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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어학원 선생님과 급우끼리 에페수스 견학을 떠나기로 했어요. 일정은 이박 삼일로 결정됐지요. 에페수스는 우리에게 에베소라는 지명으로 더 익숙할 터예요. 초대 일곱 교회 중 하나가 세워진 곳. 사도 바울이 선교 활동을 벌인 곳. 성모 마리아가 말년을 보내다 승천했다는 설이 나도는 곳. 한국에서는 유독 기독교적 측면이 더 부각되는 듯하지만, 기독교 전파 이전 세워진 유적의 규모와 가치 또한 입이 떡 벌어질 정도지요. 이스탄불에서 에페수스는 비교적 가기 수월한 여행지로 꼽혀요. 차로 여섯 시간 남짓 걸리는데, 땅덩어리 거대한 튀르키예 내에서 이 정도면 단거리까지는 아니어도 즉흥적으로 다녀올 만한 축에 낀답니다. 틈만 나면 그리스까지 운전해서 다녀오는 친구들도 많으니까요. 가이드 일을 해 에페수스에 수도 없이 방문했다는 한 한국인 급우는, 거긴 하루면 다 보는데 무슨 이박 삼일이나 소요하느냐고 핀잔했지요. 그러나 나는 외려 일정을 연장해 하루 먼저 떠나기로 했어요. 하루만으로 충분한 유적은 없다고 여긴 것도 있지만, 그보다 에페수스 옆에 붙어있는 산골 마을, 시린제를 둘러보고자 했던 거지요.
에페수스와 시린제를 구경하려면 셀축이라는 도시로 가야 해요. 오늘날 에페수스는 지명이 아니라 유적 지구만을 일컫거든요. 이렇게 비교하면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셀축을 경주 같은 도시로 볼 수 있어요. 그 안에 기차역도 있고, 호텔과 식당, 카페, 학교, 시장 등이 밀집해 있지요. 경주 시내 곳곳에 주요 왕릉과 첨성대, 박물관이 산재해 있는 것처럼, 셀축 시내에도 유적이 즐비해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아르테미스 신전 터, 비잔티움 시기에 세워진 성 요한 성당, 역시 비잔티움 때 지어진 후 개축된 아야술룩 성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기 직전 지어진 이사 베이 모스크, 에페수스 박물관이 모두 시내에 있지요. 무려 2500년에 이르는 역사가 보행 거리 안에 축약되어 있어, 걷는 내내 마치 꿈을 꾸는 듯해요. 셀축 시내에서 에페수스까지는 경주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남산에 이르는 것 비슷해요. 시린제는 보문관광단지에 비하겠어요. 그러고 보니 시린제와 보문단지는 의미적으로도 유사한 데가 있군요. 허허벌판에 인공적으로 개발되었으며,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았을 추억의 장소지만, 지금은 이목에서 멀어진.

이 나이 먹도록 운전을 못 하는 나는 대중교통만을 이용해 시린제까지 갔어요. 먼저 이스탄불의 김포 공항 격인 사비하 괵첸 공항에서 비행기로 이즈미르에 도착한 후, 기차를 타고 셀축을 향해 달렸어요. 이즈미르 기차는 현대 로템이 지어, 꼭 한국 열차를 탄 것처럼 내관이 친숙했지요. 셀축에서 시린제까지는 어떻게든 갈 길이 있겠거니 여겨 차편을 미리 알아보지 않았어요. 역에서 나와 일단은 피로를 한 김 시킬 겸 앉을 곳을 찾아 시내를 돌아다녔지요.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늘어선 중심가에서 누군가 다가와 호객하더군요. 키가 작고 머리칼과 수염이 불긋하며, 영화 《파고》 주인공 윌리엄 메이시를 닮은 그이에게 동정심이 일었어요. 내가 걸음을 멈추자 그는 내 얼굴을 몇 초간 가만히 쳐다보더니 튀르키예어로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한국인이 아니고 일본인이군. 그는 하라주쿠에서 십 년도 넘게 카펫 장사를 하다 귀국해 식당을 열었다고 했어요. 결국 나는 못 이기는 척 그 식당 테라스에 앉아 터키식 커피 한 잔을 시켰어요. 주문하며 내가 한국인이라고 정정하자, 그는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어요. 거기에는, 한국인일 것이라 상정하긴 했지만 일본인이라 생각을 바꿨더니, 이것 참, 역시나 한국인이군, 이런 뉘앙스가 서려 있었어요. 테라스에 앉아 있으니 탄식의 이유를 알겠더군요. 지나가는 동양인의 십중팔구는 한국인이었어요. 셀축 경제를 견인하는 게 다 한국인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국인 관광객의 비율이 높았어요. 구 하라주쿠 상인은 그 많은 한국인 손님을 다 놓치고 말았어요. 대신 걸려든 이들은 짐짝만 한 배낭을 멘 말레이시아 남자들이었지요. 두 사람의 생김새는 판이했어요. 한 명은 한족, 한 명은 말레이족인 듯 보였지요. 쿠알라룸푸르에서 철강 회사에 다니다 은퇴했다는 그들은 세계 여행을 다니는 중이었어요. 끽해야 오십 대로 보였는데 일흔도 넘은 어르신들이었지요. 그들은 소싯적 한국으로 출장 다닌 경험담을 쏟아내며, 너희 한국인들은 어쩜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니, 나라를 어쩜 그렇게 편리하게 만들어 놨니, 케이팝은 어쩜 그렇게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니, 그런데 출산율은 어쩜···, 하고 내 말문을 열었다 틀어막았다 했지요. 커피를 다 마신 후 나는 구 하라주쿠 상인에게 시린제 가는 길을 물었어요. 그는 미니버스를 타면 금방이라며 정류장까지 가는 경로를 소상히 일러주었지요.

시린제 가는 길은 멀미가 나도록 구불구불했어요. 고개를 넘고 또 넘어야 했지요. 본래 항구 도시이던 에페수스는 퇴적 작용으로 바다와 멀어지며 4세기경부터 쇠퇴했어요. 오스만 제국이 세워졌을 무렵에는 이미 별 볼 일 없는 촌락으로 전락했지요. 내가 둘러본바, 셀축 시내 유적 사이사이에 농경지가 널렸더군요. 도로를 달리는 트랙터도 흔했고요. 우연히 만난 현지인에게 무얼 주로 경작하느냐 물으니 귤과 포도, 올리브 같은 과실이래요. 그이는 또 이렇게 덧붙였어요. 유럽인들이 와 유적지를 발굴하기 전에는 그냥 농사나 짓던 평범한 시골 마을이었다오, 여긴. 선망지가 아니었던지라, 이오니아 시대부터 둥지를 튼 토착 그리스인들은 조용히 대를 이어 살아갈 수 있었어요. 쓰던 그리스어를 계속 물려주면서요. 어찌 보면 가만히 있던 그들 주위로 땅 주인이 바뀐 거지요. 특히 시린제는 정교회인들만이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어요. 그러다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인구 교환이 이루어져, 거주민 대다수가 그리스인이던 마을은 텅 비게 되지요. 그리스에 살던 무슬림들이 유입되긴 했지만, 워낙에 빈촌이었던데다 산간 지대라 별로 선호 거주지가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원래 살던 4천 명 인구의 절반도 안 되는 무슬림들이 들어왔으니까요.
2000년대에 들어 시린제는 각광 받는 관광지로 부흥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여러 종류 과실로 담근 와인이 유명해졌지요. 지금까지도 시린제라고 하면 와인이라는 단어가 절로 따라붙을 정도로 특산지 이미지를 제대로 굳혔어요. 이렇게 시린제를 관광지로 재건한 데에는 두 사람의 공이 컸어요. 수학자 알리 네신Ali Nesin과 언어학자 세반 니샨얀Sevan Nişanyan이 그 장본인들이지요.

알리 네신을 모를 수는 있어도, 네신 가문을 모르는 사람은 아나톨리아에 없을 터예요. 그의 아버지 아지즈 네신이 매우 유명한 풍자 작가였기 때문이지요. 아지즈 네신은 군부, 보수주의, 종교적 권위에 반기를 들고 비판적 논조의 작품을 대차게 선보였어요. 그 덕에 감옥에도 여러 번 들락거렸고, 살해당할 뻔하기도 하지요. 시바스에서 일어난 호텔 방화 사건에 대해 내가 짤막하게 언급한 걸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어요. 《악마의 시》를 번역하려던 이가 이 아지즈 네신이었음을 상기시켜 드려요. 아버지의 삶이 이리도 야단스러웠던지라, 아무래도 그 아들은 좀 더 온건한 길을 택한 듯해요. 알리 네신은 대수기하학 연구자로, 파리 7대학과 예일대에서 수학한 후 미국에서 강의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아지즈 네신의 사망 후에는 튀르키예로 돌아와 부친이 설립한 네신 재단 운영을 도맡지요.
세반 니샨얀도 예일과 컬럼비아에서 철학과 정치학을 수학했어요. 그러던 중 군복무를 위해 튀르키예로 돌아왔지요. 그가 출간한 니샨얀 사전은 아나톨리아에 없어서는 안될 어원사전으로 꼽혀요. 온라인으로도 출시되어 누구나 손쉽게 접속 가능하며, 상시 업데이트되지요. 페르시아어, 아랍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고대 튀르크어가 뒤범벅된 현대 튀르키예어에서 그만한 사전을 만들려면 얼마나 방대한 연구에 치열하게 임해야 했을지 감도 오지 않아요. 외국인인 나조차도 어원이 궁금한 단어가 있으면 무조건 니샨얀 사전에 들어간답니다. 그의 어원사전만큼이나 중요한 또 하나의 사전은 지명 사전이에요. 그는 아나톨리아뿐 아니라 인접 국가들의 지명 변천사를 기록했어요. 여기서 그가 아르메니아계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겠군요. 이름에서 벌써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요. 니샨얀은 ‘터키화 정책’하에 아르메니아인이나 유대인 등 소수 민족이 거주하던 지역 이름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집요하게 추적했어요. 지명 변경이란 것이 어떨 때는 심리전에 버금가기도 하니, 들춰볼 자료가 집적되었다는 게 후손 입장에서는 매우 유의미하겠지요.
일찍이 파리에서 만난 네신과 니샨얀은 군복무도 함께 하며 사이가 깊어졌대요. 니샨얀은 다방면으로 취미가 깊은 사나이였던 모양으로, 코모도어 64 컴퓨터를 몸소 수입하기도 하고, 이 무렵 초기 컴퓨터에 관한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어요. 여러 여행 서적을 발간하기도 했으며, 건축에도 조예가 깊었지요. 90년대, 니샨얀은 폐허가 된 시린제로 가 마을을 복원하기 시작했어요. 에게 전통식으로 그가 복원한 돌집들은 니샨얀 가옥으로 불리게 됐지요. 그는 호텔도 하나 지어 당시 부인이던 뮈즈데 톤베키지와 함께 운영했으며, 포도밭을 일구어 와인도 생산하기 시작했어요. 한편 2000년대, 이스탄불 소재 대학에 재직하던 알리 네신은 대안적인 수학 교육 시설을 짓고자 고심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대학에 온 아이들의 수학적 사고력이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네신이 보기에, 대다수 학생은 오직 시험만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지요. 수학에 대한 공포는 어떤 수를 써도 사라지지 않았고요. 그런데 여름 캠프식으로 합숙 공부를 해보니, 수학이 즐길 수 있는 대상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기존 대학에서는 이런 방식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 한계를 해소하고자 했어요. 내가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도 이런 교수님이 한 분 계셨어요. 안상수체를 만든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 교수님은 오래 재직하던 홍익대에서 나와, 대안 디자인 학교인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를 설립하셨지요. 내가 홍대에 다니던 당시 우리 과 학과장은 나중에 문체부 장관을 지낸 김종덕으로, 추후 밝혀진바 딴 데 줄을 서느라 바빴던 모양이에요. 차은택도 현업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지요. 다수의 정교수는 수업에 잘 나오지 않고, 학과장은 아예 보이지 않았는데 이런 분위기가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어요. 대학이라는 기관에 회의를 품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나는 학교를 관두었지요. 유일하게 진정한 스승으로 여겨지던 안상수 교수님이 퇴임하셨을 때 놀람과 동시, 그의 행보가 무척 기대되었던 기억이 나요. 그가 기존 체제에서 실험할 수 없었던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했지요. 알리 네신 역시 이런 맥락에서 대안 교육 시설을 짓고자 한 게 아닌가 싶어요. 네신은 니샨얀이 복원하기 시작한 시린제를 수학 유토피아의 후보지로 삼아요. 니샨얀은 아예 건축 자체를 맡으며 적극적으로 협조하지요. 그들이 함께 지은 교육 기관은 수학 마을로 불리게 돼요. 이후에는 분교 개념으로 옆에 철학, 예술 마을도 생겨나지요. 내가 시린제에 가보고 싶었던 첫 번째 이유가 이것이었지요. 수학 마을 구경하기.


수학 마을 가는 길은 내가 유년기를 보낸 홍성의 구항면 비스름했어요. 첩첩산중에 아무도 없고 아스팔트 깔린 도로만이 쭉 이어졌지요. 산 공기가 어찌나 맑고 신선하든지요. 갓길에 피어난 이국적 들풀과 산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이슬람 기도 소리만이 이곳이 머나먼 아나톨리아 땅임을 일러주고 있었지요. 그렇게 한참을 홀로 걸으니 저 멀리 성채 같은 건물 몇 채가 드러나더군요. 목줄 묶인 개 한 마리가 그 방향을 향해 마구 짖고 있었고요. 거기서부터는 약간 무서워졌어요. 여전히 그 개와 나 말고는 개미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요. 수학 마을에 마침내 도달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주판 모양의 조형물이었어요. 외부인도 과연 출입할 수 있는지,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지만 입구에는 아무도 없었답니다. 나는 일단 마을 안으로 들어섰어요. 대부분 돌과 나무 등 자연물로 지어진 건물들은 아담했어요. 오솔길이 일직선으로 길게 나 있고 양쪽으로 건물들이 쭉 늘어선 구조였지요. 특이했던 점은 눈이 닿는 곳마다 그늘과 앉을 곳이 있었다는 거예요. 카페테리아는 매우 거대했고 뜰이나 정원에도 이야기를 나눌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지요. 단순히 일렬로 된 벤치가 아니라, 마주보고 의견을 주고받기 용이하도록 설계된 점이 눈에 띄었어요. 거기서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고심하고, 서로 묻고 대답하고, 사랑을 나누기도 했을지 그려보았지요. 사람이 없었는데도 건물들의 문은 전부 열려 있었어요. 나는 수학 마을의 대표 건물로 꼽히는 도서관 안에 들어가 보았지요. 일찍이 증발해 버린 내 학구열이 그 환상적인 공간에 들어서니 꿈틀거리더군요. 도서관 내부는 복층으로 되어 있어 포르투의 렐루 서점이 연상되기도 했답니다. 건물 입구에는 수학 마을 기부자 목록이 각인되어 있었어요. 수학 마을은 기부금과 자원봉사단의 헌신, 학생들의 자발적 노동으로 운영된다고 해요. 시설은 여름 캠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그동안에는 마치 이스라엘의 키부츠처럼 각자 맡은 노동을 분담해야만 한다지요.



수학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보던 중 나는 탁 트인 풍경에 이끌려 그쪽을 향해 걸었어요. 하얀 이불을 첩첩이 널어놓은 빨랫대 너머 산봉우리 풍경은 장관이었어요. 모든 것이 태곳적 그대로 자연 상태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질서에 어긋난 인공물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어요. 페티예에서나 볼 수 있는 리키아식 석굴 무덤. 시린제에 가보고 싶었던 두 번째 이유가 이렇게 드러났군요. 니샨얀 석굴 무덤 관람하기.


니샨얀은 여행 서적을 집필하기 위해 고대 리키아 시대 석굴 무덤을 전부 둘러봤다고 해요. 거기서 그는 그보다 낭만적인 풍경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감탄했대요. 그러고는 이렇게 자문했다지요. 현대인은 바보인가, 영혼이 쪼그라든 노예인가? 이후 그의 가슴 한편에 석굴 무덤 양각에 대한 염원이 자리잡았대요. 그가 이 염원을 실행에 옮기게 된 동기에는 몇 가지가 있어요. 먼저 2000년대 후반 그는 암살 협박에 시달렸어요. 사실 오늘날 니샨얀은 공적을 쌓은 언어학자라기보다 기행을 일삼은 논객으로 더 기억되고 있는 듯해요. 과장을 좀 보태서는 그를 이렇게 부를 수도 있을 거예요.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미움 받는 남자. 그 배경을 설명하자면, 제국이 패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세워지던 나날로 당신을 모셔가야겠어요. 국가를 새로이 건설하던 아타튀르크와 공화국 엘리트들은 구문물이라면 싹쓸이하고자 했어요. 이슬람주의 버리고 세속주의로 가자, 아랍 문자 버리고 로마자를 쓰자, 남자들은 페즈를 벗고 여자들은 서구식으로 입자, 제도도 모조리 유럽식으로 바꾸자. 오래 꿰차고 앉은 비석을 치우자 그 자리를 메꿀 것이 필요했어요. 그것이 바로 튀르크 민족주의였지요. 종교만큼이나 사람들을 한 데 묶을 수 있는 것, 국가주의가 대두된 거지요. 앞서 셀축과 시린제에 오랫동안 살던 그리스인에 대해 말씀드렸어요. 그들처럼 아나톨리아에서 쭉 살아온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등 비튀르크계 공동체는 오스만 제국 후기부터 동화 압력과 차별을 받기 시작해요. 갈등은 공화국이 들어서며 더욱 첨예해지고, 쿠르드인을 제외한 많은 이들이 아나톨리아를 떠나 세계 각지로 흩어지지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공화국에 남은 이들도 당연히 있었어요. 세반 니샨얀은 바로 그런 배경하에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거지요.
아타튀르크의 공적이 너무도 혁혁했던지라, 아나톨리아에서 그에 대한 폄훼는 불법으로 간주되어요. 국민은 진심에서 우러난 애정과 존경심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요. 그런고로 그의 사진은 어디에나 걸려있어요. 마트에도, 빵집에도, 미용실에도, 정육점에도, 병원에도. 누가 알았겠어요? 내가 내 부모의 얼굴보다 터키 공화국 국부의 얼굴을 더 자주 보며 살아갈 줄요. 그에 대한 존경을 보이지 않는 것은 국가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어요. 심지어 내가 처음 이스탄불로 이주해 동사무소에 갔을 때도, 거주증 서류를 떼줘야 하는 공무원이 내게 묻더군요. 아타튀르크를 사랑하세요? 아니라고 하면 도장을 안 찍어줄 분위기였지요. 그런 아타튀르크가 세운 공화국을, 니샨얀은 2008년 《잘못된 공화국Yanlış Cumhuriyet》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직설적으로 맹공격해요. 암살의 표적이 된 배경에는 이 책의 출간을 비롯해, 그의 여러 도발적 언행이 복잡하게 얽혀있지요. 유력 피살자 신분이 된 그에게는 경찰관이 상시로 들러붙었어요. 너무 동행한 나머지 어느새 형제처럼 가까워진 경찰들은 그에게 귀띔했어요. 이번엔 진짜 위험해, 그들이 정말로 널 죽일 거라고. 니샨얀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아무리 보호받더라도 죽을 바, 차라리 명예롭게 죽자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중지를 치켜드는 동작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기기로 했다지요. 기나긴 첫 번째 동기가 이제야 끝났어요. 석굴 무덤을 만든 두 번째 동기는 이보다 간단해요. 당시 수학 마을에 기념비를 하나 세우고자 조각가들이 오갔다고 해요. 니샨얀은 그들이 들고 오는 추상적이며 현대적인 제안안에 수긍할 수 없었어요. 기념비란 자고로 천 년 이상 가는 재료를 써야 하며, 유행 타지 않는 스타일이어야 한다고 고집했지요. 세 번째로, 그는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고자 했대요. 이득과 계산에 의존하지 않고,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을 가졌다지요. 그는 사회적 의무나 내세를 염두에 둔 의식도 종내에는 이익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천박한 이기주의라고 비판했어요.
자, 이제 실행 단계로 넘어가 보지요. 일단 니샨얀은 돈과 기술자가 필요했어요. 그는 자동차를 사려고 모은 돈을 마을 수리공들에게 지급하기로 해요. 어차피 이런 석굴 무덤은 2천 년 이상 지어진 적이 없기에, 전문가랄 것이 딱히 없는 분야였지요. 그는 수리공들을 차에 태운 후 페티예로 가서 리키아 시대 석굴 무덤을 보여주고, 우리가 바로 저런 것을 지을 거라고 선언하지요. 여기서 니샨얀이 기록한 것을 그대로 인용해 볼게요.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요? 수리공들과 나는 자문했다. 별로 미덥지 못했지만 알라는 위대하시니, 외치며 우리는 일에 착수했다.”
<다음편에 계속>
이리스 불불리안은 세반 니샨얀의 이모할머니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오페라 가수였어요. 니샨얀은 그녀의 이름을 따 자신의 딸 이름을 이리스로 짓기도 했지요. 아르메니아 음악을 전혀 들어본 적 없다면, 입문용으로 이 앨범이 어떨까요? 한국에는 아르메니아 대사관이 부재할 정도로 양국의 교역 규모가 작지요. 그래서인지 우리는 아르메니아의 지리나 문화, 역사에 대해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던 듯해요.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어느 튀르키예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아르메니아’가 ’아메리카’로 오역되는 경우를 보았어요. 터키 공화국 초기의 민족 갈등이 주 소재라, 아르메니아를 지칭함이 매우 중요한 대목이었는데도요. 아나톨리아에서 멀지 않은 그 땅을, 조만간 직접 방문해 당신께도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군요. 당신께서 이 앨범을 어떻게 들으실지도 매우 궁금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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