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번역기의 등장
보통 새해 결심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 운동, 독서, 영어 공부입니다. 그중에 영어는 평생의 숙제라고 할 만큼 효과를 보기도 쉽지 않고, 평생 해야 하는 과업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챗GPT와 같은 AI 챗봇, 딥엘DeepL과 같은 인공지능(이하 AI) 번역기의 등장은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영어 알파벳을 중학교 때 배우고, 서른 살 중반에 미국에 온 영어 구세대인 저에게 매일 영어 이메일을 써야 하는 건 곤욕입니다. 이런 저에게 딥엘의 등장은 저 같은 외국인 노동자에겐 단비와 같았습니다. 고민하지 않고, 한글로 고민 없이 적으면 뛰어난 번역을 해주고, 번역된 영어를 DeepL Write에 넣으면 영어답게 수정까지 해주니까요. 딥엘을 사용하면서 유료로 월$12불씩 내며 사용하던 영어 문법 검사, 글쓰기 서비스인 그래머리Grammarly를 해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지과학자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인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아랫글을 읽고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AI 번역의 시대, 더 늦기 전에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
그는 모국어인 영어를 제외하고 일곱 개 언어(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스웨덴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중국어)에 수천 시간을 투자하며 다양한 언어를 배웠으니 글이 신뢰가 갔습니다. AI의 발달과 AI 번역기의 등장으로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될까 기대하셨던 분에게는 실망스럽게도 그는 더 늦기 전에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시점은 AI가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하기 전입니다. 제가 살아서 특이점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발전 속도를 봐서는 향후 100년 안에는 도달하리라 추측해 봅니다.
왜 외국어를 배워야 하나?
그렇다면, 왜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지 그의 주장과 함께 제 생각을 적어봅니다.
첫째, 언어는 문화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문자나 소리 그 자체를 배우는 것을 넘어서, 그 나라의 문화, 생활양식, 사고방식 등도 같이 배우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영어를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유창하게 잘해도, 미국 문화를 모르고서는 숨은 진의를 깨닫지 못하거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힘듭니다. 또한, 이젠 국제 공용어라 할 수 있는 영어는 나라마다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각 나라별로 어감이 다를 수 있습니다.
둘째, 언어는 나를 드러낸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인간다움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말할 때, 나는 사실뿐만 아니라 존재의 양식을 전달하죠. 단어 선택과 미묘한 억양, 작은 망설임, 익살스러운 말장난, 어리석은 실수 등을 통해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에서는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인간과 소통합니다. 과학자인 이안 도넬리(제레미 레너 분)는 언어학 전문가 루이스 뱅크스 박사(에이미 아담스 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의 사고는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형성된다는 학설(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 있는데, 그렇다면 “외계인들의 문자를 배우고 있는 루이스도 그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집니다.
사피어-워프 가설과 이를 입증하는 증거에 대해 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이 있었고, 현재는 가설로 남아 있는 상태이며 다음의 말은 현재 학계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사피어-워프 가설에 대한 가장 타당한 주장은 이 가설이 기본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피어-워프 가설을 전적으로 수용하지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거부하지도 않는다.”
— 맥코맥, (1997:4)
한국어와 영어를 같이 사용하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얘기하자면 이렇습니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사용할 때 저는 차분해지고 조용해지고 말을 덜 하게 되고, 좀 더 감상적으로 됩니다. 영어를 사용하면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격해지고 빨리 말하게 되고, 좀 더 이성적인 느낌으로 말하게 됩니다. 한국어와 영어의 언어적인 특성이 다르게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같은 ‘나’라도 나의 다른 면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셋째, 언어를 배우는 것은 과정이다.
한국어 원어민인 저도 한국어를 계속 배웁니다. 미국에 사는 저는 한국에서 새로 나온 신조어나 신세대가 사용하는 유행어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평생의 과정이지 뭔가가 완성되는 결과물이 아닙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예로 들었듯이, 우리가 헬리콥터를 타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착하면, 걸어서 힘겹게 등반해서 정상에 도착한 나와 같을까요? 당연히 같을 수가 없습니다. 헬기를 타고 쉽게 정상에 도착하면 나의 기량은 전혀 향상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을 옮기고 인내하며 도달하면 그 과정에서 나의 등반 능력은 향상됩니다.
제가 ‘OO 외에는 중요한 것이 없다는 듯이’라는 글에서 인용한 <제텔카스텐>(숀케 아렌스 저, 김수진 역)의 아래 한 대목처럼,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다른 지적 기량이 향상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절대 원고 한 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더라도, 모든 일을 마치 글쓰기 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는 듯이 대하는 것만으로도 독서법, 사고방식, 그리고 그 외 다른 지적 기량skill도 모두 향상될 것이다.”
AI로 외국어 능력 향상하기
제 SNS 포스팅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AI 시대 철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들뢰즈’의 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들뢰즈의 철학에 나오는 용어는 처음 들어본 단어도 많고 그 의미도 난해한데 챗GPT나 클로드에게 물어보며 책을 읽으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어 같은 외국어를 습득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AI 툴을 적극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먼저 영어 작문을 하면, 저 스스로 생각해서 만들어봅니다. 이걸 DeepL Write로 넣어서 확인해 보거나, 챗GPT나 클로드와 같은 챗봇에 영어 원어민의 관점에서 다시 적어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같은 의미도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모르는 표현이나 숙어를 던져주고 영어 원어민이 사용하는 예제 문장을 만들어달라고 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주도적으로 배움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때는 그냥 읽지 말고, 감명 깊은 구절을 하이라이트하고 메모하며 읽고, 외국어를 배울 때는 학원 강사에 의지하지 않고 내가 주도적으로 습득하는 것이죠. 이렇게 내가 주인이 되는 ‘마인드셋’을 가지면 외국어뿐만 아니라, 다른 기량도 향상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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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및 출처
사피어-워프 가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컨택트 - 나무위키
[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49> 언어는 생각의 감옥인가?-사피어·워프 가설에 대하여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AI 번역의 시대, 더 늦기 전에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 - P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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