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티는 끝났어요. 그간 나는 새벽을 더 봤어요. 새벽에 더 깨어있었고, 새벽에 더 걸었고, 새벽에 더 말했지요. 베를린에서 학교에 다니며 뮤지션 에이전트로 일했을 적에는, 담당 아티스트의 퍼포먼스를 보느라 월요일 아침 여섯 시에 클럽으로 출근했다가 아홉 시에 수업에 들어간 적도 있어요. 이름에 새벽 신(晨)자가 들어간 네 죄라고, 친구들은 놀리곤 했지요. 지금은 새벽이라는 단어조차 새롭게 느껴지는군요. 이스탄불에서 나의 새벽은 갈매기와 밥그릇 놓고 싸우는 고양이들의 앙칼진 울음, 아스라한 아라베스크 음악, 눅진한 바닷바람으로 성글게 채워질 뿐. 그러나 고독 가운데서도 가끔은 사교 활동이 필요한 법이지요. 오늘은 최근 있었던 사건들을 당신께 보고드릴게요.
#아이리쉬 펍. 밤.
어느 전시 오프닝 뒤풀이였어요. 평일이었기에 자정 이전 술집은 한산해졌고, 흩어져 있던 마지막 인원은 결국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았어요. 끝까지 남도록 인이 밴 이들. 다들 꽤 취한 상태였지요. 이야기는 산들바람처럼 불어왔다가 물러서요. 방향은 계속해서 바뀌고요. 내 오른편에 앉은 것은 치과 의사 알페르였어요. 그는 아까 전시장에서 나이 든 정신과 전문의를 목격했어요. 알페르는 그 여자를 보자마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대요. 알페르는 치대 시절 피에로로 분장하고 어린이 생일잔치에서 묘기 부리는 아르바이트를 했대요. 그런데 그 의사 집에도 피에로 차림으로 갔던 거예요. 25년 만에 그 여자를 본 거야! 나는 피에로 분장한 젊은 알페르의 모습을 그려보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요. 내 왼쪽에 앉은 것은 갤러리 직원 도우칸이에요. 나는 도우칸이라는 이름을 좋아하는데, 도우는 동쪽, 칸은 군주라는 뜻으로 동방의 군주라는 의미를 갖지요. 도우와 동의 소리가 비슷해서인지, 나는 이 이름에서 묘한 친밀감을 느껴요. 피부가 투명하고 흰 도우칸은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며 늘 속삭이듯 우아하게 말해요. 조용한 그에게는 강단 있는 면모도 엿보여서, 어딘가에 비밀을 숨기고 있을 것만 같지요. 궁술에 뛰어나다던가, 남몰래 매를 조련한다던가. 도우칸은 요즘 머릿속에 구름이 빽빽이 끼어 있다고 털어놓아요.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요? 그 구름들을. 내가 물어요. 그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답해요. 조만간 비를 내려야겠지요. 도우칸의 명료한 답에 나는 조금 놀라요. 구름이 무거워지면 비가 되어 내려야 한다. 나는 그간 물리를 너무 경시해 왔는지 몰라요. 술잔 들이키는 속도가 느려진 튀르키예인들은 이제 내 근황을 궁금해해요. 내 구름은 뭐냐고요. 그들이 찾아낸 내 구름은 관등성명, 사담 후세인. 여기서 광고 감독인 바리쉬가 갑자기 끼어드는데, 이렇게 말해요. 네 말을 꿀로 끊어서 미안하지만··· 이 나라에서 끼어들 때 쓰는 관용구 중 하나에요. 꿀처럼 미끄덩거리며 끼어들게, 이런 의미를 담고 있나봐요. 이 관용구를 들을 때마다 목구멍에 꿀렁거리는 액체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해요. 꿀을 내세워 끼어든 바리쉬가 물어요. 분홍 편지를 아냐고요. 여기저기 피식거리는 웃음이 튀어나와요. 듣자 하니, 튀르키예에서는 동성애자임이 증명되면 병역을 면제받는대요. 그 증명이란 걸 어찌하냐고 묻자, 성행위를 담은 영상을 찍어 제출해야 한다지요. 구강성교는 안 되고요. 입증 과정을 거치면 이른바 ‘분홍 편지’가 날아온대요. 쿠틀루으 아타만이라는 예술가는 당국으로부터 받은 이 분홍 편지를 자신의 예술 작품에 활용했다지요. 분홍 편지에 쓰인 항목을 나열하던 취객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이제는 사담 후세인에게 공헌 된 구호를 기억하려 애써요. 뭐였지? 그 아랍어 구호 말야. 이 지역 사람들은 살면서 그 구호를 한 번쯤은 들어봤나 봐요. 모두 버벅거리는 가운데, 내 왼쪽에서 나지막한 구호가 들려와요. 비르루흐, 비드뎀, 네프디케 야 사담(Bir rûh, bid-dem, nefdîke yâ Saddam). 구호를 완벽히 두 번 제창한 도우칸은 만족스럽다는 듯 맥주를 들이켜요. 뜻은 이러해요. 목숨과 피를 바쳐 당신을 위해 희생하겠습니다, 사담. 도우칸, 그는 비밀을 숨기고 있음이 분명해요. 그의 뿌연 구름 사이 어딘가.
#전원주택 뒤뜰, 밤.
키벨레와 메흐멧의 결혼식에 초대받았어요. 이 나라에서 처음 참석해보는 결혼식이라 얼마나 차려입어야 할지, 시간은 얼마나 소요될지, 선물은 무얼 장만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요. 그래픽 디자이너인 키벨레가 직접 디자인한 청첩장에는 밤하늘에 은색 별자리가 그려져 있었어요. 그들이 혼식을 올릴 날의 성좌를 새겨 놓은 거였지요.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적힌 것은 드레스 코드였어요. 남색과 은색. 결혼식은 이스탄불의 최북단 우스쿰루쾨이에서 열릴 예정이었어요. 이스탄불은 거대해서 그만큼 북쪽으로 올라가면 식생과 날씨마저 흑해처럼 바뀐다던데, 그것을 고려해 숄을 챙겨갔지요. 과연 식장은 너무 멀어서 셔틀버스가 운영되었어요. 온통 남색과 은색으로 치장한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는 시내에서 세 시간이나 달려 우스쿰루쾨이에 도착했어요. 금요일 러시아워라지만 같은 도시에서 세 시간이라니! 서서히 도심에서 벗어난 우리 버스는 자연으로 둘러싸인 전원 지역에 들어섰어요. 이윽고 작은 초소와 경비원이 나오고 차단기가 열리더군요. 거기서부터는 전원주택들이 모인 거주 단지인 듯했어요. 마치 미국 교외 마을처럼 길이 시원시원하게 뚫려있었지요. 이삼 층으로 지어진 주택들은 아름다웠고요. 부지가 얼마나 넓던지 버스는 단지 안에서도 한참을 헤맸어요. 그 안에 초등학교까지 따로 있더군요. 결국 하객들은 청첩장과 똑같이 생긴 포스터와 팻말을 찾아냈어요. 세 시간이나 참느라 지쳐버린 하객들은 화장실을 찾아 너도나도 버스에서 뛰어 내렸지요. 우리가 도착한 곳은 누군가의 집이었어요. 담장 앞에는 영화 세트장처럼 트레일러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는데, 이동식 화장실을 렌트한 모양이었지요. 안내에 따라 담 안으로 들어서니, 뒤뜰은 하객으로 꽉 차서 저 앞에 서약을 올리는 신랑·신부는 보이지도 않았어요. 밴드가 연주하는 경쾌한 재즈 음악이 들려오는 가운데, 일일 고용된 종업원들은 핑거푸드와 와인을 나르느라 분주했지요. 결혼식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미국풍이었어요. 양가 가족들이 미국에 오래 살다 왔다지요. 하객들을 둘러보니 인종과 국적이 다양하고 연령대와 스타일도 제각각이었어요. 이 나라의 국민 영화감독인 누리 빌게 제일란 작품에 주인공으로 나온 배우도 보였지요. 귀동냥으로 듣자 하니 대화 주제도 다양했어요. 영국 개혁당의 성장 추세, 두바이 인테리어업 현황, 트럼프 때문에 불거진 사잔 섬 리조트 건축 얘기···. 개중 가장 재미있었던 건 우리가 서 있던 집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부부가 식을 올린 그 집은 고인이 된 신랑의 고모 집인데, 그분은 이스탄불 공과 대학교 교수셨다고 해요. 동료 교수끼리 협동 마을을 짓기로 해 착수한 것이 바로 그 단지라고 했고, 이름은 벌 마을Arıköy이라고 붙였다고 해요. 이스탄불 공대의 상징이 벌이기 때문이라지요. 지금도 단지는 협동조합처럼 운영되고 있대요. 밤은 흐르고 흘러, 말은 거북 등껍질 안으로 숨어들고 신체적 움직임이 시간을 지배해요. 재즈 밴드 사라진 자리에는 높다란 테이블과 디제이가 등장했지요. 사업 얘기, 정치 얘기, 돈 얘기하던 입들은 이제 단 하나의 이름만을 외쳐요. 타르칸! 타르칸! 미국 팝송은 집어치우고 타르칸의 음악을 틀어라!
#구청 마당, 낮.
우리 동네 구청 마당에서 열흘간 도서전이 열렸어요. 여기서 텔레막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친구, 셀림도 거기 참가한다고 해 그의 부스를 찾았답니다. 그가 펴내는 책들이 궁금했거든요. 셀림의 부스에서 산 책들을 보여드릴게요. 어느 천년에 튀르키예어 실력을 이만큼 갈고닦아 이 책들을 읽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욕심을 부렸어요.

- 아딥 칼리드 《중앙 아시아》
- 차일락 메흐메드 테브픽 《이스탄불에서의 일 년》: 1843년대에 태어난 저자는 오스만 민속자료를 수집해 그를 바탕으로 저술했어요. 이 책은 이스탄불의 한 해를 열두 달에 걸쳐 설명하는 시리즈로 기획되었다고 해요. 다만 실제로는 첫 다섯 권만 출간되었다지요. 그는 이런 내용들을 썼어요. 상류층과 서민층의 디저트 모임, 봄철 유원지 나들이, 라마단 야시장 풍경, 이스탄불의 메이하네 문화, 도시의 유흥 문화, 저잣거리 장사꾼과 이야기꾼. 내가 당신께 써 온 편지와도 겹치는 주제가 있군요. 이 책을 통해 알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아요!
- 한병철 《땅의 마름질: 중국의 탈구축》
- 도안 귀르프나르 《튀르키예 이름의 역사》: 이름 변천사를 통해 알아보는 튀르키예 현대사. 저자는 이렇게 말해요. 이름은 정치적이다. 이곳 튀르키예도 여느 나라처럼 이름 유행이 곧잘 바뀌어요. 아흐멧이나 파트마처럼 시대를 타지 않는 종교적 이름이 있는가 하면, 한 시대를 풍미하고는 사라진 이름들도 있지요. 고교 시절 늘 개량한복을 입고 다니시던 전교조 소속 선생님의 딸 이름이 겨레였던 기억이 나요. 튀르키예에도 그런 식으로 부모의 정향이나 신념을 파악할 수 있는 이름이 많답니다. 나도 실생활에서 관찰하며 흥미를 느꼈던 부문인데, 연구 궤적이 이렇게 단행본으로 나와 있으니 안 살 수 없었어요.
- 바킬라니 저, 아딜 베벡 엮음 《초자연적 사건들과 그들 간의 차이점: 기적, 성인의 기적, 마술》: 바킬라니는 아바스 왕조 시기 활동한 중세 이슬람 학자였어요. 마술사들도 놀라운 일을 행하는데, 예언자의 기적은 이와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 바킬라니는 기적과 성인의 기적, 마술을 신학적으로 구분했다지요. 이슬람은 여전히 내게 막막한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어요. 그 종교가 번성해 온 시대와 지역 중,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시대와 장소는 번역 운동이 일어난 전성기의 바그다드예요. 물론 갈 거라면 남장이라도 해야겠지만요. 9세기 아바스 왕조는 그리스어를 아랍어로 번역하며 철학, 논리학, 천문학, 수학, 의학 분야의 수많은 고전들을 받아들였어요. 바킬라니는 이 번역 운동 전성기의 약간 후대 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법을 적극 수용해 이슬람 변증 신학 체계를 발전시켜요. 그랬던 그가 기적이며 예언이며 하는 초자연적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궁금하군요.
- 카를로 디아노 《형태와 사건》: 저자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문화에는 두 범주가 공존했다고 해요. 완결된 영웅 아킬레우스와 대응하는 형태. 끝없이 떠돌고 변화하는 오디세우스와 대응하는 사건.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사회는 형태와 사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저자가 왜 굳이 고대 그리스로 독자를 끌고 가 이 두 가지 범주를 설명하려는지, 그것이 기대되는 책이에요. 이 책은 셀림이 강력 추천하는 책으로, 덤으로 얹어 주었어요.
- 빅토르 슈클롭스키 《사랑과는 관계없는 편지들》: 이 책은 한국에도 꼭 번역되어 나오면 좋겠어요. 러시아의 비평가이자 작가, 슈클롭스키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에요. 그러나 그가 제시한 ‘낯설게 하기’효과는 익숙할지 몰라요. 슈클롭스키는 러시아 혁명 이후 당시 많은 지식인이 그랬듯 망명해 베를린으로 가요. 거기서 역시 망명한 작가, 엘사 트리올레를 사랑하게 되지요. 그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편지를 써서 그녀에게 보내요. 곧 트리올레는 그에게 강령을 내려요. 편지는 써도 좋지만, 사랑 얘기는 하지 말 것. 이후 슈클롭스키는 사랑 얘기만 빼고 모든 걸 그녀에게 적어요. 그의 눈에 비친 베를린 풍경, 날씨, 문학 이론, 러시아 망명자들의 삶 등. 사랑 얘기는 없지만 오직 그녀를 생각하며 쓴 글들. 제목에 동물원이 나오는 것은 당시 망명한 러시아인들이 살던 지역이 베를린 동물원 근처여서라고 해요. 망명해 그 도시에 갇힌 자기들 신세를 동물원 속 동물처럼 봤다는 견해도 있고요. 그러고 보니 나도 슈클롭스키의 실험 비슷한 것에 동참하는 기분이 들어요. 당신께 이 편지를 쓰기 위해 눈에 더 많은 걸 담고 있으니까요.
무더운 요즘 나는 한없이 늘어져요. 늘어지기에 귄도아르켄의 이 앨범만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앨범명 역시도 동일하지요. 한 여름이 또 끝나가네. 실상 여름은 이제 막 시작됐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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