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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계절이 돌아왔어요. 이브는 내 큰 시아버지의 이름이에요. 그가 오랜 세월 서서히 잃어버린 본명은 이을마즈지요. 이름의 의미는 굽힐 줄 모르는 자.
파리에 사는 이브 씨는 1948년생으로, 올해 일흔여덟 세에요. 새하얀 머리와 수염을 도사처럼 기른 그는 그 연세에도 매우 잘생겼고, 패션 센스도 남다르지요. 스케이트보드 타는 소년들처럼 다 떨어진 보드화에 멜빵바지나 빵모자 등 고전적 아이템을 즐겨 매치하고, 올려 신은 양말의 길이는 언제 봐도 완벽해요. 홀로 사는 이브 씨는 도스트라는 체코슬로바키아 늑대개를 키워요. 세 살 된 수컷이지요. 도스트를 데려오기 이전에는 튀르키예 초대형 토종견 캉갈을 두 마리, 또 도베르만을 키우셨대요.
시장에서 수공예품을 파는 그는 매년 유월이면 파리를 떠나요. 메르세데스 비토 뒤 칸에 도스트를 태워서요. 그가 해마다 달리는 경로는 이러해요. 먼저 파리에서 리옹까지 운전해 친구 집에서 하루 묵어요. 익일에는 이탈리아 토리노와 볼로냐를 지나 안코나까지 가서 그리스 이고메니차로 넘어가는 밤 페리를 타지요. 다음날에는 테살로니키, 카발라를 지나 튀르키예 테킬다으를 거쳐 이스탄불에 저녁 느지막이 도착해요. 동생과 조카 들을 만나 하루 휴식한 후, 다시 열 시간을 남쪽으로 달려 에게해 닷차까지 넘어가지요. 석 달 후에는 이 길을 되돌아 다시 파리로 향하고요. 이 대장정 동안 이브 씨가 의존하는 것은 에스프레소와 종이 지도 한 장, 먼지를 뒤집어쓴 CD들이에요. 수십 년간 그는 책으로 된 지도를 보다가 코로나 시대에 들어서야 새 지도를 장만했지요. 그는 조카들에게 이런 요구를 했대요. 체코슬로바키아가 분리된 지도를 좀 사다 줄 수 있겠니? 그 동네 지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헷갈려서 말이야.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나뉜 지 거의 서른 해나 지난 후의 일이었지요.





맞아요. 내가 여덟 달 동안 닷차에 가 지낼 수 있었던 건 그의 덕이에요. 이브 씨의 여름 별장이 거기 있거든요. 닷차는 불과 삼 년 전, 길이 새로 뚫리기 전까지 도달하기 매우 어려운 외딴 마을이었어요. 그 때문에 예부터 히피들의 안식처로 소문났지요. 이브 씨는 가끔 고국에 방문할 때면 닷차를 찾았어요. 그곳의 대자연과 자유로움에 반한 그는, 프랑스 히피 친구들을 데려와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지요. 튀르키예에는 집 한 채가 요즘 자동차 한 대 값과 비등비등하던 때가 있었어요. 노후 대책이라곤 전혀 없던 이브 씨를 위해, 형제들은 유산을 모아 닷차에 작은 별장을 하나 사두었어요. 아직 체력이 남아 있을 때, 자녀들이 어렸을 때, 형제들도 그 별장에 가 여름을 나기도 했다지만, 이제는 가족 누구도 머나먼 그 에게해 마을을 찾지 않아요. 이브 씨가 파리 월셋집에서 지내는 동안 에게해 별장은 텅 비어 있지요. 독일을 막 떠난 나와 남편에게 이 별장만큼 유용한 곳이 없었어요. 우리는 갈 곳도 돈도 없었거든요. 이브 씨의 별장에 가 지내며 삶을 재정비하겠노라, 나는 결심했지요. 정작 재정비한 것은 우리 삶보다 이브 씨의 세간살이였지만요. 석 달간은 이브 씨의 어마어마한 고물을 버리는 데 힘을 다 썼어요. 다 녹슨 선탠 의자 세 개, 육중한 철제 대문, 서핑 보드, 플라스틱 의자, 부서진 바을라마, 습기로 부식한 욕실 문짝, 출처를 알 수 없는 항아리, 몇 킬로나 되는 조개와 고동···. 집이 좀 비워지고 나니 고장 난 곳들이 보이기 시작했지요. 매일 할 일이 새로 생겨났어요. 방수 처리, 페인트칠, 타일 교체, 변기 수리, 지하수 파이프 교체···.

이브, 아니 잠깐이라도 잠자는 그의 튀르키예 이름을 소환해 보죠. 이을마즈. 이을마즈 씨는 오스만 제국 말기, 북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이주해 온 압둘라흐와 멜리핫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이스탄불에서 나고 자란 발칸 이민자 1.5세였지요. 압둘라흐 할아버지는 이스탄불에 정착한 후 유럽 지구 파흐티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했어요. 유복하게 자라지는 못했지만 총명했던 장남 이을마즈는 이스탄불 최고 명문 공립고,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에 진학해요. 갈라타사라이는 공립임에도 프랑스식 교육을 시행하는 학교로 알려져 있어요. 나도 이 나라에 와서 놀랐던 사실인데, 튀르키예의 상당수 명문고는 선교사들에 의해 지어졌거나 서구식 교육 체계를 따라요. 고등학교라는 명칭 자체부터 불어 단어 ‘리세’를 사용하지요. 경쟁률이 가장 센 고교들의 이름을 나열해 보자면 생 조세프, 생 브누아, 로버트 칼리지, 노트르담 드 시옹··· 벌써 서구 냄새를 풀풀 풍기지 않나요? 처음에 나는 이 학교들이 쌘뽈여고나 배재고 같은 미션 스쿨일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 학교들을 졸업한 친구들 이야기를 듣자 하니 놀라웠어요. 외국어를 가르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해당 국가의 교과서를 가져다 수업을 진행하는가 하면, 국어 시간만 빼고는 수학, 지리, 물리, 화학, 심지어는 음악이나 미술 등 전과목을 불어, 영어, 독어로만 가르쳤대요. 그러니까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완전히 프랑스나 미국, 독일식 사고를 해야 했겠지요. 아, 갈라타사라이 나오셨어요? 프랑코폰francophone인줄은 몰랐네요. 이런 대화가 자주 오가는 걸 튀르키예인들 사이에서 종종 들을 수 있어요. 불어나 독어가 앞으로는 얼마나 유용할는지 미지수지만, 이 언어들을 유창하게 구사함은 전통적으로 튀르키예 지식인들에게 요구되었던 필수 덕목이었던 듯 해요.
이 서구 교육 체계에 대한 신봉은 사실 탄지마트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탄지마트는 메이지 유신이나 갑오개혁보다 약간 일렀던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개혁 시기를 일컫지요. 국력을 잃어가던 오스만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차례로 패배하고, 패인을 서구에 비해 뒤떨어진 기술과 제도, 교육 방식에서 찾아요. 탄지마트 시대의 핵심 관료였던 푸아드 파샤는 이런 말을 남기지요. 망하지 않으려면 영국만큼 부유해지고, 프랑스만큼 계몽되고, 러시아만큼 군사력을 키우는 방법밖에 없다. 이후 20세기 초 등장한 급진 개혁파, 청년 튀르크 운동을 이끈 통일진보위원회에 의해 교육 제도는 더욱 공고히 서구적 선로를 따르게 되어요. 영턱스Young Turks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 단체는 나폴레옹식 중앙집권 국가를 선망했어요. 거기에 사회가 과학적으로 설계될 수 있다는 콩트의 실증주의나 뒤르켐의 사회 통합적 교육관에 영향받지요. 튀르키예에는 알라투르카alaturka, 알라프랑가alafranga라는 표현이 있어요. 각각 이탈리아어로 ‘터키식’, ‘유럽식’이라는 뜻이지요. 마치 조선간장과 왜간장처럼 튀르키예식 식품, 복장, 음악의 대척점에는 유럽식 알라프랑가가 똬리를 틀고 있어요. 여담이지만 재래식 변기를 알라투르카, 양변기를 알라프랑가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오스만 말기 문학에는 알라투르카와 알라프랑가 사이에서 갈등하는 서사가 단골로 등장해요. 그러나 적어도 교육적인 측면에 있어 알라프랑가 제도에 반기를 드는 이들은 소수였어요. 이후 아타튀르크는 종교에 기반한 교육시설 메드레세를 아예 폐지하지요. 청년 튀르크당에서 아타튀르크로 이어진 교육 혁신의 산실로, 알라투르카의 동그란 윤곽은 알라프랑가의 윤곽과 겹쳐지고 있었어요. 마치 개기일식이라도 일어나듯.
밤하늘에 전운이 두 차례 드리웠다가 천둥을 내리고 지나요. 날이 다시 밝았을 때 세상은 예전 같지 않았어요. 콩트와 뒤르켐의 나라는 해묵은 이론에 스스로 돌을 던지고, 사르트르와 푸코, 들뢰즈 등 신예 사상가들이 떠올라요. 이 시기 갈라타사라이 고교 2학년이던 이을마즈는 관광 안내소에 이력서를 넣어요.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을 살려 가이드로 일하기 시작한 거지요. 그는 모스크, 물담배, 수피 춤에 현혹된 프랑스인들에게 오리엔탈리즘을 예쁘게 포장해 판매하고, 대신 그들이 남기고 간 환상의 잔상을 가슴에 품어요. 세계를 뒤흔들기 시작한 68 운동 정신에 경도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겹쳐진 해와 달, 그 포개진 동그라미에서 그는 이제 벗어나고 싶어요. 조국의 개화가들이 복제한 알라프랑가 교육이 더 이상 시대에 부합하지 않다고 느껴요. 달이 가린 태양의 진실을 그는 보고 싶어요. 어느 날 이을마즈는 관광객들을 따라 프랑스로 훌쩍 떠나요. 부모나 동생들에게 아무 기별도 없이요.




이을마즈가 이브가 되어 이스탄불에 돌아온 것은 삼 년이나 흐른 뒤였어요. 그는 파리에서 대학에 가보려고 했고, 뱅센 실험 대학에서 들뢰즈의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다지만 그토록 혼란한 시기, 외국인으로서 대학에 진학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대요. 그는 신문사에서 사진사로 일하기도 하고 통역사, 가이드, 레크리에이션 강사 등 임시직을 전전하며 히피로서의 삶을 이어갔어요. 그가 삼 년 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 키프로스에는 쿠데타가 일어났어요. 튀르키예는 이에 군사 개입했지요. 착한 이민자가 되고 싶었던 그의 아버지는 경찰에 전화를 걸어 말해요. 우리 아들이 군대를 안 갔소. 속히 잡아가시오. 제대한 이브 씨는 미끄러지듯 파리로 다시 돌아가요. 이번에는 프랑스 히피 여성을 만나 결혼하지요. 그러나 그는 군에 다녀온 사이 이 환상의 도시가 달라졌다고 느껴요. 경제가 눈에 띄게 나빠졌고 외국인 혐오증이 싹트고 있었지요. 달이 가린 진실이 실은 이것이었을까. 그는 의문하기 시작해요. 이 시기부터는 이브 씨의 삶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가 머잖아 이혼했고, 이후 여자 친구와 개가 몇 번 바뀌었다는 사실만을 간신히 파악할 수 있을 뿐.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이브 씨가 거울에서 본 것은 한 프랑스 노인이에요. 혁명의 이상에 젖은 젊은이, 프랑스 정신을 좇은 튀르키예인, 통념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지 않았던 히피. 그 모든 것이 겹쳐져 오히려 투명해진 육체가 서 있어요. 이제 그를 이을마즈라고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어요. 그가 모국어를 쓰는 상대는 오로지 그의 깡마른 늑대개, 도스트 뿐일테죠. 그가 거울에 대고 쉰 소리로 욕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알라프랑가로 튀어나오지요. 퓌텅.
이브 씨가 이번 주 아나톨리아에 왔어요. 바야흐로 그의 계절이 돌아온 거지요. 아마 지금쯤 바다 수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정어리 캔 하나를 뜯고 있을 터예요. 갱스부르의 곡을 틀어놓고 그가 좋아하는 푸이 퓌메 와인을 한 잔 따르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후 별장 거실 소파에 누워 14인치 텔레비전을 틀겠지요. 도스트가 산책을 나가자고 꼬리를 흔들며 조를 때까지요. 이브 씨는 벌써 시월 초에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페리 티켓을 샀어요. 나는 복잡한 이브 씨의 머릿속에 들어가 퓨즈 하나를 끊는 상상을 해요. 그로 인해 그가 파리로 돌아가지 않게 되면 좋겠다고, 자신의 수집품으로 둘러싸인 그 에게해 집에서 영영 머물면 좋겠다고 소원해요. 양변기라면 이제 이곳에도 얼마든지 있는 걸요.
이브 씨가 언젠가 알튼 귄의 앨범을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베를린에서 가장 큰 서점, 두스만에 딸린 레코드샵에서 알튼 귄 코너를 한참 뒤졌던 기억이 나요. 결국 사드렸던 음반은 <저녁gece>라는 앨범이었지요. 알튼 귄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한 손에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운전대를 돌리는 이브 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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