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1년이 366일인 윤년(閏年)이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윤달이 있는 윤년에 결혼식 올리는 것을 선호하거나 어른들의 수의(壽衣)를 미리 지어 놓는다고 한다. 비슷하게 아일랜드에도 윤년과 관련된 오래된 로맨틱한 풍습이 있다. 보수적인 사회였던 아일랜드에서 2월 29일에는 여성들이 남성들이 구애하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먼저 남성에게 청혼을 하는 날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일랜드의 윤년 풍습을 모티브로 삼아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 윤년이라는 영어 표현을 그대로 제목으로 붙인 ‘Leap Year(2010)’는 보스턴에 사는 여주인공이 청혼을 하기 위해 아일랜드에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영화는 스크린 가득가득 펼쳐지는 아일랜드의 자연경관과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이어 주기 위해 등장하는 장면들에서 아일랜드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정말 현실적으로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있다.
영화 초반부에 비바람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위태롭게 움직이는 작은 고깃배의 선장은 여주인공을 한 바닷가 마을에 내려주며 소리를 친다. “딩글(Dingle). 여기가 딩글이오.”
아일랜드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을 찾아야 해!
아일랜드에서 살면서 누군가 나에게 ‘언제’ 한국에 가장 가고 싶은지 물은 적이 있었다. 막 결혼하고 임신을 했을 때는 엄마가 해 주는 밥이나 쫀득한 떡이 너무 먹고 싶어서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이제 10년쯤 아일랜드에 살다 보니 내가 정말 한국에 가고 싶은 순간은 바로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인 것 같다. 그럴 때면 마음이 타들어 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했는데, 이곳저곳에 도움을 요청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진심으로 큰 도움을 받게 되는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지인의 가족이 영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진심을 담아 편지를 보내어 아일랜드에 한번 오시라는 초대를 했고 그분들은 그 초대에 응해 주셨다. 이후로 나와 남편인 제임스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고, 유명한 관광지에 대하여 열심히 알아보았다. 우리가 초대한 분들에게 진심으로 좋은 시간을 보내게 해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심사숙고를 마친 뒤 결정된 곳이 바로 딩글 반도였다. 딩글은 아일랜드를 여행하려는 사람들에게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 곳으로, 유럽에서 최서단에 위치한 아일랜드에서도 다시 또 한 번 최서단의 마을이다. 말하자면, 유럽의 진정한 끝자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었다.
'Dingle: The most beautiful place on earth' - National Geographic
지인의 가족은 영국에서 더블린으로 입국을 해서 관광을 한 뒤, 기차를 타고 카운트 케리(Count Kerry)의 주도(主都)인 킬라니(Killarney)의 기차역에 도착했다. 먼 곳에서 기꺼이 아일랜드를 찾아와 준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득 담아 환영을 했다. 우리는 곧장 9인승 승용차를 타고 목적지인 딩글로 향했다.
딩글로 가는 길은 비록 1시간 남짓 걸리는 정도였지만, 한국의 국도와 같이 이어지는 좁은 길에 살짝 차멀미가 났다.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었더니, 가을이 시작되는 아일랜드의 8월 바람은 벌써 쌀랑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덕에 아팠던 머리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아일랜드는 낙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지만, 관광업 역시 빠질 수 없는 주요 산업 중에 하나이다. 특히 킬라니와 딩글이 있는 케리 주(州)(County Kerry)는 아일랜드의 서늘한 여름 날씨와 함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경험할 수 있어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사랑받는 곳이다.
딩글에 도착한 우리는 해안가에 늘어서 있는 해산물 식당과 펍(pub) 중에 한 곳을 들러 식사를 했다. 딩글 해안가에서 당일 잡아 올린 대구로 만든 피시 앤 칩스(fish n chips)와 농어구이 그리고 홍합찜을 적당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전날 더블린의 기네스 맥주 공장에서 마셨던 신선한 흑맥주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며 지인은 생맥주를 한잔 시켜 음식과 함께 곁들였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마을을 산책했는데, 아일랜드의 여느 동네처럼 해안가에서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주택가 사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고 귀여운 상점과 식당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꽤나 좋았다.
Hit the road: 출발!
이제 딩글 마을에서 우리는 서쪽으로 더 가보기로 했다. 20여 분을 달리다 보니 인치 해변(Inch beach)이 나타났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백사장의 규모는 압도적이었는데, 서퍼들의 천국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캠핑을 하며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아 보였다. 잠시 내려가서 해변을 걸을까도 생각했지만, 점점 잿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이 심상치 앉아 계속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좁고 매우 구불거리는 길을 조심스럽게 지나가다 보니 눈앞에 본격적으로 대서양 바다의 절경이 가파른 절벽 아래로 펼쳐졌다. 언젠가 한국에서 통영 인근 지역의 해안가 도로를 지날 때 역시나 구불거리는 길 아래로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이 펼쳐졌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빙하시대에 만들어진 사구(dune)와 절벽들은 에메랄드빛의 남해와 달리 심연(深淵)의 색을 가진 바다 위로 절벽이 끝이 보이지 않게 깎여 내려가고 있었다.
“운전이 쉽지 않겠어요.” B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조심해서 운전하고 있습니다.” 제임스가 대답했다. 길이 어느 정도 평탄해졌을 때 제임스는 딩글 출신의 탐험가 탐 크린(Tom Crean)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탐 크린은 16살에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 해군이 되었습니다. 이후 해군 소령이자 남극 탐험가로 잘 알려진 조지 스콧의 남극 탐험대의 일원이 되어 스콧의 남극 원정에 2번 참여하게 됩니다. 탐 크린은 한 대원이 실종되자 눈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수십 킬로를 걸어서 동료를 구조해 오기도 할 만큼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2번 더 남극 탐험대에 참여했고, 탐험가들에게는 탐 크린은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은퇴 후에는 아일랜드로 돌아와 펍을 열었는데, 이름을 남극 여관(the South Pole Inn)으로 지었는데, 아직도 운영 중입니다.”
남편인 제임스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진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작은 사건도 묘사와 서사를 더해 자세하게 설명할 줄 알고 무엇보다 무미건조한 이야기도 재미있게 설명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차 안에서의 시간이 따분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미리 공부해 온 탐험가 탐 크린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주었다. 먼 곳에서 찾아온 나의 친구들을 배려하는 그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고마운 대목이었다.
세상의 끝 블라스켓 섬(Great Blasket Island)
도로에 사람들이 나와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어렵사리 주차를 하고 차에서 모두 내렸다. 대서양 한가운데 커다란 섬이 보였다. 그 섬은 바로 블라스켓 섬이다. 이 섬은 아일랜드의 최서단의 섬이고, 이 섬에서 서쪽으로 다음에 나오는 땅은 바로 북미대륙이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미국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때 유럽 사람들은 아일랜드의 블라스켓 섬을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고 한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블라스켓 섬을 볼 수 있는 블라스켓 전망(Blasket's view)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만약 직접 섬에 들어가고 싶다면 정해진 인원만 그리고 날씨가 좋을 때만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는데 그 기회가 그리 쉽게 주어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스타워즈에서 이 섬과 딩글의 여러 장소가 외계를 표현하기 위한 촬영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 이 섬이 워낙에 외떨어진 곳이라 아일랜드가 800년 동안 영국에 통치하에 있을 때도 식민 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일랜드 전통 언어인 게일어와 문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아일랜드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섬에 들어가 공부하고 시간을 보냈다고도 한다.
언제든 비가 내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멀리 블라스켓 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대서양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차디찬 기운이 척박한 땅과 어우러져 맞은편의 너른 들판이 황량하게까지 느껴졌다.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갔던 아일랜드 사람들의 삶이 참으로 녹록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지인과 나누기 시작했을 때 방금까지 화창했던 날씨가 금방 흐려지더니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에 차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운전을 하던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운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이 비가 그치면 아마도 생생하게 무지개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럼 B의 가족들에게도 기억에 남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거야.”
남편의 그 마음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아졌지만, 차의 천장에서 들리는 비바람 소리가 만만치 않아 ‘제발. 비야 그쳐라.’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우리 일행들은 다시 구불거리는 길을 달려 숙소가 있는 킬라니(Killarney)로 돌아왔다.
* 아일랜드에 사는 한국인의 아일랜드 여행기
아일랜드 사람과 결혼한 뒤 10년 동안 아일랜드 코크(Cork)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 잘 알려진 관광지 대신 이야기가 있는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를 여행하는 세 가족의 여행기입니다. 특히 아일랜드 영화의 무대가 된 장소를 여행하며, 그곳과 관련된 인물과 숨은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 글쓴이 - 도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만난 아일랜드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올 해로 10년째 아일랜드에서 타향살이를 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