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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해 마을 닷차에서는 매년 1월이면 바다 수영 대회가 열려요. 대회를 며칠 앞두고는 외지인들과 외국인들까지 몰려와 마을이 흥성흥성해지지요. 언젠가 대회가 개최되던 날, 동네 책방엘 갔다가 혈기 왕성한 할머니 한 분이 하시는 말씀을 엿들었어요. 목욕탕 터에서 캠핑장을 지나 해변 끝까지 걸어가면 헬레니즘 시대 양조장이 나온다고요. 수영팀 티셔츠를 입고 계시던 그녀는 강경 조로 책방 손님들을 고무하고 계셨어요. 젊은데들 왜 못 해. 거기서 잠수를 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배로 나르던 암포라 조각이 흩어져 있다네.

안 그래도 나는 목욕탕 터 바로 근처에 살던 차였어요. 목욕탕 터라 함은 서기 6세기에 지어진 공중목욕탕을 뜻했는데, 그 앞을 매일 지나치며 고대인들이 누렸을 향락의 수치를 가늠해 보곤 했지요. 목욕탕에서 캠핑장까지는 실로 내가 자주 걷던 길이었어요. 그럼에도 양조장 얘기는 일절 들어본 적이 없었지요. 길목에는 이렇다 할 팻말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았고요. 유적이 차고 넘치는 아나톨리아에서, 웬만한 유적은 대접도 못 받는다는 사실을 그렇게 체감했지요. 할머니 말씀대로 캠핑장을 지나 참을성 있게 걷다 보니 고대 항구 터가 드러나고, 그 주위에 올리브유와 와인을 저장하던 대형 토기가 몇 구 묻혀있는 게 보였어요. 그리고 정말 곧 고대 그리스인들이 와인을 담그던 양조장 터가 나오더군요. 해변이 얼마나 예스럽고 환상적이던지, 난 그 풍경에 홀딱 반해 이를 배경으로 단편소설을 한 편 쓰기도 했어요. 사금파리를 발견하려는 소녀들과 개들의 여름 이야기지요.


양조장은 기원전 4세기에 지어졌다고 안내되어 있었어요. 거기서 만들어진 와인은 암포라에 담겨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고요. 항구 바로 옆에 양조장을 지은 이유가 그래서였던 거지요. 한반도에서 고조선이 한창 성장하던 시기에 그 항구에서는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 이탈리아, 크림반도까지 와인이 수출되었다지요. 양조장 터 내부에는 학술 기관에서 제작한 교육용 팻말이 여남은 개 세워져 있었지만, 그걸로는 갈증이 다 채워지지 않았지요. 나는 그 터와 와인을 만들던 고대인들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그즈음 와인과 맥주를 집에서 담가 먹는다는 친구들 집에 초대받게 됐어요. 괵체와 아이셰귤 커플은 직접 담근 와인을 맛보게 해주며 튀르키예 포도 품종에 대해 설명해 주었지요. 외퀴즈괴쥐, 파파스 카라스, 칼레직 카라스, 나린제, 술타니예 등 현지에도 수많은 고유 품종이 재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들이 직접 담근 외퀴즈괴쥐는 내가 튀르키예에서 사 마신 웬만한 와인들보다 깊은 맛을 냈어요. 와인을 거의 매일 마시면서도 양조에 대해 일자무식한 내게는 그들이 연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보였지요. 그들이 말하길, 닷차에서는 이렇게 와인을 담가 마시는 사람들이 많대요. 그게 가능한 것은 마을에 은인 한 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거였어요. 포도원 겸 양조장을 운영하는 기라이라는 사람이 연중행사로 타지에 포도를 사러 가는데, 마을 사람들의 주문을 받아다 포도를 대신 사 온다고요. 그가 압착기도 마을에 기증해, 집마다 돌아가면서 그 기계를 쓴다고 했지요. 기실 와인을 만드는 방법을 전부 가르쳐 준 것도 기라이래요. 이쯤 되니 나는 기라이라는 포도원 주인을 만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지요. 그길로 그의 포도원을 찾아갔어요.
크니도스 포도원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비단 포도원을 지은 게 아니라 자신의 낙원을 거기 축조했음을 감지할 수 있었지요. 개들이 뛰어 노닐고 고양이가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정원 한복판에는 노천탕이 우묵 파여 있고, 그 주위로 손님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어요. 어느 자리에 앉아도 포도원의 푸르른 풍경과 탁 트인 산맥이 눈에 들어왔지요. 그가 먹고 자고 소설을 쓰고 담근 와인을 보관한다는 석조 건물은 아담하면서도 개성 있었어요. 튀르키예의 카이스트 격인 중동 공과대학교를 졸업한 후 사업을 운영하던 기라이 씨는 1996년에 닷차로 내려왔대요. 그는 밭을 일구고, 포도나무를 심고, 살 건물을 짓고, 노천탕을 파고, 농사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힌 후에는 손님이 앉을 테이블과 의자까지 모두 손수 만들었다지요. 마당에 박힌 돌 하나하나까지 직접 골랐다는 그의 얼굴에 짙은 자부심이 내비쳤어요. 그러는 동안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그 부지를 종횡무진하며 지냈는데, 가지치기를 마치고 곧장 노천탕에 첨벙 들어가 앉으면 지상 그런 자유가 없었다고 했어요. 또 그렇게 담근 와인은요, 가끔 맛을 보려고 들면 그 풍미에 더 따르기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아나키스트적 영감이 포도원 이름처럼 크니도스에서 온 것임은 자명해 보였어요. 크니도스란 닷차 반도 끝에 세워졌던 고대 그리스 도시예요. 지세가 험준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도태되고 잊혔지만, 해상 교통이 중심이던 때에는 로도스, 할리카르나소스 등의 도시와 더불어 도리스 헥사 폴리스를 구성했던 도시였지요. 나도 날을 잡고 크니도스에서 하루를 몽땅 보낸 적이 있어요. 사는 곳에서 가까운 유적지다 보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판석 하나하나까지 유심히 뜯어보는 사치를 누릴 수 있었지요. 크니도스에서 가장 주목 받는 요소는 거기서 발견된 아프로디테의 나체상과 디오니소스 신전의 위치예요. 아프로디테 나체상은 인간이 최초로 만든 여체 나체상으로 꼽혀요.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이 동물만도 못 하게 취급받았음을 감안하면, 크니도스인들이 얼마나 진보적인 사고를 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디오니소스 신전은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는데, 다른 고대 그리스 도시에서는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하지요.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규범에 저항하고, 질서를 전복했으며, 와인으로 인간을 황홀경에 빠뜨리곤 한 디오니소스는 닷차 반도에서 오래도록 숭앙 받아온 모양이었어요. 현대에 들어 그 디오니소스 정신을 계승하고자 자진해 포도원을 일군 것이 기라이 씨고요. 간혹 음악회나 강연회가 열리기도 하는 그의 포도원에서, 마을에 사는 한 고고학자와 기라이 씨는 <포도에서 민주주의까지; 디오니소스와 와인>이라는 강연을 열기도 했다지요.
기라이 씨는 와인의 역사가 조지아에서 태동했을 거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고 했어요. 기원전 65세기에 인류의 첫 포도원이 세워진 것으로 안다고요. 나 역시도 그 얘기는 종종 들은 적 있었어요. 조지아에 입국할 때 와인의 나라에 온 걸 환영한다며 입국 심사대에서 미니 와인을 선물 받은 기억도 있었지요. 그러나 캅카스 포도는 다른 지역으로 퍼지지 않고 그 지역에만 존속했다고 해요. 반면, 사카로미세스 세레비시아와 비티스 비니페라의 이동 경로는 끝도 모르고 연장되어요. 이름이 어려운데, 전자는 포도 껍질에서 만들어진 효모종이에요. 인류가 빵이나 맥주, 와인을 만드는 데 쓰였지요. 후자는 와인용 포도종을 뜻해요.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샤르도네 등 우리가 아는 와인이 95% 이상 여기 속하지요. 사카로미세스 세레비시아와 비티스 비니페라가 세계에서 처음 경작된 지역은 레바논 북부, 시리아 서부, 튀르키예 남동부로 밝혀졌어요. 이중 비티스 비니페라는 아나톨리아 중심에서 한 차례의 교배를 더 거쳐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어요. 로마 황제가 군대 주둔지마다 포도나무를 심게 해 이 나무가 퍼졌다는 사실이 재미있지요.
기라이 씨 조사에 따르면, 아나톨리아는 만 천 년에 이르는 와인 양조 역사를 품고 있는 셈이에요. 기원전 2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이 와인을 어떻게 만드는지조차 몰랐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긴 노하우가 축적되었던 거지요. 기라이 씨는 자신의 낙원에 틀어박혀 추적한 연구를 통해 와인 양조의 전성기를 맞은 크니도스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리게 된 모양이었어요. 그가 집필하고 있는 역사 소설도 그 시대 속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했으니까요. 그의 소설 배경 속으로 들어가 와인 얘기를 더 해볼까요? 자, 두루마리 양피지를 여기 펼쳐요. 기원전 4세기경, 에게해 크니도스. 1만 5천 명이던 인구는 순식간에 7~8만 명으로 급증해요. 계단식 농경법이 개발되어 포도 수확량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한 덕이지요. 도시의 중심은 항구 부근으로부터 반도 끝으로 옮겨가요. 크니도스인들은 포도로 와인과 식초를 만들어 전 세계 각지에 수출하고, 이는 큰 인기를 끌지요. 바닷물을 약간 가미한 에게해 와인은 별미로 취급되어요. 기존에 쓰이던 항구는 버려지지 않고 도자기를 굽는 요지로 변모해요. 전세계 75%의 도자기가 거기서 구워지지요. 와인, 식초, 도자기를 바삐 수출해 번 돈으로 도시는 번성해요. 크니도스는 로도스와 더불어 세계에서 와인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도시가 되지요. 양피지를 둘둘 말며 문득 궁금해져요. 그렇다면 그 와인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요? 만 천 년 동안 생산되던 와인이 하루 아침에 증발이라도 한 걸까요? 기라이 씨는 고개를 끄덕여요. 정말이지 그랬다고요.
기라이 씨는 오스만 제국 후기까지도 아나톨리아 와인 양조의 명맥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어요. 이슬람의 도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요. 술탄은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든지 와인을 만들고 팔도록 내버려뒀어요. 세금만 꼬박꼬박 내면 아무 문제 없었지요. 또한, 술을 만든 것은 확실히 기독교인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술이 그들의 전유물은 아니었어요. 에게 지역의 전유물도 아니었지요. 무슬림들도 술을 소비했어요. 기록을 보면, 20세기 초까지도 이스탄불의 선술집 주인들은 라마단 명절에 무슬림 손님들에게 홍합 껍데기에 채운 양념밥을 선물로 보냈어요. 이 별식을 ‘우리를 잊지 말라 양념밥’으로 불렀는데, 무슬림 단골들이 라마단 기간 동안 술집에 출입할 수 없기 때문이었지요. 그 말인즉슨 무슬림들이 평상시 그만큼 큰손이었다는 뜻이지요. 기라이 씨는 오스만 제국이 1914년까지도 15억 리터 이상을 생산했다고 주장해요. 그리고 이는 당시 세계의 어떤 국가도 따라갈 수 없는 초유의 생산량이었다고요. 그러나 제국이 쇠락할 즈음 아나톨리아에도 민족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해요. 한 땅에 더불어 살던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룸인들은 박해당하거나 하루아침에 떠나기를 강요받지요. 대대로 와인 양조를 도맡아 온 기독교인들이 떠나며 포도원은 버려지고 양조장은 문을 닫아요. 아나톨리아 와인 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어요. 3천 종이 넘는 아나톨리아의 고유 포도는 전부 잼이나 식초가 되지요.
상황을 통탄스레 여긴 몇몇 이들이 기라이 씨처럼 90년대나 00년대부터 아나톨리아 각지로 흩어져 소규모 포도원을 짓기 시작했어요. 보아즈아다, 데니즐리, 카파도키아 등지에 포도원이 생겨났지요. 이즈미르 지역의 울라에는 소규모 포도원들을 한 번에 방문할 수 있는 포도원 루트가 아예 여행 코스로 자리 잡있어요. 그에 따라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도 문을 열기 시작했고요. 기라이 씨의 경우, 닷차에서 우연히 발견한 야생 포도종을 복원 재배해 크니도스 카라스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이처럼 각지에 본래 자생하던 포도를 소규모 포도원들은 복원 재배하기 시작했지요. 여전히 세금 정책이나 불리한 규제 등 아나톨리아에서 와인을 생산해 파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듯 애정과 사명감을 갖고 와인을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이 있지요.

기라이 씨를 만난 후 나는 크니도스 포도원을 몇 차례 더 찾아갔어요. 그가 생산한 와인의 기막힌 묘미를 도저히 혀에서 떨쳐낼 수 없었지요. 또한 그가 조성한 낙원에서 보낸 시간이, 되돌아가고 싶은 꿈처럼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그와의 향연도 그리웠지요. 나는 세상에 경멸할 게 많으면서도 향락을 즐길 줄 알고, 상실에 고까워하며 애도할 줄 아는 이들에게 언제나 끌렸어요. 애도란 신에게 가까이 다가설 때 이루어지지만, 실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 아니던가요. 마지막으로 기라이 씨가 만든 크니도스 카라스를 한 잔 마셨을 때, 어쩐지 그의 고뇌와 환희를 동시에 마시는 듯 했어요. 그것은 신의 물방울이 아닌, 지극히 인간이 만든 물방울의 맛이었지요.
📺 아나톨리아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영상으로도 담았어요.
📺 기라이 씨와 나눈 이야기 전체는 아래에서 볼 수 있어요. (한국어 자막을 켜세요)
아나톨리아 가요의 역사를 세젠 악수를 제외하고는 논할 수 없지요. 여기 살며 자동으로 그녀의 곡을 몇 곡이나 외우게 됐는지 몰라요. 여름밤, 바다 수영으로 노곤해진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잔에 술을 채우고, 그들의 얼굴만큼이나 울긋불긋한 꽃나무와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향기가 퍼지지요. 반복되는 파도 소리 위에 그 언제나 중첩되는 것은 이 곡이에요. 한 손엔 월계수 잎, 한 손엔 너의 사랑. 내 마음은 에게해에 남아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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