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 등장하는 엄마의 모습이 조금씩 다양해진다고 느끼고 있다. <나의 해방일지>의 삼남매 엄마는 아내, 엄마로서만 살다가 결국 밥을 앉혀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의 엄마들은 ‘못 배운 것’이 집안에 머물게 된 주요 이유다. 이런 엄마들은 ‘나처럼 살지 말라’며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자랄 때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열심히 달렸다. 의대에 입학했지만, 엄마가 되는 순간 수련의 과정을 포기해야 했던 <닥터 차정숙>을 보면, ‘공부는 해서 뭐하겠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엄마’라는 단어와 어울려보이지 않는 직업들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도 쏟아져 나온다. 킬러가 직업인 엄마도 아이의 밥을 챙기고 공부를 봐준다. 심지어 싱글맘이다. 엄마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혼자 남겨진 아이의 불만, 그로 인한 모녀 간 갈등이 주요 서사가 된다. 여성이 주인공인, 그것도 엄마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이렇게나 많은데도 마음이 개운치 않다.
돌이켜보면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어쩌다보니 결혼을 했고, 또 어쩌다보니 아이가 우리 삶에 들어왔다. 나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였을까,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변한 내 몸이, 훅 떨어진 체력이, 늘어난 책임감의 무게가 부담스럽고 벗어나고만 싶었다. “어머! 아이가 있으시다고요?” 라는 감탄섞인 소리를 듣는 ‘이모같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가 만 열 한 살이 되었다. 지난 10년간의 육아가 체력전이었다면, 아이가 대학에 가기 전까지의 약 10년은 심리전이 될 것 같다. 그저 존재자체만으로 매일 기쁨을 가져다 주었던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나는 자꾸 무언가를 요구하게 된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선생님께 연락오는 일이 없기를, 과제를 놓치지 않기를, 그래픽 노블보다는 제대로 된 책을 많이 읽기를, 소멸되어가는 한국어를 스스로 되살리기를,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다른 아시안 엄마들처럼 ‘타이거 맘’이라 불리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쓰앵님”이 실력을 갈고 닦았다는 페어팩스 카운티에 살게 된지 약 2년이 되었다. 소문으로는 진짜로 그런 “쓰앵님”이 존재하기도 한다고 한다. 엄마 대신 아이의 학습 진도를 챙기고, 목표대학으로 향하는 확실한 포트폴리오를 짠 후 아이의 잠재력을 한껏 끌어올려 원하는 대학에 입학시켜주는, 그런 “쓰앵님” 말이다. 드라마를 보며 가장 두려움에 떨었던 부분은 아이가 공부를 해야 할 동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 ‘나를 이렇게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엄마’에 대한 복수심을 한껏 끌어올리는 ‘쓰앵님’의 섬뜩한 표정이 스쳐지나가는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공부따윈 중요하지 않으니 여행과 책으로 견문을 넓혀주는’ 이상적인 엄마가 될 자신은 없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동안 ‘학부모’로서의 역할을 아예 등한시 할 수는 없으니까. 아이가 조금 더 좋은 학교에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아예 없는 척 하기도 어렵다. 성적 줄 세우기가 비인간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남들보다 조금 더 앞섰던 알량한 성적이라는 것이 나와 남편에게 가져다 준 기회는 생각보다 컸으니까. 아이가 공부 말고 몰두할 수 있는 무언가를 아직 찾지도 못했으니까.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얼마만큼의 균형’을 유지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엄마의 판단은 틀릴 수 있다. 드라마 <나쁜 엄마>의 엄마는 아이가 공부를 잘 해서 판검사가 되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힘을 갖게 될 것이고, 그러면 누군가에게 짓밟혔던 부모의 삶을 되풀이하지 않을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아이가 해야 할 일은 ‘공부’로 국한하고, 엄마의 역할은 아이의 성적을 탑권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축소했다. 엄마의 바람대로 검사가 된 아들은 엄마의 해묵은 소원인 아빠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삶을 복수로 차곡차곡 채워간다. 엄마가 ‘시키는대로’ 했는대도 기대만큼의 행복이 따라오지 않는 자신의 삶에 분노하는 아들을 보며 마음이 씁쓸해졌다.
아이가 자랄수록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결심은 마음 속에서 떠내려간지 오래다. 그렇다고 ‘나쁜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다. 아이가 곤란을 겪었을 때 아이보다 본인의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다. 아이가 속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며 귀를 닫는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다. 아이가 경기에서 1등을 하고, 좋은 학교에 잊학 했을때만 조건적으로 사랑을 개방하는 엄마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미운 일곱 살’ 시기의 아이와 크게 말싸움을 한 적이 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아마도 식사후 이를 닦지 않았다거나, 빨래를 빨래 바구니에 넣지 않고 욕실 바닥에 널어놓았을 게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아이에 대한 불만은 곧이어 ‘이렇게 말도 안듣는 너를 엄마가 왜 사랑해야 하느냐’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의 유치한 대사였지만, 그때는 진심이었다. 아이가 내게 “엄마는 내 엄마니까!” 라고 소리치기 전까지. 이상하게도 아이의 그 말을 들은 이후엔 아이와의 유치한 싸움을 계속할 마음이 사라졌다. ‘아 맞다, 나는 엄만데, 아이를 사랑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지?’라며 뼈저리게 반성을 했다. 물론 그 뒤로도 아이와 투닥거리며 말다툼을 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어떤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 아이의 할 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 한다.
원래부터 알던 친구들이 엄마가 되어 아이를 데리고 만나면 엄마 되기가 이렇게 힘든 줄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냐고 넋두리를 늘어놓게 된다. 한쪽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것들, 나중에 엄마가 고생고생 해서 키운 걸 알까?’ 라며 어릴 때 엄마에게 한번쯤 들어봤을 것 같은 부채의식 발동의 멘트를 듣고 있노라면 웃음이 픽 하고 나오곤 한다. 농담 삼아 ‘호강은 됐고, 우리 부부 노후에 먹구름이나 안 드리웠음 좋겠다고, 우리도 아이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는 ‘각자도생 육아론’을 설파하기도 한다. ‘너는 너, 나는 나’의 마인드라기보다는 부모의 역할은 결국 아이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게 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프롬은 이런 상태를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명한다. 물리적으로 함께하지 않아도 아이의 마음속에 어머니다운, 아버지 다운 양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결국 오늘도 어떤 엄마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이런 고민을 매일 풀어놓는 내게 육아 선배이자 커리어 선배님이 해준 말을 새겨보기로 한다.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너무 나를 몰아세우지도 ‘나쁜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발버둥치지도 않은, ‘이만하면 썩 괜찮은 엄마’를 목표로 삼아보자고.
하루에도 몇번씩 ‘우주최강베스트엄마’와 ‘나쁜 엄마’를 오가는 내게, 현실적인 목표가 생긴 셈이다. “엄마 정도면 괜찮지 뭐” 라는 말을 들어도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다.
* 황진영
미국 수도에 있는 한 국제기구에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우리’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공저 <세상의 모든 청년>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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