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도 잘 지내고 계시지요? 크레타에서 크레타에게 메시지 보냅니다!”
크레타에서 세 시즌 동안 독서와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던 참가자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그는 간단한 안부 인사와 함께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나는 한동안 그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 속 장소는 사랑하는 아내와 신혼여행을 갔던 곳이자 지금 운영하는 서점의 이름의 영감을 안겨 준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더 나은 수업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매력적인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뉴스에는 교권 침해와 관련된 기사가 몇 년 전부터 반복해서 등장했다. 교사를 제대로 보호하고 지켜주지 않는 교육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의 자부심에도 균열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마음에 생긴 균열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잊고 있었던 마음속 균열이 손가락 끝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자부심을 지켜낼 것인지, 잠시 교단에서 내려와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볼 것인지, 우리는 함께 글을 쓰며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고 나눴다. 결국 휴직을 진지하게 선택지로 올린 그에게 모두가 한마음으로 응원과 지지를 보냈다. 이후 새로 시작하는 독서모임 시즌에 신청하지 않아 새학기 준비로 많이 바쁜가 싶었는데, 결국 휴직을 하고 유럽으로 어학연수를 떠난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내어 그리스 여행 도중 크레타섬에 들렸고, 카잔자키스의 무덤으로 향했다.
그가 보내준 사진 속 모습은 내 기억과는 조금 달랐다. 보수공사 때문인지 흐린 날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무 십자가의 색깔은 더욱 진해졌고, 묘비석에 새겨진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비문은 훨씬 선명했다. 여행은 언제부터 시작한 것인지,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는지, 앞으로의 여정은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등 별다른 말을 더 나누지 않았다. 사진 한 장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10년 전 조르바가 나를 그곳까지 이끌었듯이, 그 또한 조르바의 부름에 응답했다.
근래에 크레타와 함께하면서 크고 작은 변화를 경험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극내향인 이라 낯선 사람과 얘기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있었는데 독서모임을 통해 조금씩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자신감이 생겼다는 사람, 크레타에서 개최되는 작가와의 만남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작가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확신하게 된 사람,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돈만 생각하며 하고 있었는데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 갭이어를 선택했다는 사람 등 크고 작은 다양한 변화의 경험을 내게 들려준다.
이런 현상이 조금은 낯설지만 특별하게 느껴진다. 과거 독서모임 커뮤니티를 10년 넘게 운영할 때와 지금 서점을 운영하면서 하는 일은 독서모임을 꾸리고 작가와의 만남을 개최하는 등 큰 차이가 없다. 모임의 규모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과거에는 들리지 않던 이야기가, 왜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반복해서 듣게 되는지 궁금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 질문을 부여잡고 열심히 답을 찾던 중 한 참가자가 내게 건낸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동훈님, 서점은 수많은 이야기로 가득한 이야기의 집인 것 같아요. 서재에 꽂혀있는 책을 보고 있으면, 언젠가 나의 이야기도 저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어요.”
서점은 이야기의 집이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에는 다양한 성공의 조건과 실패의 경험,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기애의 중요성, 일상의 특별함과 삶의 유한함 등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야기는 힘이 세다’라는 말처럼 어떤 하나의 매력적인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추종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파생시킨다. 카페에서, 스터디룸에서 모임을 하던 과거와 달리, 서점에서 모임을 하고 작가를 만나는 경험은 참가자도 자연스레 자기 이야기의 방을 찾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의 집을 꾸려나가는 책방지기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아직 일생의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로 만들지 못한 이가 있다면 잘 편집을 할 수 있게 돕는 책을 권하는 것, 이야기를 새롭게 편집하고 점검하는 과정에서 지금이, 지금이 현재가, 자기 인생이라는 이야기에서 어떤 부분에 와있는지 확인하고 점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지속해서 새로운 책을 발견하고 추천하는 역할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정혜윤 PD가 쓴 <삶의 발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 이야기 참 좋다.” 이 말의 힘을 나는 백 퍼센트 믿는다. 이야기가 좋으면 나도 모르게 감탄하면서 마음이 환해진다. 감탄할 때 현실이 달리 보였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란 게 분명 존재한다고 느껴졌고, 사는 것이 더 재미있어지고 더 좋아지고 내가 뭘 해야 할지도 알 것 같았다. 그때는 세상은 따라 해야 할 일투성이로 보였고 세상 또한 사랑할 만한 것으로 보였다. 감탄 속에 있을 때 나는 잘살고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왜 사는지 잘 모르겠다.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여행을 마친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의 삶에는 어떤 이야기가 흐를까. 자유로운 인간 조르바의 기운을 받아 경직된 조직문화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하게 될까, 아니면 조직 속에서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려 새로운 길을 모색해나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분명 떠나기 전보다는 한층 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매력적인 이야기가 되어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멀지 않은 시기에 그의 이야기를 크레타에서 들어보고 싶다. 그 이야기 참 좋겠지?
* 사유와 자유의 시간
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과 사람이 만나 펼쳐지는 소소하지만 진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 글쓴이 - 강동훈
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인이 꿈이자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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