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끝과 시작_서브컬쳐오디세이_정희권

게임 밖으로 나아간 서른 즈음

2022.03.11 | 조회 1.1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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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어떤 분야건 그 일을 오래 한 분들 중에는 그 일과 자신이 운명으로 엮여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직업을 나타내는 말 중 우리말로는 천직이라고 표현되는 영어의 Calling이라는 말은 아마 그런 분들을 위한 것이리라. 

 고교시절 잠시 다녔던 예비신학생 모임에서는 소명이란 말의 의미를 배웠다. 가톨릭 신부는 자기가 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그 모임을 그만 나가겠다고 말할 때 아무런 마음의 짐 같은걸 느끼지 않았다. 나한테 그런 소명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감명 깊게 읽었던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 ‘나는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어려웠던가?’ 이 구절은 나를 포함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불필요하게 힘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하면 이게 상당히 중2병스러운 말이기도 하다. 굉장히 교양 있는 중2가 했음직한)  수십억 년 전 지구 어떤 구석, 평화롭고 따뜻한 햇볕이 비치던 어느날 암모니아와 인산염으로 충만한  진흙 구덩이에 번개가 떨어져 지구 상에 첫 번째 원시 생명  발생한 이후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삶은 우연과 환경, 그리고 유전에 영향받고 학습된 믿음체계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니 '원래'의 우리 자신을 찾는다는건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쫒는 일일 수 밖에.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연의 결과라고 해도 확실한 것은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는 분들 중에는 존경스러운 분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직업 자체보다는 그분들이 하는 일에 임하는 태도, 그리고 그 일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인 가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얼마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도 거기 있지 않을까? 

 내가 20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게임 만드는 일을 하게 된것도 사실은 그냥 우연의 산물이다. 나는 딱히 인생에 대단한 목표 같은 것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냥 재미있는 일을 좋아했을 뿐이다. 몇 가지 일을 계기로 그걸 소비하는 입장에서 창작하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계기란 것도 지금 생각하면 약간은 슬프고도 웃기는 일이었다. 

 매일매일 직장에서 게임을 하고 게임에 대한 보고서를 쓰며 살고 있던 어느날 나는 소개팅을 하게  됐다. 상대는 방송국에서 글을 쓰는 작가라고 했다. 별 생각도 기대도 없이 나간 자리였지만 세 번째 만났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됐는데 그건 그날이 내 생일이라고 말하자 그분이 내게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라는 소설을 선물했기 때문이었다. “예쁘고 책 좋아하는 여자”라는 나의 단순하기 그지없는 여성관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요즘과 달리 당시는 연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탐색의 시간이 길었던 데다 나는 그 분야의 주변머리가 심각하게 모자란 인간이었다. 주말이 되면 습관적으로 전화를 하고 서로의 일과를 이야기 한다음 만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거나 이야기를 하고 헤어지는, 마치 도킹에 실패해서 계속 궤도를 도는 아폴로 우주선과과 소유즈 우주정거장 같은 데이트를 하곤 했다.  

 그런데 주말 강남역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어느 날, 나는 한 시간 정도 지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데이트 전날, 내가 당시 푹 빠져 플레이 하던 온라인 게임 에버퀘스트 안에서 나는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내가 속한 길드 ‘노라쓰의 경로당’에서는  얼음 대륙 벨리어스의 가장 상위 던전, 모든 드래곤들의 어머니인 비샨의 사원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속한 길드는 그 사원에 도전하기 위해, 용들의 반대 세력인 아이스 자이언트들을 수개월간 사냥해왔다. 용들의 사원 가장 깊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드래곤과 서로 증오하는 사이인 자이언트들을 공격하여 드래곤들의 환심을 사야 했다. 그렇게 용들의 믿음을 사면 사원 입구를 지키는 수많은 드래곤들을 지나쳐 들어가, 귀한 아이템을 갖고 있는 드래곤들의 보스가 잠들어 있는 사원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혼자 힘으로는 맞설 수 없는 용들의 보스를 쓰러뜨리고 드래곤 슬레이어의 영광과 귀한 아이템들을 얻기 위한 이 수개월짜리 배신극에서 빠질 수는 없었다.   

 길드원 50명이 동시 접속해서 시작된 게임은 정말 오랜 시간 이어졌다. 대여섯 번 전원 전멸당하는 소동을 겪고나서 마침내 드래곤 보스를 쓰러뜨렸을 때는 이미 새벽 네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그러고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 대강 씻고 눈을 붙인다는 게 그냥 곯아떨어져 버린 것이다.

평화롭고 따뜻한 햇볕이 비치는 카페 창가에서 그녀는 다가오는 나를 바라보았다.  

커피를 시키고 자리에 앉자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왜 이리 늦었어요?” 

나는 대단히 정직하게 대답했다.

“새벽 네시까지 용 잡았어요.”

“네?”

나는 무척 친절하고 자세히 그녀에게 설명을 했다.

태곳적, 모든 용들의 어머니인 비샨이 발톱을 세워 흔적을 남긴 벨리어스 대륙과 비샨의 자손인 로드 나가펜과 레이디복스 이야기 그리고 얼음대륙 벨리어스를 삼등분하는 아이스 자이언트와 아이스 드워프, 그리고 드래곤들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하고 

 대부분 노총각으로 구성된 길드원 50명이 새벽 네시까지 드래곤의 사원에서 레이드를 진행하며 여러 번 전멸한 끝에 마침내 보스를 쓰러뜨린 이야기까지 했을 때 그녀는 내 말을 끊고 물었다. 

“그래, 그렇게 고생해서 희권 씨는 뭐가 생겼어요?”

나는 대답했다. 

“민첩성 11 올려주고 냉기 방어 20 붙은 팔찌를 주사위 굴려서 먹었어요” 

그녀는 하얀 손등 위에 예쁜 턱을 올려놓고는 

내가 태어나서 그때까지 본 여자의 미소 중에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 진짜 예쁘다.’ 

그리고 그 이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눈치가 없던 나는 두 번째 전화를 할 때쯤 에서야 비로소 그녀는 영원히 전화를 받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건과 몇가지 사건들 이후    

나는 내 삶에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게임이라는 마법의 원 안에서의 삶도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모든 게임에는 엔딩이 있다. 나는 내가 플레이 하는 게임의 끝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할 것인가?   

한때 대학원을 다녔지만 이제 공부를 더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전 직장을 그만둘 때, 다시는 넥타이 매는 직장은 다니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내가 정말 잘 안다고 생각하던 (착각이란 걸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게임을 창작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내가 즐기던 게임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했지만동시에 더 크고 다른 종류의 게임을 시작하겠다는 결정이기도 했다. 

 

서른 살을 넘긴 어느 날이었다. 

 

글쓴이 - 정희권

2000년경부터 게임, 장르문학, 만화등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렉시오, 스파이시 등의 보드게임을 기획, 제작했고, 현재는 만화 등 다른 IP 가 갖고 있는 재미를 게임 시스템으로 구현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독일 하이델베어 게임즈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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