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가 이스탄불로 이사한다고 했을 때, 한국 친구들의 반응은 이러했어요. 하다 하다 너 정말···. 여기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대체로 보여요. 이스탄불에 산다고요? 어쩌다가요? 내가 정말 어찌하다 여기까지 와서 살게 됐는지를 따져보면, 그 배경에는 독일이 있어요. 나는 독일에서 도움닫기 해 튀르키예의 세상에 입문했지요.
열아홉 미대에 다니던 시절, 미술보다는 음악에 더 빠져들었어요. 학창 시절부터 음악 듣는 것을 좋아했지만, 상경해 홍대에 살게 되니 좋아하던 뮤지션들을 코앞에서 보는 일이 잦아졌지요. 신입생 시절부터 잡지 통신원 일을 했는데, 그 덕에 만나고 싶은 뮤지션들을 인터뷰 핑계로 만날 수 있었어요. 그들과 왕왕 친분을 쌓거나 연애를 하기도 했지요. 상황이 이럴지니 학교보다는 록 클럽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까지는 록 음악이 나의 주요 소비 장르였어요. 그러다 해외에서 살다 온 친구들로부터 전자 음악이라는 장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이윽고 그 친구들과 장소를 대관해 파티를 벌이기 시작했어요.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내가 사는 집 옥상에서 이벤트를 개최한 적도 있었지요. 누디스코부터 미니멀 하우스, 하우스를 지나 나는 어느새 테크노 장르에 흥미를 두게 되었어요. 스물한 살에는 아무런 정보나 지인도 없이 테크노 음악의 본고장이라는 베를린에 당도했어요. 독일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2013년의 일이었지요.
내가 처음 집을 구한 동네는 베를린 북부 베딩이었어요. 지하철역 팡크슈트라세에서 내려서 집까지는 800미터 정도를 직진하면 됐어요. 프린츤알레라는 대로였지요. 그 길에 있는 거의 모든 마트가 튀르키예 마트며, 거의 모든 식당이 튀르키예 케밥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튀르키예 마트는 일반 독일 마트보다 어두침침하고 통로는 비좁았어요. 식자재들도 하나같이 낯설었지요. 요구르트를 어째서 킬로 단위로 파는지, 수많은 올리브는 어떻게 다른지, 치즈들의 쓰임새는 다 무언지 짐작도 할 수 없었지요. 생고기를 사면 랩이 아니라 종이에 싸주는 것도 낯설었어요.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대부분 내 입맛에 맞더군요. 특히 튀르키예 가정식의 참맛을 알게 됐지요. 간혹 미혼이냐, 나와 결혼하겠냐, 추파를 던지는 음식점 직원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지만요. 좋든 싫든 튀르키예식 마트와 식당들은 결국 내 일상이 됐어요.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까요.
당시 나는 왜 그렇게까지 많은 튀르키예인이 베를린에 사는지 알지 못했어요. 경제적으로 더 여유로운 곳을 찾아 이민했겠거니 추측할 따름이었지요. 그러다 튀르키예계 친구들을 사귀게 되며 그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어요. 패전 이후 서독은 마셜 플랜 지원과 화폐 개혁을 발판 삼아 경제 기적을 일으켜요. 도이체 마르크의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제조업 성장으로 노동 인구가 부족해지자, 서독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요. 처음에는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지에서, 그러다 점차 튀르키예, 유고슬라비아 등으로 경계를 넓혀가지요. 이 노동자들을 손님 노동자, 가스트아르바이터Gastarbeiter라고 불렀어요. 정해진 기간 일하고 돌아갈 사람들이라고 처음부터 선을 그어둔 것이지요. 한국인 간호사나 광부들도 이 손님 노동자 자격으로 독일에 보내졌지요. 튀르키예인 노동자들은 2년간 노동하는 조건으로 1961년 처음 유입되어요. 그들은 서독 전역의 광산, 용광로, 자동차 공장, 항만, 조선소, 금속 공장 등에 배치되어 일해요. 독일인들이 하기 꺼리는 궂은 일들을 도맡아 했지요. 당시 입국한 튀르키예인은 대개 젊은 독신 남성들로, 7천 명 남짓이었어요. 계약 기간이 지난 후에도 이들은 돌아가지 않고 독일에 남아 계속 일하게 되는데, 독일의 고용주들은 숙련된 노동자들을 돌려보내기 아쉬워했고, 튀르키예 입장에서도 외화를 벌어다 주는 그들을 서둘러 송환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이렇게 튀르키예에서 들어오는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12년 후에는 서독 내 튀르키예인 인구가 90만 명에 이르러요. 손님이 영구 거주자가 된 건 1973년 일어난 오일 쇼크 이후예요. 경제가 침체하자 독일 정부는 더 이상 신규 외국인 노동자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해요. 독일 관료들은 기존 손님 노동자들의 경우 곧 알아서 귀국하리라 예측하죠. 그러나 튀르키예인들은 새로운 체제에 불안감을 느꼈어요. 고국에 일자리가 없을 거라고, 혹은 한 번 귀국하면 다시는 독일 땅을 밟을 수 없을 거라고 두려워했지요. 게다가 이미 독일 생활과 공동체, 일터, 거주 환경에도 익숙해진 그들이었어요. 가수 젬 카라자Cem Karaca는 이 손님 노동자들의 상황을 두고 이렇게 노래했어요. 노동자를 불렀더니, 인간이 왔네(Es wurden Arbeiter gerufen, doch es kamen Menschen an). 그래요. 그들은 인간이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적응하는. 독일을 집으로 삼은 이 인간들은 되려 아나톨리아에 남아 있던 가족들을 부랴부랴 데려와요. 제도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몰랐으니까요.
우리는 파독 간호사나 광부들을 어떻게 여기고 있나요? 한국 경제가 어려울 때 자신의 젊음을 희생한 고마운 분들로 기억하고 있지 않나요. 이에 반해, 튀르키예 내 손님 노동자에 대한 감상은 그리 일방향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안타까움, 애처로움, 업신여김, 깔보기, 경멸 등의 감정이 불균일하게 섞여 있지요. 손님 노동자들이 가족을 독일로 데려가자, 튀르키예로 더 이상 외화가 유입되지 않게 됐어요. 가족 단위로 떠나간 이들은 예전만큼 고국을 찾지 않았어요. 그럴 이유가 사라졌지요. 긴밀하던 유대감이 점차 느슨해지고, 튀르키예에서는 이 재독 튀르키예인들을 알만즈Almancı라고 부르며 타자화하기 시작해요. 굳이 번역하자면 ‘재독인’ 정도로 옮길 수 있는 이 단어는 점차 폄하적인 뉘앙스를 띄게 되어요. 튀르키예와 독일의 경제 격차가 점차 벌어지며 재독인들은 본국 사람들보다 훨씬 부유해졌어요. 휴가를 와 마르크나 유로를 펑펑 쓰는 이들을 본국에서는 아니꼽게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애초에 손님 노동자로 떠난 이들은 대부분 아나톨리아 중부나 동남부의 빈촌 주민들이었어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던 촌뜨기들이 돈 좀 벌었다고 떠세 부린다, 쉽게 말해 이런 인식이 생겨난 거지요. 여기에 정치적인 이유도 있어요. 혈통주의를 택하는 튀르키예에서는 독일에서 태어난 2세나 3세들도 복수 국적이 있는 한 투표권을 가져요. 독일 내 유권자만 150만 명에 달하지요. 독일에 살며 그 나라에 세금을 내는 재독인들이 본국 현실에 대해 뭘 아냐, 그들에게 무슨 자격이 있냐, 선거철마다 튀르키예 내에서는 아우성이 일어요. 실제로 접전이 벌어졌던 지난 대선에서 독일 내 에르도안 득표율은 67.4%로, 본국에서보다 무려 15%나 높았지요. 정권이 바뀔 기회를 알만즈들이 져버렸다. 이런 원성이 이해될 법도 하지요.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재독인들 스스로도 ‘알만즈’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거예요. 베를린에서 대학 동기이던 튀르키예계 독일인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1992년생인 그는 베를린에서 초중고를 나왔는데, 학창 시절 내내 튀르키예계 비율이 매우 높았대요. 어쩌다 독일인 친구 집에 놀러 가는 날이면, 그는 그날 밥 한 끼 못 얻어먹으리란 걸 알았대요. 한때 인터넷에 떠돌던, ‘스웨덴인들은 자녀 친구가 놀러 와도 자기 자녀에게만 밥을 먹인다’라는 설이 스웨덴에 한한 얘기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는 자연히 독일인들의 가정 문화가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는 매우 다름을 인식했어요. 그뿐 아니라 대부분의 튀르키예계 아이들이 그랬지요. 그들 사이 가장 모욕적인 언사가 바로 ‘알만즈’였다고 해요. 독일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지나치게 독일식 규율이나 사고방식을 주창하면 아이고, 독일인 납셨네, 하고 서로 조소했던 것이지요. 이들이 독일인으로 동화됨에 반감을 품은 배경에는, 튀르키예계 이민자들을 겨냥해 일어난 혐오 범죄도 한 몫 했다고 해요. 통독 이후 동독 경제가 붕괴하고 실업난이 극심해진 후부터 외국인 혐오 범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어요. 1990년대 묄른과 졸링겐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은 튀르키예 이민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지요. 도시마다 건물 외벽에는 ‘튀르키예인 나가라Tüken raus’, 라는 구호가 래커로 적혔고요.
오늘날 튀르키예와 독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어요. 튀르키예계 독일인 정치인들이 독일 정계에 다수 진출해 있고, 독일 청소년들은 파샤님Pashanim 같은 튀르키예 이민자의 음악에 열광하며, 본국에서도 파티흐 아킨 같은 재독인 영화감독을 자랑스럽게 여기지요. 내가 2013년 비행기에 올라 향한 곳은 분명 연갈색 머리, 무거운 맥주, 인더스트리얼한 음악, 성대를 긁는 탁한 발음, 고딕 양식 건물, 검푸른 강물, 스산한 바람의 나라였어요. 그러나 도착 후 나의 길, 귀, 혀, 눈과 마음을 점령한 것은 온통 튀르키예 산물들이었지요. 독일에서 내가 만난 벗, 동료, 연인, 교수, 카페 주인, 술집 주인, 빵집 주인, 세탁소 주인, 정육점 주인, 편의점 주인들은 재독인이거나 튀르키예인들이었어요. 그리하여 나는 지금 이스탄불에 있어요. 인간을 부른다 함은, 이토록 복잡한 결과를 널리 널리 야기하는 행위인 것이지요.
- 사랑, 마르크 그리고 죽음Aşk, Mark ve Ölüm. 본래 아라스 외렌이 지은 시 제목을,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젬 카야는 자신의 작품명으로 택했어요. 재독 2세인 카야는 본국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독일 사회에서도 주목받지 못한 재야 재독인 음악가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어요. 튀르키예인들이 처음 독일로 이주했을 때의 희망, 마르크를 잔뜩 벌어 고국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했던 꿈, 그들에게 행해진 폭력과 이로 인한 단절을 그들의 음악사와 함께 담아내지요. 이민사와 튀르키예 음악에 관심 있다면 추천할 만한 영화예요.

- 베를린에서 내 교수님이던 토마스 아슬란은 영화감독이에요. 학교에서 그의 베를린 3부작을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나요. 독일/튀르키예 부모 슬하에서 자란 그의 자전적 이야기가 듬뿍 담겨있지요. 세 작품은 모두 베를린을 배경으로, 튀르키예계 청년들의 방황을 담고 있어요. 《Geschwister – Kardeşler (Brothers and Sisters)》 (1997), 《Dealer》 (1998), 《Der schöne Tag (A Fine Day)》 (2001).

- 얼마 전 열화당에서 튀르키예계 독일 작가, 에미네 세브기 외즈다마르의 《엄마혀》라는 소설이 출간되었더군요. 내가 관심을 두고 있던 작가인데 한국어로도 출간되었다니 매우 기뻐요.
데랴 이을드름을 만난 것은 이스탄불의 한 바에서였어요. 함부르크 출신 재독 2세인 그녀는 공연차 이스탄불에 방문한 참이었지요. 나를 데랴에게 소개해 준 친구들은 내가 데랴의 음악을 여태 못 들어봤다는 말에 나를 나무랐어요. 어떻게 데랴를 모를 수가 있어! 그 주말 그녀의 공연에서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아요. 전율이 일지 않는 곡이 정말로 단 한 곡도 없었지요. 튀르키예의 민속적 요소를 그토록 감각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어요. 콘서트장은 거대한 가문의 결혼식장 같았어요. 객석 모두는 어깨를 들썩이며 사이키델릭한 환희에 젖었지요. 내 뒤에서 들려오던 함성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네요. 데랴! 이제 이리로 이사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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