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과 중 가장 귀한 시간은 당신에게 이렇게 한국어로 편지를 쓸 때예요. 이 시간이 오면, 내 고양이가 키보드에 올라 앙탈을 부려도 눈길조차 주지 않아요. 당신은 그려볼 수 있나요? 한국어로 대화 나눌 상대가 손에 꼽을 만큼 적어진 나를. 모국어 쓰는 시간이 서서히 단축된 탓에, 나는 한국어로 격조 있게 말하는 법을 잊었어요. 유념해 달라거나, 혜량해 달라거나, 이게 전부 내 부덕의 소치라는 말을 할 줄 모르게. 그에 비해 영어는 온종일 내 입에 들러붙어 있어요. 그렇다고 고품격 표현을 쓸 줄 아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난 그 언어로 여태 벌어먹었어요. 독일어는 어떻게 됐냐고요? 우버 기사의 푸념에 동조할 수준은 되던 독일어는 벌써 내 머리에서 물러나는 중이에요. 카불을 떠나던 미군 수송기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르키예어는 페트리 접시 위에서 이제 막 불어가는 강낭콩이지요.
미흡할지언정 여러 언어를 뒤섞어 사용하다 보면, 유독 특정 언어로만 쓰게 되는 단어들이 있어요. 번역이 불가한 단어라서? 대체로는 그렇지요. 그러나 얼추 번역이 가능한데도 타 언어로 치환하지 않는, 그러고 싶지 않은 경우가 종종 생겨요. 우리는 모든 손가락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지요. 그러나 눈두덩에 아이섀도를 바를 때 난 꼭 약지만을 써요. 그러니까 그 약지 같은 단어들이 존재하는 셈이죠. 이민자들의 내면에는 약지 단어들이 저절로 자라나는 듯해요. 반세기를 캘리포니아에서 보낸 내 고모는 언젠가 내게 보이프렌드 없느냐고 물어왔어요. 코로나가 터져 독일 정부에서 보조금을 나눠줬을 때, 한인 모임에서 어느 친구는 그 돈 레벤스미텔 사는 데만 써야 한다고 일러주었어요. 남자친구나 식료품이라는 한국어 단어가 분명 있지만, 보이프렌드와 남자친구 사이에는 좁다란 실개천이 흘러요. 40년대에 태어나 60년대에 한국을 떠난 고모가 젊은 시절 연모한 이는 남자친구가 아닌 보이프렌드였을 터에요. 그에게 이 단어는 남자친구와는 다른 정동을 불러일으켜요.
과거 드넓은 제국이었으며 동서를 잇는 교역로였던 탓에, 아나톨리아에는 산지나 유입지 이름이 붙은 작물이 많아요. 양배추나 양파처럼 뭉뚱그린 이름이 아니라 제법 구체적이지요. ‘몰타 자두(Malta Eriği)‘는 비파 열매를 가리키고, ‘트라브존[1] 대추야자(Trabzon Hurması)’는 감을 뜻해요. 옥수수는 이집트의 곡물도 아닌 ‘이집트(Mısır)‘ 그 자체로 불려요. 비슷한 예시로 오렌지를 빼놓을 수 없어요. 포르투갈에서 건너왔다고 해 ‘포르투갈의 것(Portakal)‘이라 불리지요. 많은 나라에서 ‘터키’라 불리는 칠면조는 여기서 ‘인도산 가금류(Hindi)‘ 취급을 받아요. 더불어 코코넛은 ’인도 호두(Hindistan Cevizi)’고요. 매대에 깔린 먹거리들을 스쳐 갈 때면 근래 성전환한 벗을 마주친 기분이 들어요. 나는 오렌지를 만나는 거예요. 오, 바람 소리 공명하는 벼랑에서 렌, 유음의 물살을 타고 지, 흐트러짐 없이 착지하던 그. 나의 벗 오렌지는 서른 해 이상 내 누운 가슴 위에 이런 식으로 내려섰어요. 산스크리트어에 어원을 둔 이 단어는 독일어로도 ‘오헝쥐’로 유사해서, 다른 각도에서 그를 볼 기회란 없었어요. 단단한 정원의 주황색 물체에 거센소리를 결부시켜 본 적은 없었지요. 그러나 웬걸, 나는 이제 거센소리 파열음이 세 개나 들은 튀르키예어 단어가 아니고서는, 입안에 터지는 새큼함을 충실히 표현해 내지 못할 것 같아요. 나는 그 과일이 ’포르타칼’인 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어요.
지난가을 내가 한국에 다녀온다고 하자, 당신은 고양이를 어쩔 셈이냐고 물었어요. 다행히 친구 부르친이 내 고양이를 흔쾌히 맡아주었어요. 고양이를 데리러 갔을 때 부르친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그는 아다나 사람인데 공립학교 교사예요. 튀르키예에서는 초임 공무원이라면 환경이 열악한 동부나 남동부에서 몇 해간 복무해야만 한대요. 부르친의 첫 발령지는 하꺄리Hakkâri였어요. 하꺄리는 이스탄불에서 동쪽으로 천 삼백 킬로 떨어진 도시인데, 이스탄불에서 그만큼을 서쪽으로 달리면 로마에 닿을 수 있을 정도이니 그 거리가 짐작 가시겠지요. 하꺄리에서 부르친은 학교 앞 문구점을 찾게 됐어요. 그는 고향에서 묻던 대로 삿담 테이프 있어요? 하고 물었지요. 문구점 주인은 난처하다는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어요. 그게 대관절 무슨 테이프요? 당신은 짐작이 가시나요, 삿담 테이프가 무엇일지?
부르친의 고향 아다나에는 인질릭이라는 공군기지가 들어서 있다고 해요. 나토 연합군이 튀르키예군과 함께 사용하는 기지인데, 걸프전 때 ‘사막의 폭풍 작전‘ 일부가 이곳에서 수행됐으니 그 전략적 중요도를 가늠할 만해요. 1992년 이라크는 연합군에 완패했지만 사담 후세인 정권은 계속 맥을 이어갔어요. 아다나 주민들은 사담 후세인이 보복 폭격을 가할까 봐 공포에 떨었어요. 진노한 그가 아다나에 핵폭탄을 던질 거라고 믿었죠. 겁에 질린 사람들은 창틈마다 셀룰로이드 테이프를 붙여 외부 공기를 차단하기 시작했어요. 봉쇄에 쓰인 테이프는 머잖아 ‘사담의 공격을 막을 테이프’, 시간이 더 흘러서는 ‘사담 테이프Saddam Bandı’로 명명되었죠. 수년 후 아다나에 무명의 테이프는 존재하지 않게 됐어요. 테이프란 테이프는 전부 사담이라는 호를 받았지요. 아다나에서 나고 자란 부르친은 당연히도 이 명칭이 전국적으로 통용될 것이라 여겼대요.

부르친이 이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다른 친구들은 ‘사담 테이프’가 등장한 문구점 대목부터 폭소하기 시작했어요. 정확히는 ‘삿담 테이프‘가 언급되던 순간부터요. 내 귀에 ‘삿담’은 ‘읏-따’하는 장구 구음처럼 분절되어 들렸어요. 두 음절은 철저히 쪼개져 차라리 ‘사읏담‘에 가까운 소리를 냈는데, 때문에 나는 맥락조차 파악할 수 없었어요. 사읏담이 대체 뭐길래들 그래?
걸프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사담 후세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이라크전 발발 즈음이에요. 2003년 그의 이름은 양복에까지 카우보이 부츠를 받쳐 신던 어느 텍사스 농장주의 입을 빌어 한국의 공영방송을 타고 열두 살이던 내게 전해졌는데, 그 발음인즉슨 ‘새다암 훗세인’에 가까웠어요. 사담 본래 이름에 깃든 엄격함은 남하하는 아들 부시의 입꼬리를 따라 땅에 쏟아졌어요. 호전성 결락된 그 이름은 마치 ‘마담‘의 변주처럼 부드러우며 유용하게 들렸지요. 이날 깨달은바, 내가 줄곧 알던 그의 이름은 사담을 배 아파 낳은 모친과, 그가 탄압한 자국민과, 그에게 교수형을 내린 판사가 부르던 이름과는 멀디 먼 것이었어요. 예컨대 이스탄불에서 하꺄리만큼이나.
아들 부시가 하필 남부 억양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사담의 이름을 원어에 가깝게 기억할 수 있었을까요? 혹은 사담의 이름이 미국 남부식으로 공표될 일 없었다면, 세상에 유통되었을 아이러니의 총량은 줄어들었을까요? 새다암 훗세인의 죽음은 과연 사읏담 휘세인의 죽음보다 우월하고 유익한 죽음이었을까요? 보송보송하던 내 정수리에 흰머리가 돋아나는 동안, 힘의 구도는 조금이라도 달라졌나요?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테이프가 양산되고 있지 않음을 호언할 수 있나요?
이런 상념에 빠져 허우적대다 보면 정육점에 진열된 살점들도 달리 보여요. 오늘은 인도 새가 먹고 싶네. 욕망하며 한숨 같은 히읗이 불쑥 튀어나올 때, 나의 뇌는 품에서 달아나려는 고양이처럼 방향을 돌려 원점으로 돌아가요. 힌디(Hindi)에서 푸테(Pute)[2]로, 터키(Turkey)로, 그러다 마주하는 것은 펄떡이는 붉은 심장 하나예요. 주먹만 한 심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벨에서 갈라진 인도 새의 이름들이 깨알같이 적혀있어요. 열 맞춰 새겨진 이름들은 솟거나 꺼져 이랑과 고랑이 되고, 심장은 점점 차라리 뇌와 더 닮아가요. 울룩불룩한 표면에 작지만 영롱한 눈이 두 개 박히고, 그 사이로 부리가 쑥 솟아나요. 나는 곧 부리에서 저돌적인 울음이 새어 나올 것을 직감해요. 미지의 땅에서 울려 퍼졌을 분열된 소리가. 그러나 놀랍게도 소리 대신 분열된 것은 얼굴 그 자체예요. 미끌미끌한 정육점 소파에 앉아 나는 붉은 전등 위를 응시해요. 색이 각이한 일곱 개의 칠면조 얼굴이 거기 둥둥 떠다녀요. 언어를 배우거나, 동의어로 이야기를 듣는다함은 그 얼굴들을 모두 간직하려는 의욕에서 비롯된 행위예요. 삿담 테이프는 내가 부르친으로부터 거둔 하나의 얼굴이고, 내가 이 이야기를 씀으로써 당신에게도 그 얼굴의 탁본이 전해졌어요. 이스탄불에서, 나는 낯선 얼굴을 낚으러 매일 길을 나서요. 가끔 모르던 색의 얼굴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꽉 차곤 해요.
셀다 바으잔은 가장 중요한 민중 가수 중 한 명으로 꼽혀요. 고발성 가사를 중독성 있는 아나톨리아 전통 멜로디에 녹여내 캐치한 명곡들을 만들었지요. 한창때 그녀 음색은 누구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에요. 호소력은 또 얼마나 짙은지요. 모스 데프도 그녀의 음색에 반해 샘플링한 바 있지요. 그녀 곡 중, 저항 시인 아슈크 마흐주니 셰리프가 쓴 이 곡을 가장 좋아해요. 나는 성직자도 아니고, 부적도 안 써줬고, 순례자도 아니고, 메카에도 안 가 봤어. (하지만) 나는 강자 편에 서서 약자를 짓밟은 적 없어. 만약 내가 부정한 자에게 고개 숙였다면, 날 야유해도 좋아. ‘유yuh!‘는 이곳 사람들이 야유하는 방식이랍니다. 단전에서부터 힘을 끌어모아 동그랗게 만 입술 사이로 터뜨려 보아요. 유! 바로 그거예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