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물에 상경해 첫 원룸을 얻은 동네는 서교동이었어요. 집 아래층에는 얇은 플라스틱 잔에 맥주를 따라주는 유명 맥줏집이, 건물 입구 오른편에는 손바닥만 한 이자카야가, 반대편에는 막걸리 포차가 있었어요.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지하 공연장 스트레인지 프룻이, 또 언덕배기를 오르면 클럽 빵과 레코드 바 곱창전골이 나왔지요. 베를린에 가서도 난 늘 유흥업소 근처에 살았어요. 명성 높은 클럽 베르크하인 옆에, 바들이 즐비한 괼릿처 공원 맞은편에. 이스탄불에서 나는 어김없이 또 그런 동네에 살아요. 이쯤 되면 기호가 쌓은 팔자래도 할 말이 없겠어요.
내가 산울림 소극장과 극동 방송국 사이에서 한 시대를 보내는 동안, 이스탄불의 젊은이들은 카디페 골목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에요. 당신이 한때 어디에서 밤을 시커멓게 탕진하셨는지 나는 알지 못해요. 하지만 그게 어디였든 설령 그런 적 없었대도, 카디페 골목은 당신께 분명 향수를 불러일으킬 거예요. 카디쿄이의 이 좁은 길목에는 수많은 바와 공연장이 늘어서 있어요. 낮에는 평범한 주택가처럼 보여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주말 밤이면 남들과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도통 걸을 수 없지요. 튀르키예 술값은 매우 비싼 편이에요. 그러나 바에 갈 돈이 없는 청년들도 이 골목에 굳이 비집고 들어와 분위기를 내곤 해요. 한껏 멋을 부린 이들은 구석에 앉거나 서서 마트에서 산 보드카를 병째 들이켜고, 틱톡에 올릴 영상을 찍어대느라 분주하지요. 자정이 지나면 골목 바닥은 벌써 얼룩진 피자 박스와 담배꽁초로 발 디딜 틈 없어져요. 오토바이와 경찰차, 여행객과 현지인이 어지러운 비트 소리와 얽혀 덩어리째 흐르지요. 곡절 많은 탁류처럼 우렁우렁.

카디페 골목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랑받은 바는 세 층을 통으로 쓰는 칼가Karga일 거예요. 1996년에 문을 열었지요. 초록색으로 칠해진 건물 입구에는 ‘칼가’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까마귀 표식이 붙어있어요. 나이 지긋한 기도에게 인사를 건네고 바에 들어서면 음침하면서도 정숙한 기운이 표피에 스며요. 중세 시대에 내가 밀회를 가져야 했다면, 이런 분위기의 포도주 창고나 기도실을 골랐을 거예요.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느낌을 받은 건 나뿐이 아닌 모양이에요. 얼마 전 어느 연속극에서 칼가가 촬영 장소로 쓰인 것을 보았거든요. 투박하게 양각된 목재 바를 지나 매장 내부로 들어가면, 벽난로 옆에 장작이 켜켜이 쌓여있는 걸 볼 수 있어요. 거기서 청동 뱀 기둥을 붙잡고 흑갈색 나무 계단을 올라요. 삐걱거리는 계단참에 고목 냄새가 훅 끼치지요. 아칸서스 장식으로 꾸며진 단철 난간 틈새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쏟아져요. 공연장이 마련된 꼭대기에 다다를 때까지 층층마다 다른 질감의 소란이 들려와요.
칼가의 야외 테라스 중앙에는 입식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어요. 담배 연기 자욱한 그 테이블에서는 모르는 사람끼리도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눠요. 어느 밤 뿌연 연기 속에서 무스타파라는 사내를 만난 적 있어요. 그는 자주 출퇴근 도장을 찍는 모양인지, 단골들을 한데 불러 모아 내게 소개해 주었어요. 우리는 그 후 칼가에서 자주 마주쳤어요. 최근 그는 친형제 엠레와 함께였어요. 교량 엔지니어라는 엠레는 보스포루스 제3 대교 프로젝트에 투입되었을 때 한국인들과 일했노라 운을 띄워요. 몇 년 동안이나 함께 일하며 한국 문화를 적잖이 배웠다고요. 그들이 얼마나 밤낮 없이 일하던지, 파김치가 될 때까지 일하고도 소주를 얼마나 퍼마시던지, 그러고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얼마나 멀끔히 출근하던지, 그는 분더카머에 전시된 요물이라도 묘사하듯 연설을 이어 나가요. 이 한국인들은 우리 지중해인들에 비하면, 모든 면에 있어 극단적입니다. 우리와 달리, 그들은 끝까지 가요. 이야기를 듣던 무리는 서너 명에서 다섯 명, 여섯 명, 일곱 명으로 점차 늘어났어요. ‘운명전쟁49’처럼 정신 나간 서바이벌 쇼는 본 적이 없어! 누군가 외치고, 레벤트 구역에 참숯 갈비 가 본 사람 있어? 누군가 물어요. 물론이지, 거기서 돼지고기 파는 것도 봤다고! 돼지고기 없는 이 나라에서 흥분한 아무개가 답해요. 꼭 그 한국인들처럼 이스탄불에 온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알아? 그때 파이프를 움켜쥔 연로한 이가 연기를 뿜어 공기를 팽창시켜요. 독일인들. 기차역을 짓기 위해 독일 제국에서 파견 나온 엔지니어들. 라거로 꾹꾹 채워진 그들 혼이 지금 우리 얘기를 엿듣고 있어. 여기 칼가가 바로 그들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거든.

설왕설래에서 건져낸 바에 의하면, 초록색 칼가 건물은 거기서 2km 남짓 떨어진 하이다르파샤Haydarpaşa 기차역을 짓기 위해 독일에서 파견된 건축가와 엔지니어, 인부들의 숙소였대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무릎을 탁 쳤어요. 칼가와 하이다르파샤 역 사이 구역을 옐데이르메니Yeldeğirmeni라고 불러요. 풍차 마을이라는 뜻이지요. 젠트리피케이션이 한창 진행 중인지라 최근에는 한국인 관광객들도 부쩍 늘었어요. 18세기 풍차가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이제는 글루텐 프리 빵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섰어요. 브런치라도 먹으러 나서면 열한 시에 벌써 앉을 자리가 없지요.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는 입장할 수 없는 바들도 있어요. 철물점과 수선집 사이로 내추럴 와인 바, 빈티지 소품점, 타투 시술소, 레코드 가게가 색종이처럼 끼어있는 것이, 여느 도시의 젠트리피케이션 양상과 다를 것 없지요. 나도 마침 풍차 마을로 건너와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우리 동네 청과점에는 없는 알배추를 지난달 이 동네에서 보았거든요. 알배추는 철이 지나 들어갔다길래, 아쉬운 대로 러시아산 겨자소스를 대신 샀어요. 이 동네에는 지난 십 년간 러시아로부터 망명한 지식인들이 다수 정착했어요. 러·우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인 밀도가 급격히 더 높아졌지요. 덕분에 식품점에는 키릴 문자로 성분이 쓰인 식자재가 흔하고, 골목에 ‘러시아 영화의 밤’ 같은 행사 포스터가 나붙기도 한답니다.


풍차 마을은 인구 구성 복잡하기로 소문 난 이스탄불에서도, 대대손손 다민족이 모여 살던 동네였어요. 상인과 노동자 계층이 주를 이루었지요. 19세기 중엽 인구 구성을 볼까요? 풍차 마을 인구 절반은 그리스 정교회인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아르메니아인과 세파르디 유대인이었어요. 무슬림은 소수 거주했다고 추정되고요. 거기에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온 가톨릭 선교사들도 작은 사회를 이루어 살았어요. 그때 지어진 유대교 회당과 그리스 정교회, 가톨릭 성당 건물은 아직도 건재해요. 여기에 기차역 축조 건으로 독일인 철도 노동자들까지 유입된 거예요. 독일인들은 풍차 마을에 독일인 학교와 유럽식 아파트를 지어요. 학교가 따로 필요했을 정도로 많은 인력이 이주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이에요. 독일인 학교는 현재 정부에 의해 복구공사가 진행 중이에요. 공사장 앞에 서면 하이다르파샤 역이 세워진 부두가 훤히 내다보이지요. 좁은 내리막길에 아담한 집들이 옹기종기 줄 서 있고 바닷가가 뒤에 펼쳐지는 풍경이, 마치 만화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 속 장면을 연상시켜요. 그 길목이 유독 아름다워, 이스탄불에 처음 왔을 때 일부러 몇 번이나 그 길목을 찾았었어요. 공사 중인 건물이 과거 독일인 학교였다는 사실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적 있었지요. 그러나 어떤 독일인들이 어째서 이곳까지 와 살았는지는 알지 못했어요. 그 밤, 칼가 단골들이 이야기해 주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학교까지 설립해 가며 완공한 그 기차역 얘기로 돌아갈까요. 하이다르파샤. 이름부터 닫힌 모음 없이 진취적이요 영웅적인 느낌을 주지요. 반복해 외울 맛 나는 주문처럼 들리기도 해요. 역의 용모도 이와 다르지 않아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역사는 지나칠 정도로 웅장해요. 잔잔한 마르마라해를 집어삼킬 듯 거대하고 장엄하지요.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이토록 과장된 설계도를 골랐음은 어린아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번지르르한 겉만 보아서는 전대미문의 인류 위업을 이루어야 했을 이 역사는, 오늘날 아무런 쓰임새 없이 가만히 서 있어요. 그 무능함에 울화가 치밀 지경이지요.
역사에는 제국주의라는 열차에 뒤늦게 올라타려던 독일 제국의 야욕이 담겨있어요. 해로를 통해 식민지를 주렁주렁 거느리게 된 영국을 견제하고자, 독일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오스만 제국과 손을 맞잡아 독자적인 노선을 개척하려 했지요. 지도를 보면 이해가 더 쉬워요. 검지를 들어 영국 땅에서 인도까지 해로로 이어보셔요. 대영제국은 당시 지브롤터 해협은 물론 지중해 해로까지 확보한 데다, 오스만령 이집트까지 자기네 영향권 아래 뒀어요. 수에즈 운하를 차지함으로써 해상 패권을 더욱 공고히 한 거지요. 거기에 대항할 물길은 딱 하나. 독일이 고안한 전략은 페르시아만을 노리는 것이었어요. 베를린에서부터 이스탄불, 알레포, 모술, 바그다드를 지나 오스만 최대 항구 도시였던 바스라까지 철도를 놓으면, 거기부터는 바닷길을 통해 동진할 수 있었지요. 바스라라는 지명은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그 밑에 붙어있는 하르그섬은 최근 미국으로부터 폭격 맞은 이후 뉴스에 빈번히 등장하지요. 거기서 남쪽으로 더 뻗어나가면 호르무즈 해협이고요. 사실 독일이 망상에 젖은 건 아니었어요. 이미 베를린에서 이스탄불까지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의 자매선인 발칸 열차가 다니고 있었거든요. 독일 입장에서는 나머지 반절, 이스탄불에서 페르시아만까지, 메소포타미아를 뚫는 철도만 놓으면 되었으니 승산 있는 게임이었던 거지요. 노선을 뚫기 위해 오스만 제국은 반드시 손잡아야 할 동업자였어요.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 후, 독일은 하이다르파샤 역을 필두로 내륙 철도를 놓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요.
계산과 전략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건,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예요. 하이다르파샤는 완공되었지만, 나머지 철로를 놓던 독일인들은 아나톨리아에서 일순 전출됐지요. 그들의 야망이 담긴 기찻길은 끊어진 채 폐허로 전락했어요. 하이다르파샤 역은 한껏 치장하고 요새 안에서 왕위 계승을 기다리다 잊힌 왕세자 꼴이 되지요. 두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은 패망하고 영토는 조각나요. 바스라는 일찌감치 날아가고요. 터키 공화국이 설립된 1920년대, 공화국은 끝내 열차를 국영화해요. 아나톨리아 열차로 이름 붙은 열차는 바스라는커녕 앙카라를 지나 기껏 코냐까지 닿지요. 물론 터키로서는 열차를 국내선으로 활용하며 덕을 톡톡히 봤어요. 그러나 그조차도 한 시절 일로 남았어요. 국가가 점차 개발되며 고속도로가 뚫리고, 비행기가 다니기 시작했으니까요. 이 기구한 역은 서서히 중요도가 낮아지다 대형 화재까지 연달아 발생하며 끝내 문을 닫아요. 2012년 이후 운행은 완전히 중단되지요. 2022년에는 근처에서 헬레니즘 시대 유물이 잔뜩 나와 재개발 계획에 차질을 빚어요. 기원전 7세기 세워진 고대 그리스 도시 칼케돈의 제기, 동전, 유골뿐 아니라 교회 터와 온수 시스템이 설치된 목욕탕 등 광대한 유적이 발견되지요.

일설에 의하면, 하이다르파샤 역 건축 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요. 철도가 깔릴 자리에 무덤이 하나 있었대요. 오스만 인부들은 이 무덤 주인을 하이다르 아버지라고 불렀다고요. 공사가 시작된 밤, 책임자의 꿈에 하이다르 아버지가 나와 훈계했대요. 날 방해하지 마라. 이 꿈을 무시한 채 공사는 진행되었고, 하이다르 아버지는 꿈에 다시금 나타나 방해하지 말랬지, 하고 말하며 책임자의 목을 졸랐대요. 이후 철로는 무덤을 비껴가는 방식으로 놓였어요. 그러나 묘주의 분은 말끔히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어쩌면 부지에 이천 년 가까이 젠가처럼 쌓였을 다민족적 한을 독일인들은 경시했던 걸지 몰라요. 팔자가 세도 너무 센 땅을 고른 죗값을 치른 걸지도요.
나는 별안간 이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독일어로 팔자를 쉭살schicksal이라고 해요. 베를린에 살 때 유대인 박물관 앞에 있는 커피숍 ‘팔자 카페Café des Schicksals’에 종종 갔는데, 때문에 이 단어는 노력도 없이 익혔지요. 나는 그 단어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동서를 막론하고 팔자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신이 정해준, 우주가 점쳐준, 등의 의미를 지녀요. 그러나 독일어의 경우 어딘가로 보내다, 배치하다라는 단어 쉬켄schicken에서 유래해요. ‘팔자‘가 말하자면 ‘배치됨’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거지요. 배치를 해 준 장본인은 누구라는지 알 수도 없어요. 초인적 존재나 운명론에 지배받는 다른 문화권 단어들에 비해 독일어에서는 행정적 뉘앙스가 강하게 묻어나요. 하이다르파샤 역을 짓기 위해 풍차 마을에 배치된 독일인들은, 땅이 지닌 영적 에너지를 간과했던 게 아닐까요? 공사에 돌입하기 전, 그들은 전방위적 굿판이라도 벌여야 했던 게 아닐까요? 혹은 그들이 뒤늦게 눈독 들인 제국주의는, 아무래도 그들 팔자에 없었던 게 아닐까요?
마크 아리얀은 풍차 마을만큼이나 배경이 복잡한 가수예요. 그의 부모는 아나톨리아 동부 도시 말라티아 출신이에요. 그들이 태어났을 당시에는 아직 오스만 제국이었겠지요. 그들은 레바논계 아르메니아인이었어요. 공화국 건국 이후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소수 민족은 탄압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각지로 흩어져요. 특히 대다수 아르메니아인은 미국이나 프랑스로 건너가요. 킴 카다시안의 증조부모가 아나톨리아 동부 출신으로, 이 시기에 도미한 대표적 아르메니아계 이민자지요. 마크 아리얀은 프랑스 남동부에서 태어나 나중에 벨기에로 이주해요. 거기서 샹송을 불러 얼마간의 호응을 얻지만, 그의 음악은 특히 레바논과 시리아, 이란 등지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어요. 이 곡은 어찌 보면 더 넓은 영토에서 사랑받고자 그가 쓴 노림수일지 몰라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이스탄불은 이런 식으로 이용하고 이용당해 온 도시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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