 닻을 내린다는 것은 존재가 닻을 내리는 것과도 같아서 나라는 사람이 조금은 더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줄리아 카메론. (2003). 아티스트 웨이. 임지호 역. 경당

제임스 W. 페니베이커, 존 F 에반스. (2017) 표현적 글쓰기. 이봉희 역. 엑스북스

베셀 반 데어 콜크. (2020). 몸은 기억한다. 제효영 역. 을유문화사

 

 

* 글쓴이_이지안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로 출간하였고,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상담 블로그 https://blog.naver.com/hello_ki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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