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토리를 만난 건 닷차라는 에게해 전원 마을에서예요. 로도스섬과 코스섬 사이 볼록 튀어나온 천혜의 반도. 베를린을 떠나와 나는 닷차에 여덟 달 동안 머물렀어요. 내가 머무르던 별장은 오래 방치되어 수리할 곳이 많았지만 고즈넉하고 아늑했어요. 널따란 공용 마당과 테라스가 딸려 있어, 해 질 무렵이면 야외에 식탁보를 깔고 상 차리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지요. 거기 들락거리는 떠돌이 동물들이 즐거움을 더했어요. 화분에 무얼 심어놓기만 하면 전부 휘젓거나 엎어버리는 통에 원예에는 두손 두발 들었지만, 그 애들은 화초를 돌보는 것보다 더 큰 보람을 가져다줬지요.

어느 날 뚜벅뚜벅 홀로 나타난 토리는 태어난 지 대여섯 달이나 되었을까, 싶은 새끼 고양이였어요. 흰 몸에 회갈색 점무늬와 줄무늬가 난 속칭 고등어 고양이였지요. 역삼각형 얼굴에는 말간 초록 눈이 콕 박혀 있었어요. 그때까지 다른 동물들에게는 이름을 붙여준 적 없었지요. 정이 들까 봐서요. 그러나 토리는 내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우리 마당을 떠나지 않았고, 잠시 사라졌다가도 꼭 돌아왔어요. 내가 외출이라도 하고 돌아와 문을 따면 풀숲에서 곧장 튀어나왔지요. 늦잠을 자느라 아침밥을 안 주면 부겐빌레아 나무를 타고 침실이 있는 2층 창가로 올라와 야옹거리며 나를 깨웠어요. 영리하고 생존 본능이 강하며 집요한 고양이였지요. 가끔 할인하는 닭고기를 사다가 푹 고아 동물들에게 나눠주곤 했는데, 이 새끼 고양이가 어찌나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든지요. 게다가 삶은 닭을 몇 차례 먹고 나더니 코끼리 삼킨 보아뱀처럼, 먹은 닭만큼이나 몸피가 불어났어요. 그 후로 이 고양이를 닭, 토리とり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나는 대대로 양계를 하던 집에서 태어났어요. 할아버지는 해방 이후 기반이 전무하던 한국에서 양계업에 도전하셨고, 일본에서 대부분의 양계 지식이나 노하우를 얻으셔야 했어요. 어릴 적, 70년대에 그가 《니와토리 노 켄큐鶏の研究》, 즉 ‘닭의 연구’라는 일본 잡지를 구독해 읽으셨다고 들은 적 있어요. 일어로 닭을 니와토리라고 부르는구나. ‘계’라는 한 음절 단어가 무려 네 음절로 불어난다는 게 매우 신기하게 와닿았어요. 그날 이후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지요. 토리 에이모스로부터 고양이 이름을 따온 거니? 가끔 무구한 얼굴로 묻는 친구들에게, 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해요.
토리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나서, 특별히 보살피던 마당 고양이 몇몇을 포리, 모리, 수리 등으로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뿐 대단한 의도가 담긴 작명은 아니었지요. 하루는 마당에서 레몬을 따다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토리를 부르는데, 옆집 아주머니가 내 등을 두드리셨어요. 레몬을 아직 딸 때가 안 됐나? 화들짝 놀란 내가 고개를 돌리자,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아주머니가 물으셨어요. 자기, 근데 애들 이름은 왜 그렇게 지은 거야?
옆집 아주머니 줄리는 두드러진 런던 억양으로 나를 자기, 혹은 내 사랑이라고 부르곤 했어요. 그녀는 어릴 때 런던으로 이주해 평생을 살다 몇 해 전 영구 귀국한 흑해 사람이었어요. 본명은 귈아이셰Gülayşe지만 흑해 방식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줄리가 되고, 따라서 줄리는 영어 이름이 아니라 흑해식 애칭이라고 강조했지요. 실제로 흑해 지방에서는 폰토스 그리스어 영향으로, ‘ㄱ’ 발음이 ‘ㅈ’로 바뀌는 구개음화가 종종 일어난대요. 줄리의 설명에, 나는 ‘김치’를 ‘짐치’로 발음하시던 당진 출신 할머니를 떠올렸어요. 내 사랑, 런던에서 난 죽어라 일만 했어. 먹고 자고 공장, 먹고 자고 공장, 그뿐이었지. 여기 생활은 내게 꿈이야. 난 얘들이 있는 이 땅에 묻힐 거야. 여기서 줄리가 가리킨 얘들이란 그녀 집에 드나들던 동물들이었으며, 여기 생활은 그들에 에워싸인 삶이었어요. 난 비유를 드는 게 아녜요. 그녀 집 정문과 후문 하단에는 너비 두 뼘 남짓한 고양이 전용 문이 나 있고, 텔레비전 아래에는 구유처럼 생긴 고양이 요람이 서너 개 놓여 있었어요. 위층 방 하나는 고양이 침대가 양 벽을 따라 일렬로 놓여 있어 기숙사를 방불케 했고, 그 방과 연결된 베란다밖에는 고양이들이 놀도록 공중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어요. 고양이들은 거대한 천막을 트램펄린 삼아 노닐었지요. 나는 천막 위에서 다른 고양이와 레슬링하는 토리를 몇 번이나 목격했어요.
줄리 집에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고양이들만 못해도 서른 마리 이상이었어요. 거기다 철새처럼 다른 데서 여름을 나고 겨울마다 다시 돌아오는 고양이, 사라졌다가 자꾸 새끼를 배서 돌아오는 고양이 등 단기 투숙객들도 여럿이었지요. 그들은 저마다 모두 이름을 가졌어요. 파샤, 돔빌리, 검은 시린, 하얀 시린, 파파탸, 아지즈…. 게다가 뒷마당 테라스에는 대형 들개 두 마리, 피크리와 제이노가 상주했어요. 그 애들 이름을 붙여준 것도 줄리였지요. 줄리는 작명을 너무 좋아해 동물들을 그만큼 들인 사람처럼, 이름을 새로 지을 때면 얼굴이 달덩이처럼 푸근해졌어요. 게다가 그녀가 붙여준 직관적 이름들은 생명체 각각과 잘 어우러졌지요. 더 오랜 시간을 여기서 보내며, 나는 줄리가 보여준 행동이 얼마나 아나톨리아스러운 것이었는지 깨달아 가요. 이 땅 사람들은 정말이지 작명을 좋아한답니다. 이 기호 행동은 비단 동물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적용되지요.

이스탄불로 오고 나서, 몇 달 동안은 가구 장만에 힘을 쏟았어요. 인플레이션이 극심해 모든 가구를 새것으로 구입하기에는 부담이 컸어요. 발품을 팔다 동네에 중고 가구점들이 늘어선 길목을 발견했지요. 개중 간판도 장식이랄 것도 없는, 아니, 어떠한 질서도 존재하지 않던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어요. 활짝 열린 대문 안에는 어떤 남자가 죽은 듯 똑바로 누워 있었어요. 옆에 놓인 진공관 라디오에서는 구슬픈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지요. 뉘크헷 두루의 곡이었어요. 《모피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쓴 비운의 소설가이자 시인, 사바하틴 알리가 작사를 맡았노라 기억하고 있었지요.
친구도 연인도 없이
세상과 동떨어진 미치광이,
(그런) 나를 감싸는 멜랑콜리
(그런) 나를 감싸는 멜랑콜리

멜랑콜리의 화신 같은 오스만풍 가구들에 감싸여 신세 좋게 낮잠을 자고 있던 것은 주인 타네르 씨였어요. 그날 이후 한 계절 내내 타네르 씨네 가게에 들락거리며 거의 모든 가구를 그에게서 샀어요. 책꽂이, 신발장, 스탠드 조명, 외투걸이, 서랍장, 책상, 의자···. 가게에 없는 가구는 그에게 부탁해 나뒹구는 자재들을 자르고 붙여 제작했어요. 내가 장롱도 하나 필요하다고 하니, 타네르 씨는 자기 걸 사면 어떠냐고 대뜸 제안했어요. 그길로 그의 집에 가, 마호가니로 짜인 장롱을 보고 그걸 샀어요.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곧 가게와 집을 모두 정리하고 떠날 참이기 때문이었어요. 목적지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프놈펜이 유력했지요. 그는 종종 그렇게 떠나곤 했던 모양이었어요. 그 거리 목수와 배달원들 모두 그를 타흐타바울tahtabavul이라고 불렀거든요. 목재 여행용 가방을 뜻하는 그 단어만큼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별명도 없다고, 타흐타바울 타네르는 언제고 저렇게 훌훌 떠난다고, 목수들은 털어놓으며 씁쓸하게 웃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목수들도 제각각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어요. 평균 60대 남성들이 별명이라니, 새어나는 웃음을 참을 길 없었지요. 어르신들 서로 별명 부르시는 걸 보니 소년들처럼 보여요. 내가 농담을 건네자 레트로라고 불리는 어느 가구상이 말해요. 아타튀르크도 따지고 보면 별명 아니우? 정복자 파흐티도 마찬가지고. 이 땅에서 별명 없이는 역사도 없다우.
튀르키예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건 1930년대에 들어서예요. 오늘날 쓰이는 성씨들은 불과 서너 세대 남짓 물림 된 셈이지요. 고대부터 성씨를 사용하던 동아시아와 비교하면 무려 수천 년이나 차이가 나요. 그전까지는 고정된 성 없이 부칭이나 출신 도시명을 이름 뒤에 붙였었대요. 이토록 성씨 도입이 늦었던 배경에는 세습 귀족의 성장을 견제했던 오스만 제국의 통치 방식이 크게 작용했어요. 술탄이 토지의 최종 소유권을 가지던 오스만 제국은, 특정 가문이 세습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견제하려 했지요. 제국이 멸망하고 공화국이 건국되며,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굵직굵직한 현대화 제도를 구축했어요. 성씨 제도도 그 일환으로 도입되었지요. 단시간 내 급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였던 지라, 성씨 제도도 긴급하게 추진되었어요. 국민은 길이길이 남을 성씨를 단 두 해 내로 등록해야 했지요.
정육점 아들, 닭 장수 아들, 요구르트 장수 아들 등 직업에서 따온 성씨들이 다수를 차지했어요. 출신지를 성으로 삼는 경우도 많았죠. 동네에서 기존에 불리던 별명을 그대로 성씨로 채택한 경우도 있었어요. 용감하다고 해 겁 없는 자Korkmaz, 양 끝으로 말려 올라간 콧수염을 길렀다고 해 카이젤 콧수염Palabıyık, 외눈이라고 해 외눈박이Tekgöz 등, 생김새나 성정으로 인해 붙은 별명이 성씨로 굳어진 거지요. 웃지 못할 일화들도 생겨났어요. 나는 디야르바크르 출신 화가를 만난 적 있어요. 그의 말에 따르면, 성씨를 등록할 당시 그의 조부모는 튀르키예어를 구사할 줄 몰랐대요. 쿠르드족이 집중 분포하는 디야르바크르에서는 오랫동안 당연지사 쿠르드어가 사용되었거든요. 두 언어는 비슷할 것 같지만 소통이 아예 안 될 만큼 달라요. 담당 공무원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화가의 조부모와 여기 사는 거 맞느냐 실랑이를 벌였던 모양인지, 그들에게 ‘살다’라는 의미의 기본 동사, 오투르막Oturmak이라는 성씨를 덜렁 붙여줬어요. 그들은 의미도 모른 채 그 단어를 성으로 삼게 됐지요.
모든 튀르키예 성씨가 흥미로운 일화를 지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고작 백여 년 전에 지어진 성씨들을 일별하며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해요. 작명은 다만 엄숙한 행위가 아니라, 일화를 남기는 일에 가까울 수 있음을 배웠지요.
아침에는 바다로 산책을 나가다가 마트가 개장하는 걸 봤어요. 점장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은 양손으로 밀던 팔레트 트럭을 멈추고 허리를 숙이더니 투덜거렸어요. 슈쿨페 마님, 그냥 사료는 도통 잡수지를 않는군요. 아주 술탄 납셨어요! 생선 드릴 테니 이리 냉큼 오세요! 장모 삼색 고양이는 진정 슈쿨페가 아니고서는 배길 수 없는 고풍스러운 걸음으로 마트 남자 뒤를 유유히 쫓아요. 한국말로는 금옥 같은 이름에 비할 수 있겠다고 나는 생각해요. 마트가 있는 언덕에서 내려와 해변을 걷는데 자꾸만 킥킥 웃음이 나요. 슈쿨페 마님. 이 지구에 태어나 거리를 떠돌며 원하지 않는 새끼만 실컷 낳고 누구의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다가, 암흑 속에 명을 다했을 슈쿨페 마님.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한 그녀는 슈쿨페가 됨으로써 이렇게 내 머릿속에 도도한 노파의 모습으로 깊이 각인되었어요. 어쩌면 가장 훌륭한 작명은 웃음을 자아내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일지 모르지요. 당신도 오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엷게나마 미소 지으셨나요.
프놈펜으로 진정 떠났던 타흐타바울 씨를 얼마 전 동네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떠난 사이 그가 가게로 쓰던 건물은 헐렸지요. 그의 가게에 있던 가구 대부분은 우리 집으로 이식되었고, 사라진 가게의 영혼은 이 곡으로 연기처럼 남았어요. 애절한 뉘크헷 두루의 목소리가 인상 깊었다면, 더 위켄드가 샘플링한 ‘Ben Sana Vurgunum’도 추천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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