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책방지기 입니다.
검은색 입간판에 흰색 분필로 글을 쓴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쓰다 보면 단어가 모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문단이 된다. 책을 읽으며 밑줄 쳤던 내용들로 가로 45cm, 세로 75cm의 공간을 채우고 나면, 내가 쓴 문장들을 잠시 소리 내어 읽어 본다. 1층으로 내려가 ‘문장 입간판’을 골목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세워놓은 뒤 본격적으로 서점의 영업을 시작한다. 아직 1년이 되지 않은 초보 책방지기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서점을 작년부터 운영 중이다. 작년 초 서점을 시작하기 위해 부동산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생각보다 빠르게 괜찮은 매물을 발견했고, 계약서를 쓰기 위해 건물 관리인과 처음 만났다. 깐깐해 보이지만 자기 건물과 임차인들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났다. 나도 최대한 사람 좋은 표정과 웃음으로 그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최종 결정을 망설이게 하는 내용이 있었다. 노후화된 건물의 특성상 외부 간판 부착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망설이는 나의 표정을 포착하셨는지 외부 간판 대신 ‘입간판’ 하나를 놔둘 수 있다고 말했다. 입간판이라는 말을 듣자, 대학을 졸업하기 전 자주 찾았던 한 골목이 생각났다.
시를 찾아 헤매었던 시절
내가 다니던 대학교 앞에는 ‘카페 헤세이티’라는 곳이 있었다. 크레타처럼 중심 상권에서 살짝 빗겨 난 골목의 2층에 있었고, 올라가는 입구 앞에는 입간판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크레타는 기성작가의 작품 속 문장을 쓰지만, 카페 헤세이티는 시인이 운영하는 곳답게 매일 새로운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또박또박 정자로 적는 나의 글씨와 다르게, 시에 담은 시인의 마음을 닮은 듯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글씨가 매력적이었다.
입간판에 적힌 시는 주제를 가리지 않았다. 하루는 사회의 부당함에 분노했고, 하루는 분노하지 않는 청년들을 재촉했다. 하루는 정신의 깨어있음을 요구했으며, 하루는 꿈을 절대 잃지 말 것을 주장했다. 또 다른 하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것을 외쳤다. 당시 대학 졸업을 앞두고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다. 하루 중 유일한 휴식 시간은 집으로 가는 길에 잠시 멈춰 입간판에 적힌 시를 보는 1~2분이었다. 물론 모든 시가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취업을 위해 기계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감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내가 책을 팔고 입간판을 쓰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메신저(Messenger)에서 라이터(Writer)로
계약서를 작성한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입간판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시절이 떠올랐고, 시를 쓰진 못하겠지만 좋은 문장을 소개하는 입간판을 쓰기로 결심했다. 매일 문장을 쓰고 지우며 그 시절의 나처럼 꼭 필요한 누군가에게 전해지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지나가다 입간판을 보고 올라오는 손님들이 정말 있었으며, 매일 출퇴근하며 꼭 읽어 본다는 골목 사장님도 생겼다. 직접 찍은 문장 입간판을 자신의 프로필 사진으로 해놓는 분도 있었다. 삶과 세상에 치열하게 맞서 싸운 수많은 작가가 고심하며 써낸 문장들에 기대고 의지하며 책을 팔기 시작했고 조금씩 책방지기의 모습이 되어갔다.
새해를 맞이하며 지난 한 해 동안 몇 개의 문장을 쓰고 지웠는지 세어봤다. 총 188개였다. 생각보다 많은 수에 놀랐고, 문장을 고쳐 쓰며 담았던 마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엔 좋은 문장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 번씩 글의 작가님께서 인스타그램에 ‘좋아요’와 ‘공유하기’로 언급을 해줄 때면 성덕이 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색깔이 명확하고 진솔한 문장을 쓰면 쓸수록, 나의 내면은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쪼그라들었다. 지금 나의 수준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문장의 깊이를 마주했을 때는 부러움과 동시에 자괴감이 들었으며, 오랜 시간 책을 곁에 두고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글을 쓰지 않았다는 후회가 커졌기 때문이다.
입간판에 글을 쓴다는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매일 문장을 쓰고 지웠던 시간은 글에 대한 간절함과 기초체력을 키우는 시간이었다. 단순히 좋은 문장을 소개하는 메신저(Messenger)가 아니라,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내 생각을 글로 전하는 진짜 작가(Writer)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새해에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나의 글로 문장 입간판을 채워보려 한다. 아직 여물지 않은 글을 쓸 것이 뻔하지만, 작가가 된 모든 이들이 필연적으로 거친 과정이라 생각하며 위안으로 삼는다. 혹시라도 내가 쓴 글의 매력에 이끌려 계단을 오른 뒤 크레타를 찾는 사람을 기분 좋게 상상해본다. 이쯤 되니 매일 시 한 편을 써냈던 시인의 맘이 궁금해진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을까. 내 글을 조금씩 쓰다 보면 그 맘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
* 사유와 자유의 시간
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과 사람이 만나 펼쳐지는 소소하지만 진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 글쓴이 - 강동훈
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인이 꿈이자 목표입니다.
인스타그램 : www.instagram.com/bookspace.crete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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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집
매일 어떤 글이 쓰여질지 고민하시는 것처럼, 매일 업로드 되는 입간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동훈
멈추지 않고 계속 쓰고 지우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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