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상사 분류법이 있다.
멍부, 똑부, 멍게, 똑게
상사의 업무 스타일을 능력을 기준으로 멍청하다/똑똑하다로 나누고, 성실성을 기준으로 게으르다/부지런하다로 나눈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멍청한 것보다는 똑똑한게 낫고, 게으른 것보다는 부지런한 것이 낫다. 우리의 이러한 인식과는 다르게 ‘똑부’ 상사는 ‘멍게’ 상사보다 선호도가 낮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상사의 눈에 나는 ‘멍청하고 게으른’ 부하직원으로 보일테고, ‘똑부’ 상사의 기대치를 채우는동안 내 몸이 ‘똑 하고 부러질’ 지경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조직차원에서 봐도 ‘똑부’는 좋은 상사라 말하기 어렵다. ‘똑부’는 자신의 능력과 성실성을 한껏 발휘하기 위해 죽어라고 일하지만, 팀원들이 실수를 통해 성장하는 것을 기다려 줄 여유가 없다. 결과적으로 본인과 팀의 번아웃을 자초하는 셈이다.
네 가지 유형의 상사 중 조직과 팀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상사는 ‘똑게’ 타입이다. 똑똑하다는 것은 일의 경중, 시급성, 결과 산출물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방법을 알고, 어떤 업무를 누구에게 어떻게 맡겨야 할지 안다는 걸 의미한다. ‘게으르다’ 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본인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타인에게 위임하는 능력'은 관리자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부지런하다’는 말의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멍부’는 ‘멍게’보다 선호도가 낮다. 아니, 조직과 팀원 모두가 진절머리를 낸다. 마치 무한상사의 '정과장' 처럼 ‘멍부’는 부지런하게도 비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그래도 그 사람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잖아.” 라는 평가를 받는 '멍부'를 조직은 ‘멍게’를 몰아내듯 쉽게 밀어낼 수는 없다.
상사만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팀원 역시 이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각 유형 별 궁합 및 대처법을 알려준다는 글과 영상이 넘쳐난다. 읽어내려가며 내 상사가, 내 팀원이 떠오른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내가 어쩌다가 ‘멍청하고 부지런한’ 상사를 만나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라고 푸념하는 동안, 내 상사는 왜 우리 팀에는 ‘멍청하고 게으르기까지 한 사람만 가득한거냐’며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든다.
- 조직원으로서의 나는 사분면 어디에 있는가?
- 나의 위치는 한 면에 고정되어 있는가?
- ‘똑게’는 365일 똑똑하고 게으를까?
- ‘멍부’ 상사가 내리는 결정은 모두 멍청한가?
- ‘멍게’를 조직에서 모두 몰아내고 관리자의 위치에는 ‘똑게’를 배치한 후 ‘똑똑하고 부지런한’ 직원만 채용하면 조직은 성공할까?
진화생물학을 연구하는 홋카이도 대학 하세가와 에이스케 교수가 쓴 『일하지 않는 개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메시지는 ‘비효율의 필요성’이다. 언뜻 관찰했을 때는 빈둥대는 개미가 쓸모없어 보이지만, 부지런히 일하는 개미가 지쳐서 더이상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이 자리를 빈둥대는 개미가 채운다는 거다. 아니, 빈둥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하세가와 교수가 알려주는 또 하나의 재밌는 사실은 먹이를 100% 틀림없이 뒤쫓는 엘리트 개미만의 집단보다 약간 ‘멍청한’ 개체가 섞여있는 집단이 먹이를 더 많이 가지고 돌아왔다는 점이다. 지름길을 더 빠른 시간에 도달하는데 숙달한 개체만이 모여있을 때보다 언뜻 보면 전혀 의미없는 시도를 하다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 되기도 한다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미국에서 7년차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몸담았던 조직은 두 군데 뿐이었지만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그리고 유지하기 위해 수시로 입사지원서를 썼다. 컴퓨터 폴더 안에 빼곡히 들어찬 포지션 별 ‘자소설’중 몇 편은 독자를 감동시켰고, 나를 면접장에 데려다 주었다. 기관의 이름도, 면접관도 달랐지만 거의 매 면접마다 빠지지 않고 내게 던져졌던 질문은 이거였다.
기본적으로 이 질문은 쉴새 없이 몰아치는 업무를 어떻게 구분하고, 각각의 업무를 어떻게 처리해나가는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또다른 사분면을 그려야 했다.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만들었다는 아이젠하워의 업무 중요도 매트릭스(The Eisenhower Matrix)이다.
이 사분면의 X축에는 업무의 긴급성이, Y축에는 중요도가 표시된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 ‘시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일’, ‘시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 ‘시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라고 업무를 구분하고, 각각의 업무를 처리하는 방법 또한 조언했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당장 처리하고, '시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은 할지 말지를 결정하고, '시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은 누군가에게 맡기고, '시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은 소거하라는 그의 말은 언뜻 들으면 명확하고 확실한 진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직장에서 주어지는 일은 그렇게 명료하게 네 개의 박스 안에 구분되지 않는다. 시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에 대해 할지 말지, 하면 언제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 고민하는 사이 업무는 '시급함'을 향해 질주한다. ‘시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을 누군가에게 위임하려면 그 누군가가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고, 일의 프로토콜을 만든 후, 가르치고, 가르친 일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시급함’은 ‘중요함’에 비해 그나마 명료한 개념이다. 마감일에 가까울수록 일이 시급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니까. 글도, 과제도, 보고서도 내가 쓰는게 아니라 ‘마감이’가 쓰는 거라는 웃픈 농담은 여기서 비롯된다. 업무의 ‘중요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그 업무를 거쳐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 일터에서의 스트레스를 더한다.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든, 만 명 이상이 근무하는 글로벌 조직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손만을 거치는 업무는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업무를 전달받아 처리하고, 다시 누군가에게 넘겨준다.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을 테니스 경기에 비유해 "ball in my court"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코트에 공이 넘어오면 나는 재빨리 움직여 그 공을 받아쳐야 한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이메일 수신함에 쌓이는 이메일을 빠르게 스캔하고, ‘누가’ 처리할 일인지, ‘언제까지’ 처리해야 하는지를 파악하고 적절한 멘트와 함께 타인의 코트로 그 이메일을 넘겨주는 것이 이 시대 많은 직장인이 하고 있는 일이다.
면접 단골질문인 우선순위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 내가 준비했던 예상 답변 중 면접관을 흐뭇하게 만들었던 대답은 이거였다.
물론, 일터에서의 내가 이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며 사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말해야겠지만, 이런 마음가짐과 내 업무 처리 방식을 ‘동기화’ 시키기 위해 깨알같은 노력들을 한다.
주기별로 업무를 시작하고 끝내기 전 내 앞에 놓인 업무들을 훑어본 후 나름의 라벨을 붙여놓기도 하고, 너무 많은 업무가 쌓이면 새 일이 주어지기 전 ‘집중 업무 처리 시간’을 가져야 겠다고 동료 직원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기도 한다.
마감 기한이 명확하지 않은 일은 담당직원에게 물어보고 주기적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이 경우 업무 캘린더에 리마인더를 설정해두기도 한다. 이 모든 노력이 내게 응답해 계획한대로 말끔한 하루를 보냈다고, 스스로에게 '엄지 척'을 내밀며 만족스럽게 업무를 종료하면 좋겠지만 거의 매일 한숨을 푹 내쉬며, 무거운 몸과 마음을 안고 돌아서기 일쑤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쌓여있는데, 누군가 와서 (내가 보기엔)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즉시' 처리해 달라며 떼를 쓰거나, 자기 업무를 묵혀뒀다가 시급하지 않았던 업무에 ‘긴급’딱지를 붙여서 타인의 영역에 던져놓고 가는 사람을 보면, '에라 모르겠다'를 외치며 마냥 게을러지고 싶다.
업무와 조직구성원의 사분면이 쓸모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업무도, 사람도 잘 파악해두면 나도 '똑게' 직장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업무 자존감이 뿜뿜하고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분면의 틀에 사람도, 일도 영원히 머물러 있지는 않다는 사실 또한 기억했으면 한다.
‘멍게’가 사라져 버린 조직에서 모두가 ‘중요하고 시급한’ 일을 한다고 해서 생존을 보장받는 건 아니니까.
* 황진영
미국 수도에 있는 한 국제기구에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우리’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공저 <세상의 모든 청년>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