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모네의 계절
둘째 조카가 벌써 고등학생이다. 막내 첫 조카는 초등학생, 우리 아이는 6학년이 된다. 3월은 누군가 무엇이 되면서 봄을 알린다. 겨우내 잠들었던 개구리, 너구리, 다람쥐, 뱀, 곰도 자신의 살아 있음을 알리는 달이다. 그런 봄엔 아네모네란 꽃이 핀다. 나는 흰 날개를 여러 겹 달고 나온 레몬옐로 수술의 아네모네를 좋아한다. 아네모네는 그리스어 아네모스(Anemos :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이 꽃을 바람꽃이라고 부른다. 아네모네의 꽃말엔 기대, 희망 이외에 사랑의 괴로움, 사랑의 덧없음의 뜻도 있다. 사랑하게 되면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되는 우리와 닮은 꽃이다. 그러다 그 사랑으로 인해 괴롭고 덧없음을 알게 해주는 꽃이기도 하다. 행복한 일이 피어나는 계절에 그렇지 않은 일들도 함께 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아네모네가 피는 계절에 떠오르는 그림이 한 점 있다.
아도니스는 나무에서 태어난 미소년이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역시 눈이 부실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가 아도니스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게 된다.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를 상자에 담아 죽음의 여왕인 페르세포네에게 간다. 미의 여신 혼자만 몰래 볼 수 있도록 아도니스를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잘 길러달라는 부탁을 한다. 하지만 상자를 열어본 페르세포네 역시 아도니스에게 반하고 만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죽음의 여왕 페르세포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 그것을 본 제우스가 중재를 하고 판결을 내린다. 1년의 3분의 1은 아프로디테와 살고 3분의 1은 페르세포네와, 나머지 3분의 1은 아도니스 자신의 삶을 살라는 판결이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와 사냥을 즐겼다.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운 미소년 아도니스가 행여라도 잘못될까 염려스러워 사냥을 하되 대적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한창 사춘기에 혈기 왕성한 아도니스가 그 말을 들을 리 없다. 사냥을 나갔던 아도니스는 전쟁과 파괴의 신 아레스의 질투로 조종된 멧돼지를 만나게 된다. 날카로운 멧돼지의 이빨은 아도니스의 숨통을 끊는다. 그 소리를 들은 아프로디테는 파티 중에 마시던 넥타르를 들고 백마를 타고 내려온다. 하지만 아도니스의 숨통은 이미 끊긴 후였고 그가 흘린 붉은 피에 아프로디테가 마시던 넥타르를 부었더니 핏빛의 한 송이 꽃이 피어났다. 그 꽃의 이름이 바로 바람에도 쉬이 떨어지는 ‘아네모네’이다.
만물이 살아나는 계절에 죽음에 관한 그림이 떠올랐다. 한 해를 시작하기도 전에 김이 세는 건 아닌지. 하지만 내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생은 늘 죽음과 함께 있기도 하고.
4월엔 꼭...
삼 일 동안 암 병동에 있었다. 아산병원 10층 34호 5인실 창가 바로 앞. 그곳은 해가 잘 드는 곳이라 낮이면 블라인드를 창끝까지 내려두어야 했다. 나는 집어삼킬 듯한 태양을 좋아하는데 아빤 눈이 부시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빠의 옆구리에서 담즙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담즙은 고인 물에 낀 짙은 이끼 색과 닮았다. 초록색 가운을 입은 간호사가 들어와 하루 3번, 투명한 봉지에 묵직하게 담긴 짙은 이끼를 작은 통에 담아 가곤 했다. 담즙은 가느다랗고 하얀 전깃줄 같은 얇은 관을 통해 고무 빨대처럼 생긴 호스로 배출됐다.
아빠가 담도암 판정을 받은 건 한 달 전이다. 아빠는 매년 건강검진을 받는다. “큰 따님이세요? 아버님 간 수치가 너무 올라가 있어요. 아무래도 상태가 심각해 보입니다. 담도암이 의심되니 큰 병원에 모시고 가 보세요. 소견서 함께 보내드릴게요.” 처음엔 집에서 가까운 아주 대학 병원으로 갔다. 엄마와 함께 있었는데 담당 의사는 나만 따로 불렀다. 그리곤 담도에 대해 설명한 후, 담도암은 보통 초기 발견이 어렵다고 했다. 며칠 후 아빤 입원을 했고 담즙이 잘 배출되도록 담도에 스텐트를 삽입하는 시술을 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담도암으로 가장 유명한 의사가 아산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며칠 후 일요일. 밤새 열이 40도까지 오른 아빠를 태우고 아산병원 응급실로 달렸다.
정년퇴직 후 이맘때면 봄을 대비해 텃밭에 나가 엄마랑 할 일이 많은 아빠. 7월엔 몽골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고 2년 뒤엔 유럽 크루즈 여행을 간다며 적금을 붓고 있었다. 건강이라면 누구보다 자신하던 아빠가, 우리보다 한참이나 앞서 걷던 아빠가 맥없이 병원에 누워있다. 아빠는 꼭 두 시간에 한 번씩 깨서 진통제를 맞고 좀 나아지면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그런 아빠 옆에서 아이에게 수유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아이도 꼭 두 시간에 한 번씩 깨서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던 때가 있었다. 아빠는 벽에 걸린 달력에 의미 있는 날짜들을 되뇌며 “4월엔 나갈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래야 할 텐데.”를 반복했다.
병원에 있는 내내,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 유명한 ‘키스’도 아니고 ‘아티제 호수’도 ‘여성의 세 시기’도 아닌 ‘삶과 죽음’이란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클림트가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40대 후반에 그린 유화다. 그는 왜 가장 빛나던 시기에 죽음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을까? 이 그림엔 평소 사용하는 금빛 컬러가 없다. 어둡고 낮은 채도가 그림 전반에 깔려 있다. 왼쪽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온통 무덤가의 십자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 오른쪽엔 삶의 순간들이 다양한 패턴의 이불과 함께 뒤엉켜 있다. 사랑하고 잉태하고 환희의 순간을 맞으며 숨이 막히기도 한다. 그런 삶 속에서 초연히 죽음을 인지한 노인이 있고 죽음과 눈을 마주쳐 기꺼이 즐거운 여인도 있다. 죽음과 삶 사이엔 그저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길이 아니라 거리일지도 모르겠다. 어둠을 깨닫고 나서야 빛이 있음을 알게 된다.
메멘토 모리, 아모르 파티
작년에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을 읽으며 밑줄 그었던 부분이다. 지금을 살아내는 것이 나의 일이라면 느닷없이 찾아온 아빠의 일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내 몫이다. “너는 왜 그렇게 냉정하니 애가.” 어린 시절, 아빠가 내게 자주 하던 말이었다. 남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내 일이 되었다. 나는 가족 중 누구보다 가장 담담한 사람이 아닐까.
암 병동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났다. 린의 My Destiny를 들었을 뿐이었다. 어두운 도시의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그저 집을 향해 액셀과 브레이크를 반복해서 밟고 뗐을 뿐이었다. 아빠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분명 어느 드라마에 삽입된 곡 같은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그걸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텅 빈 느낌.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 내가 우주의 먼지만큼의 무게도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 밤을 보낸 지금도 여전히 왜 울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울었다는 사실만 남았을 뿐. 내 걱정을 하던 아빠 때문이었을까. 여전히 정확하지 않은 그때의 눈물을 나는 오래 기억할 것만 같다.
네덜란드 속담에 "태풍이 불면 어떤 사람은 벽돌을 쌓고, 어떤 사람은 풍차를 단다."라는 말이 있다. 이번 일이 나에게 어떤 전환점이 될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여전히 큰일 앞에 냉정한 나 일 테고 그런 나는 우주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될 거다. 그럴 때 들여다보는 그림이 있다.
1639년에 그려진 한스 볼롱기에르의 ’꽃이 있는 정물화‘. 활짝 피어있는 값비싼 꽃들은 아름다움과 부를 상징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들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화병 아래쪽에 도마뱀은 인간의 기만과 죄, 끊임없이 잎을 먹어 치우는 애벌레는 탐욕과 허무한 욕망, 달팽이는 무거운 집을 등에 지고 다녀야 하는 운명, 원죄를 가진 인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그림을 바니타스 정물화라고 한다.
덧없는 세상사가 모두 그림에 그려져 있다. 이런 그림은 귀족이나 왕족들이 권력이나 부를 과시하기 위해 그렸는데 그중 정물화에 등장하는 튤립의 개수로 그 진가를 알 수 있었다. 특히, 흰색에 붉은 줄이 들어간 튤립은 더욱 특별했다. 그림에서 보이는 하얀 튤립은 ‘셈페르 아우그스투스’라 불리는 돌연변이종이다. 그 뿌리 하나에 그 당시의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투기시장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분을 바꿀 유일한 기회! 그러면 이 뿌리를 심어 튤립을 수확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집 한 채 값의 10배만큼의 돈을 얻을 수 있어 신흥 부자들이 생겨났다. 네덜란드 금융 역사상 큰 이벤트로 남아 있다. 지금의 비트코인이나 로또와 비슷하다.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는 지름길로 많은 시민이 튤립 투기를 선택했다. 그 결과, 끝없이 오르던 튤립 구근의 가격은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며 폭락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최초 거품 경제 현상이었다. 과열된 투기 현상을 일컫는 경제 용어 '튤립 버블'이 그렇게 생겨났다. 17세기 정물화와 튤립 이야기에 대해 더 자세한 시대상을 알고 싶다면 ’데인 드한‘ 이 출연한 ’튤립 피버‘라는 영화를 추천한다.
* 글쓴이 - 김상래
도슨트, 예술 강사. 누구나 미술관에 놀러와 좋은 추억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쉽고 편안한 전시해설을 한다. 학교와 도서관에서 창의융합예술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성인 대상으로 미술 인문학, 미술관 여행강의 및 강연을 한다. 궁극적으로 문화·예술로 가득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알차게 살아내고 있다.
저서로 <실은, 엄마도 꿈이 있었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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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통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명확하네요. 어딘가 모르게 슬프고, 한편으론 흥미롭습니다. 세상일은 어쩔땐 과거에 답이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편안하게 읽히는 작가님의 다음 글을 기다리며. 지금 이 시간에도 병마와 싸우고 계실 환자분들, 또 그의 가족분들께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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