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일상다반사

마법 같이, 마법 처럼_마이 디어 프렌즈(1)_아일랜드 일상다반사_도윤

나에게 친구들이 생겼다.

2024.09.27 | 조회 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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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ghal beach, County Cork, Walter Verling (oil on panel)
Youghal beach, County Cork, Walter Verling (oil on panel)

남편 말고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결혼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했던 결혼은,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아일랜드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주말마다 시댁 어른들을 찾아뵙고 함께 식사를 할 때면, 시아버지께서는 늘 내게 같은 질문을 하셨다. “혼자 집에 있으면 하루가 너무 길다고 느껴지지 않니?” 애잔함으로 가득 한 그분의 푸른 눈빛이 가끔 나에게 찾아왔던 일상의 지루함과 낯선 곳에서의 어색함을 꿰뚫어 보시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버님의 그 질문 자체가 나에게 꽤나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아침 바닷가 산책

운전도 하지 않고, 출근할 곳도 없는 내가 부지런히 집밖으로 나갔던 이유는 매일 오전 10시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름도 바닷가(strand) 성당'인 그곳에서 30분 정도의 미사가 끝나고 나면 나는 이 작은 동네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흐린 날이 더 많은 아일랜드에서 모처럼 맑게 갠 날이면, 오염 없이 깨끗한 환경 탓에 푸르디푸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내 얼굴은 금세 그을리기 마련이었다. 또 어느 날은 쏟아지는 햇살과 그 빛에 반짝이는 바다의 윤슬이 합쳐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마치 럭셔리한 여름휴가지에 온 것과 같은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는데, 그 순간에 유럽여행을 처음으로 떠났을 때 느꼈던 그 설렘이 떠오르기도 했었다.

어느 햇빛 반짝이던 날

그날도 어김없이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작은 오르막길을 오르다 저 멀리 대서양 바다의 수평선이 한눈에 보이는 오래된 등대 옆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세찬 바닷바람에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흩날렸지만 내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아일랜드는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각인데, 한국은 이미 오후 8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한국의 가족들이 몹시 그리워졌다. 또 길 따라 늘어선 돌 벽의 이름 모를 노란 꽃들을 발견하고는 바람이 이렇게 세차게 부는데도 잘도 매달려 피어 있구나.”라며 혼잣말을 하면서 나도 저 꽃들처럼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꿋꿋하게 잘 이겨내며 살아야지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해 보기도 했다. 그날 역시 나는 급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의 시간을 그렇게 혼자서 보내고 있었다.

그 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Hello. How are you? 미사 시간에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이 동네에 새로 이사 왔나요?”

나는 허리를 일으켜 말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에는 체크무늬 외투를 입고 파이프 담배를 물고 계신 백발의 신사 한 분이 서 계셨다.

. 저는 결혼을 해서 1월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어요.”

어떻게 아일랜드의 이 작은 마을에 와서 살게 된 것이죠?”

저는 한국에서 왔고, 아일랜드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했어요. 그 사람의 고향은 바로 옆 동네지만, 남편이 타운에 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해서 이곳에서 살고 있어요.”

! 그렇군요. 아일랜드에 온 것을 환영해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첫 만남

그다음날도 어김없이 아침 미사에 참석했다. 미사를 마치고 잠시 제자리에서 기도를 드리고 일어나려는데, 은발의 두 숙녀분이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어제 월터가 당신을 만났다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당신에게 가서 말을 걸어보라고 했어요. 내 이름은 마가렛이고, 여기 내 친구는 앤이에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레지나예요.” (한국 이름보다 세례명이 발음하기 더 쉬울 것 같아 레지나라고 나를 소개했다)

우리는 매일 미사를 마치고 동네 커피숍에서 차를 마셔요. 괜찮다면 오늘 우리와 함께 차 한 잔 같이 마실래요?”

두 분은 내게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성당에서 만난 분들이라 경계심이 덜 했고, 무엇보다 친절하고 우아한 그분들의 말투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흔쾌히 같이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마가렛이 운전하는 은색 혼다 자동차를 타고 ‘Red Store'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두 분은 실내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햇볕이 잘 드는 야외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나는 어제 만난 신사 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그녀들의 뒤를 따라갔는데, 예상치 못하게 그 자리에는 7-8명이나 되는 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Red Store_picture by Trip advisor
Red Store_picture by Trip advisor

월터가 나를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 보이셨다. 분명 어제 겨우 몇 분 정도의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지만 어느새 친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자리에 앉자 마가렛이 내게 물었다.

나는 라떼와 스콘을 먹을 거예요. 레지나는 무엇을 먹을래요?”

저도 같은 것으로 먹겠습니다.”

일행들은 이미 음식을 먹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빠르게 주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메뉴판도 보지 않고 마가렛과 같은 것을 주문하겠다고 말했다.

주문을 마치자 월터는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분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름은 레지나이고, 아이리시 남편이 있고 결혼해서 이제 막 아일랜드에 왔노라고. 그 자리에는 앤의 남편 제리와 젊은 나이에 독일에서 아일랜드로 온 헬렌과 남편의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피터와 그의 아내 메리가 있었다. 그날 나는 긴장을 해서인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까페라떼만큼이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분들의 눈빛과 목소리가 그리고 스콘 위에 올려진 크림과 라즈베리 잼만큼이나 달콤하고 경쾌하게 웃으며 나눴던 대화의 순간들이 사진처럼 남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 깊숙이 남아있다.

Cream Tea, Image Source: Shane Global
Cream Tea, Image Source: Shane Global

그날 앤은 나에게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니 내가 차와 스콘을 사 주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서야 나이 든 분이 이렇게 돈을 내주는 것이 흔한 편이지만, 유럽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대신해서 돈을 내 주는 일이 흔한 것이 아니고 또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당연히 어른이 돈을 내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10여 년을 살고 보니 더 잘 알게 되면서 이따금 그날 앤이 나에게 베풀어 준 호의가 더욱 고맙게 느껴지곤 한다.

그날 이후 나는 그분들과 친구가 되었다.

미사를 마치면 그분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오전을 보냈다. 토요일 미사가 끝난 다음에는 가끔 그분들의 자녀들을 함께 만날 수 있었고, 나도 남편을 소개하거나 때로 한국에서 가족들이 아일랜드를 방문하면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에 가서 내 가족들을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또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마법과 같은 순간

월터가 나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그 순간,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나를 받아들여주고 조건 없이 호의를 베풀어 주는 그 순간은 마치 마법과 같은 순간이었다. 나 역시 누군가 조건 없이 베푸는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마음을 열었기에 아무런 수고 없이 저렇듯 많은 친구를 얻을 수 있는 마법과 같은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나에게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어도 그것을 호의로 대갚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인생의 경험이 많은 현명한 친구들을 만나고 난 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꿔 먹기로 했다. 


아일랜드 일상다반사

아일랜드 사람 아빠와 한국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한 명과 아일랜드 시골 마을에서 살면서 겪고 있는 일상 이야기들입니다.

도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만난 아일랜드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올 해로 10년째 아일랜드에서 타향살이를 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브런치 : http://brunch.co.kr/@regina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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