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검푸른 수풀에 이어)
왹템 아이쿳은 내가 자주 방문하는 갤러리예요. 큐레이션이 훌륭한 것은 물론, 위치 또한 완벽에 가까워요. 이스탄불에서 가장 화려한 동네, 베이올루의 메쉬루티옛 길에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오스만 말기부터 이 근방에는 카지노, 카바레, 나이트클럽, 백화점 등이 늘어섰어요. 보수적인 무슬림 어머니들은 딸들이 이 타락한 동네를 서성거렸다는 사실만으로도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고 하지요. 서구 문화가 그토록 꽃을 피운 데에는 기차역에의 접근성이 한몫했어요. 파리에서 출발한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메쉬루티옛 길에서 가까운 시르케지 역에서 종착했으니까요. 거기서 내린 유럽인들은 이 길의 페라 팰리스 호텔이나 브리스톨 호텔 등에 머물렀어요. 특히 페라 팰리스 호텔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묵으며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왹템 아이쿳이 현재 쓰는 건물도 그 시절 것으로, 18세기 초 프랑스 정부에 의해 문화원 용도로 지어졌지요.
아시아 구역에 사는 내가 그 갤러리에 가려면, 일단 페리로 바다를 건너야 해요. 그렇게 유럽 대륙에 도달해서는 윅섹 칼드름 언덕을 올라야 하지요. 언덕은 너무도 가팔라 강삭철도가 설치되어 있어요. 단 한 정거장일 뿐이지만 그걸 타는 편이 이로워요. 오르막이 많은 유럽 구역에서는 체력을 잘 분배해야 하거든요. 철도 정거장에서 나오는 순간 진짜 이스탄불, 탁심 광장이 눈앞에 펼쳐져요. 과거 사대문 안만 서울로 쳐주었던 것처럼, 여기 사람들도 거기부터가 진짜 이스탄불이라고들 해요. 여정은 고단하지만 매 구간이 이채로워요. 골목에서, 선착장으로, 페리에서, 강삭철도로, 터널을 지나, 다시 골목으로. 그 자체가 벌써 전시 도입부나 다름없지요. 최근 갤러리에서 작은 공연이 열릴 거라고 해, 어느 토요일 그곳을 찾았어요.



갤러리 한편에는 보면대와 검은 의자, 낮은 탁상 하나가 놓여 있었어요. 나이를 분간할 수 없는 무대의 주인공에게 필요한 기물들이었지요. 악기라고는 일체 찾아볼 수 없었어요. 주인공은 흑백 세로줄 무늬 셔츠를 입고 머리칼을 헐겁게 묶어 흩뜨렸어요. 그녀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자, 살구만 한 자개 귀걸이가 그녀 귓불 아래에서 덜렁거려요. 두터운 눈두덩에 칠해진 검푸른 아이섀도는 그녀의 흰자를 더욱 희게 밝혀요. 순간 나는 참임이 틀림 없는 명제 하나를 인식해요. 이 중 가장 멀리서 온 사람은 우리 둘이다. 그녀가 모서리로 걸어가 손짓하며 말하기 시작해요. 구연동화라도 시연하듯 발음이 또렷해, 여기 말에 서투른 나도 쉬이 알아들을 수 있어요.
나는 짐가방을 둘러메고 언덕에 오릅니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요.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몰라요. 두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지요. 하지만 올라야 합니다. 그 사실만을 알아요. 언덕에 오르자, 거대한 이 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네요. 높이가 이십 미터나 될 법해요. 크기만 할 뿐 아니라, 아주 오래된 문이군요.
그녀는 문을 열고자 해요. 힘껏 당겨도 보고, 몸의 무게를 실어 밀쳐도 보지요. 그녀의 동작과 소리에서 난 언젠가 포즈난 근교에서 본 그니에즈노 청동 문을 떠올려요. 삼손이 밀쳐도 꿈적하지 않을 듯 육중하던 그 문을요. 진척 없이 제자리걸음 하는 그녀 숨이 가빠오기 시작해요. 헐떡이며, 그녀는 걸음에 하중을 더 실어요. 굽이 거의 없는 그녀의 첼시 부츠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터질 것만 같아요. 문에서 주전자 끓는 소리가 나더니, 이는 곧이어 그녀가 내지르는 울음소리가 돼요. 둔기로 얻어맞은 듯 고통에 찬 소리는 염습실에 흐르는 곡소리로 조바꿈해요. 아, 아니군요. 이는 차라리 분만하는 여인의 새된 굉음에 가까워요. 이 문을 열어야만 하는, 저 너머로 건너가야만 하는 한 무더기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녀 입 밖으로 튀어나와요. 와글와글한 영혼들이 그녀 신체를 영매 삼아 연기처럼 빠져나와요. 그녀가 마침내 문을 열자, 포효하는 그녀 울음에 벽에 걸린 추상화가 부르르 진동해요. 그제야 나는 그녀 앞에 마이크도 하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요.
사아뎃. 문을 연 이의 이름 석 자가 이러해요. ‘행복’이라는 뜻의 아랍어 단어에서 온 이름이지요. 사아뎃 튀르크외즈의 부모는 동튀르크스탄에서 태어났어요. 오늘날 신장 자치구로 불리는 중국 영토지요. 사아뎃의 가족은 한족도, 신장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위구르족도 아닌 카자흐족이었어요. 마오쩌둥 치하 극심하던 소수 민족 탄압을 피해 그녀의 가족은 망명을 결심했어요. 그들은 파키스탄과 인도를 거쳐 이곳 이스탄불에 도착했지요. 그야말로 생사가 오가는 대탈출 끝에 사아뎃은 태어난 거예요. 그녀의 부모는 정착 후 그랜드 바자르에서 가죽 재킷을 만들어 히피 여행객들에게 팔기 시작했어요. 어린 사아뎃도 종종 바느질을 도왔지요. 그녀는 방과 후 가게에 나가 여행객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곤 했어요. 그러면서 세계를 유목할 꿈을 키워갔지요. 일찍이 사아뎃의 장래희망은 쿠란 교사였대요. 아랍어 기도문에 내재된 선율에서 즉흥 음악의 가능성을 보았고, 이에 깊이 매료되었다고 해요. 장성한 이후 그녀는 언니를 따라 스위스로 떠나요. 그곳에서 양로원 간병인으로 일하며 카자흐스탄과 튀르키예의 민속 음악에 프리 재즈를 결합한 독창적 음악 세계를 정립하지요.

사아뎃이 의자를 쓴 건 공연 막바지에 이르러서였어요. 걸터앉은 그녀는 허리를 푹 접어 머리칼을 땅에 질질 끌리게 해요. 낮은 곳에서, 그녀가 단조 멜로디를 배음으로 형성해 가요. 선율이 인터내셔널가처럼 자못 결연해, 내 안에 없던 민중 의식을 솟아나게 할 정도예요. 다시 몸을 일으켜 앉은 그녀가 합장한 양손을 바깥으로 뻗쳐요. 우아하게 회전하는 손목, 고속으로 요들하는 성대. 나는 단번에 그녀가 말 위에 올라 밤길을 횡단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어요. 허락도 없이 나는 그녀 뒤에 몸을 덜컥 실어요. 그녀의 상반신이 덜커덩덜커덩 앞뒤로 흔들릴 때, 나는 고원을, 호수를, 듬성듬성 자란 미루나무를 지나치며 달의 물큰한 내음을 들이켜요. 시린 공기에 콧구멍이 그만 뻐근해져요. 우리가 멀리 나아감에 따라 그녀의 몸이 더욱 세차게 요동해요. 그녀는 자꾸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멜로디 한 소절을 반복하는데, 같은 가락이지만 저지대를 지날 때와 고지대에 달했을 때 전혀 다른 소리가 나요. 나는 그 차이에 흠칫 놀라요. 그 일대 가장 높은 곳에 이르자 그녀가 고삐를 슬그머니 당겨요. 저 멀리서 돌풍이 불어오고 있어요. 아니요, 다가오는 형태를 보아하니 드론이나 몸집이 큰 독수리 같기도 해요. 내가 어찌할 틈도 없이 몹쓸 비행체는 사아뎃의 머리를 강타하더니 체내로 곧장 틈입해 그녀의 몸을 휘저어요. 사아뎃은 등자께로 몸을 늘어뜨려 발등을 벅벅 긁어요. 그러다 무릎을, 윗배를, 등허리를 긁어요. 마구마구 긁다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모든 걸 와락 토해 내요. 구토 섞인 울음은 웃음이 되고, 다시 천둥 같은 울부짖음으로 변모해요. 순간 내 눈에도 뜨거운 무언가가 고이더니 안장 위로 툭 떨어져요. 속절없이.
셰키의 시장으로 당신을 다시 데려가요. 나는 노파의 두 눈을 가져다 당신의 안와에 끼워요. 이제 당신은 지척의 소사보다 아스라한 원경을 더 선명히 볼 수 있어요. 당신은 잼인지 피클인지를 앞에 늘어놓고 나를 올려다봐요. 야반yaban. 그때 당신의 머릿속에는 페르시아어에서 파생된 단어 ‘야반’이 떠올라요. 길들여지지 않은, 황량한, 낯선 등의 의미를 지니는 이 단어는 유목민들이 자신이 모르는 세계, 저 바깥 황무지를 칭할 때 사용했어요. 여기에 ‘-cı’라는 접미사를 붙이면 ‘야반즈yabancı’, 국외자나 외국인이라는 뜻이 돼요. ‘안녕, 낯선 사람’ 같은 관용적 표현이나, 카뮈의 《이방인》이 튀르키예어·아제리어로 번역될 때 이 ‘야반즈‘라는 단어가 쓰여요. 한국인인 나에게 이 단어는 어딘가 흉흉하고 괴팍하게 들리는데, 아마도 ‘들 야野‘ 자를 상기시켜서일 터예요. 그런데 소리뿐 아니라 의미적으로도 얼마간 유사한 데가 있어요. 야만이나 야생이나 야합 같은 단어는 모두 이 안이 아닌 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칭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옳았던 거예요. ’카자흐 사람’은 당신의 머리에 즉각 떠오른 후보였을 뿐, 당신이 진정 하고픈 말은 이것이었을 테죠. 너는 바깥에서 온 사람.
사아뎃과 그녀의 가족이 길 위에서 삼켜야 했던, 소화해야만 했던, 그러나 윗배에 얹히거나 역류해 버린 이물질의 정체를 나는 몰라요. 고향에 영영 돌아갈 수 없는 슬픔이 얼마나 비통할지 상상할 수도 없지요. 그들이 황무지를 횡단했다면, 나는 낮게 걸린 고무줄을 밟고 금을 넘어갔을 뿐이죠. 그러나 그녀 노래는 나 같은 뜨내기의 혈관마저 대번에 관통했어요. 사아뎃은 내가 안장에 몰래 오른 걸 알고도 눈감아줬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지긋이 미소 지어요. 거기서 프레임이 탁 멈춰요. 미동 없는 그녀의 머리 뒤로, 내가 까맣게 잊은 음파가 오로라처럼 흩어져요. 사막이 아니고, 들판도 아니고, 나를 둘러싼 양막에서 나던 박동. 아직 어떤 언어도 구사할 수 없었을 무렵, 내 외이를 가득 메운 태초의 노이즈. 결국 나는 이 안락한 소리를 찾아 소슬한 광야를 걷다 왔던가 봐요. 그리고 이제는 거머푸르레해진 그 광야를, 아직도 걷고 있나 봐요.
이제는 원로가 된, 스위스의 비디오 아티스트 피필로티 리스트가 1997년 제작한 루프 영상 설치 작품이에요. 사아뎃 튀르크외즈의 보석 같은 퍼포먼스가 담겨 있지요. 재치 넘치며 영민하고 육감적인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데서 좀처럼 얻을 수 없는 독특한 해방감을 선사해요. 달랑 몸통 하나로 이토록 생생히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음이, 그 주술적인 재능이 몹시 시샘 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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