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나는 부모로부터 떨어져 보란 듯이 독립하고 싶었다. 엄마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이어지는 나에 대한 규정이나 정의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나의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나 한 사람만 건사하면 모든 것이 충족되는 세계로 가고 싶었다. 나에 대한 뿌리도, 배경도 없는 곳에서 ‘나’란 존재를 나의 힘으로 빚어보고 싶었다.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내가 그 시절에 하던 행동과 언어로 내가 그려지는 하얀 도화지 같은 세상을 꿈꿨다. 그러다 보니 짧은 토막 여행보다는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 장기 해외 봉사 등 한 지역에서 ‘생활’할 수 있는 여행을 좋아했다.
한 해에 한 번은 해외로 떠나던 시절, 종로의 한 맥줏집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양껏 마시고 들어온 날이었다. 태국으로 취업한 친구에게 메일을 받았고, 거기엔 방콕 현지의 한국어 강사의 구인 공고가 첨부되어 있었다. 나는 메일을 받고, 지원서를 넣어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무작정 캐리어 하나를 달랑 들고 떠났다. 그곳에서 2년을 지내고 올 거라는 상상은 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태국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같은 아시아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곳은 생활 습관도, 사람들의 체격도, 취향도 많은 것이 달랐다. 그곳에서 나는 동북아의 어린 아가씨였고, 피부가 하얗다는 이유로 쉽게 타인들에게 대상화되었다. 사람들의 순수한 호의마저 의심부터 하던 그 시절의 나는 꼭 온 내장에 독을 품고 있는 복어 같았다.
태국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짧은 연애를 마치고, 곁에 있는 친구들마저도 썰물처럼 나를 떠났다. 여행자의 나라여서 그런지, 새로이 사귄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느 한순간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당시 느꼈던 외로움은 지금도 설명이 어렵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밤을 새는 날도 잦았고, 가까스로 잠이 든다 해도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바닥에 흩뿌려지는 꿈을 꿨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낀다는 고독감이 그렇게 숨이 턱 막히는 감정인지 전에는 몰랐다.
외로울 때마다 의도적으로 더 열심히, 바쁘게 지냈다.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남은 기한을 잘 버텨내고 싶었다. 일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무언가에 닿을, 몰두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다녔다.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워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좋았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일하는 곳의 아래층에 있는 댄스 스튜디오였다. 햇빛이 잘 들고 천천히 음악이 흘러 나오는 곳이었다. 슬쩍 유리문 안의 홀을 건너다 보았는데, 키 작은 여자 선생님이 연습화를 신고, 탱고 수업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눈은 반짝였고, 부드러운 미소는 환대로 가득했다. 유리문 저편의 세상이 신기하고 궁금했다.
안에 있던 선생님의 따뜻한 미소가 나를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카운터에 앉아 있던 동갑내기 태국인 보조 선생님의 애교 섞인 목소리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녀의 말투에는 애교가 가득했지만, 왜 그 춤을 춰야 하는지 굳이 설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살사나 스윙 등 다른 춤에 대해서도 명료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들은 나를 한껏 반겼지만, 내가 여러 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적정한 거리를 주었다. 나는 그 환대와 거리감이 마음에 들었다.
곧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수업을 들으며 나는 바라던 대로 언어로 규정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보, 푸, 푸 베어’ 등 마음 내키는 대로 불렀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나의 민첩함이나 섬세함, 혹은 음악에 따라 달라지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나’가 더 중요해 보였다. 근력이 부족하면 운동을 하면 되었고, 상대의 리딩에 너무 빨리 움직이면 눈을 감고 상대에게 집중하면 되었다. 온전히 그 순간의 ‘나’로서 존재하라고, 여기 하얀 도화지를 줄 테니 미세한 펜촉으로 ‘나’라는 존재를 공들여 그려 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 오늘의 탱고 음악
* 매달 18일 '탱고에 바나나'
* 글쓴이 - 보배
탱고 베이비에서 탱린이로 변신 중. 10년 정도 추면 튜토리얼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국어를 가르치는 데에 보냅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Brunch: https://brunch.co.kr/@sele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