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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난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 예술가들을 의전하는 일을 했어요. 적게는 반나절, 오래는 몇 주 동안 한국에 머무르는 그들을 보고 다소간 깨달은 게 있어요. 내한 방문객들에게 최초로 각인되는 장소가 광화문이나 남산타워 같은 랜드마크가 아니라는 것. 박물관이나 팝업 스토어나 유명 맛집도 아니라는 것. 어떤 명소보다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공간, 그곳은 바로 편의점이었어요. 딱히 필요한 것도 없는데 계속 들락거리게 만드는 이 요상한 공간은 대체 뭐냐고, 그들은 한국 특유의 소비 촉진 문화를 비판하다가도 결국 편의점에 중독되고 말았지요. 브랜드마다 달리 진열되는 상품의 면면을 비교까지 해가면서요. 개중 골드스타를 기억하는 외국인들은 지에스25가 골드스타와 관련 있다고 일러주면 두 눈까지 희번덕거렸답니다.
내가 튀르키예로 이주한 후 가장 먼저 정을 붙인 장소도 편의점에 준하는 가게들이었어요. 준하는 가게라고 콕 집어 말한 이유는, 한국 편의점에 완벽히 상응하는 가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한 공간에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한국 편의점과는 달리, 여기서는 기능에 따라 상점이 나뉘어요. 구분은 크게 세 가지로 할 수 있겠어요.

첫째로, 바깔bakkal은 작은 슈퍼마켓이에요. 청과상이라는 의미의 아랍어 어근에서 이름이 왔지요.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바깔에서는 치즈, 요구르트, 올리브, 달걀, 빵, 차, 커피, 피클, 샤퀴테리 등의 식료품은 물론, 빗자루나 비누, 양초, 등유 등의 생필품, 신문과 잡지 등을 취급했어요. 현대식 슈퍼마켓에 의해 많은 역할이 대체되었지만, 여전히 동네 바깔에서 식료품을 구매하기를 고집하는 이들이 있답니다. 바깔에서는 보통 술을 팔지 않아요.

둘째로는 뷔페büfe예요. 튀르키예에서 뷔페라 함은 다양한 음식을 한데 제공하는 서비스나 공간이 아니랍니다. 토스트, 햄버거, 감자튀김 등의 간단한 끼니와 음료를 파는 곳을 의미하지요. 소나 양의 간, 완자 등을 빵에 껴서 팔거나 닭고기로 된 되네르 케밥을 제공하기도 해요. 우리가 편의점 간이 테이블에서 라면이나 도시락을 먹듯, 뷔페에서도 주린 배를 채울 정도 양의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지요. 페리에 올라타기 직전에,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에, 출출한 야밤에 뷔페에 들르면 늘 적당한 해결책이 주어져요. 뷔페에서는 탄산음료나 아이란(물에 희석한 요구르트), 물 등의 음료를 팔지요.



마지막으로 테켈tekel이 있어요. 테켈이 아마도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편의점과 가장 비슷하게 느껴질 터예요. 한국 편의점만큼이나 구색을 고루 갖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응급 상황에 필요한 건 웬만하면 구비되어 있어요. 어둑한 가게 내부에는 형광 조명으로 장식된 냉장고가 여러 대 나란히 놓여 있어요. 각종 주류가 거기 진열되어 있지요. 또한 스낵과 견과류, 말린 과일, 음료, 껌, 초콜릿 바, 담배를 필수적으로 판매해요. 소시지, 햄, 치즈 등의 안줏거리를 팔기도 하고요. 동네에 따라 바깔이 더 흔히 보이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테켈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도 있지요. 이는 그 동네가 주류 판매에 있어 얼마나 보수적 혹은 개방적인지를 드러내는 지표로 쓰여요. 즉, 신앙심이 얼마나 깊은 동네인가를 나타내지요. 오랫동안 그리스 정교회인이나 레벤트인이 거주해 온데다,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득실거리는 우리 동네에서 바깔은 콧배기조차 보이지 않는답니다. 반면 테켈은 오십 미터마다 하나 꼴로 자리하지요. 가장 하단에 사진에 보이는 가게는 바깔이라고 이름 붙었지만 실은 테켈이랍니다. 드라마나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인기 테켈이지요.
이 나라에 와서도 나는 거처를 여러 번 옮겼어요. 다른 동네나 지역으로 갈 때마다 단골 테켈이 생기곤 했고, 그러고 나면 적이라도 올린 듯 마음이 놓였어요. 에게해 반도에 살 때에도 어김없이 그랬지요. 매일 해 질 무렵이면 난 해변을 따라 산책하고 부둣가에 가 앉았어요. 소규모로 생선을 잡아 알음알음 지인들에게 파는 동네 어부들이 고깃배를 대던 부두였지요. 매 저녁 나는 똑같은 벤치에 앉았는데, 그 바로 뒤에 테켈이 하나 있었어요. ‘에멜 테켈’이라는 상호를 지금도 잊을 수 없지요. 거기서 나는 똑같은 화이트 와인을 사서 벤치로 가져와 사위가 컴컴해질 때까지 마셨어요. 예수님Isabey이라는 튀르키예 브랜드의 소비뇽 블랑이었지요. 내 기호를 파악한 테켈 주인은 언젠가부터 예수님 사 소비뇽 블랑을 꼭 냉장고 깊은 곳에 보관해 두었어요. 내가 가게에 들어서면 전동 오프너로 손수 코르크 마개를 따, 차디찬 예수님 병을 내게 건넸지요. 능수능란하게 전동 오프너를 다루던 주인은 오프너를 서른 해 전 결혼할 때 산 거라고, 그다음 해 태어난 딸 이름이 바로 에멜이라고 일러주며 테켈 곳곳에 붙은 그녀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어요. 재미있는 것이, 지금 사는 동네의 단골 테켈 입구에도 초상이 하나 붙어있어요.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테켈의 선대 주인 사진이지요. 그 어르신은 동네 주민들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던 모양이에요. 흑해 출신이던 그가 얼마나 독특한 사투리를 썼으며 풍채가 어떠했다든지 귀가 아프도록 들었으니까요. 연중무휴 여는 것으로 유명하던 그 테켈은 주류 판매가 금지된 야간에는 셔터를 내리고 전화 주문을 받았다고 해요. 전화로 조니 워커를 주문하면, 조니 워커를 아몬드도 없이 마실텨? 세상에 그런 법은 없지, 하고 마음대로 아몬드를 끼워서 보내는 식이었다고요. 그런데 그가 강권하는 안주가 주문하는 술과 여간 궁합이 좋았던 것이 아닌지, 손님들은 알면서도 맞춤 강매를 수락하곤 했다고 하지요. 테켈에 출입할 때마다 문간에 붙은 선대 주인의 사진을 보며, 만나본 적도 없는 그의 존재에 난 애틋함을 느끼곤 해요.

이곳의 테켈은 한국 편의점처럼 대형 리테일 회사의 대리점 개념이 아니에요. 개별 업장이지요. 이름도 제각각, 진열 형태도 제각각, 상점 규모도 제각각이지만 차양과 간판만은 모든 테켈이 통일된 디자인을 사용한답니다. 색깔만 조금씩 다른데, 그마저도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등 가짓수가 얼마 되지 않아요. 간판에 쓰이는 서체도 완전히 똑같지요. 처음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의 간판 개선 사업처럼 도시 미관 향상을 위한 지자체적 행정 사업이 아닌가 추측했어요. 그러나 원인은 전혀 다른 곳에 있더군요.
우선 테켈이라는 이름부터 훑어보도록 하지요. 테켈은 튀르키예어로 독점을 뜻해요. 19세기 말 세계적으로 여러 국가들이 유사한 방식을 채택했듯, 오스만 제국 후기에도 담배·주류·소금 같은 안정적 세수를 국가가 전매 형태로 관리했어요. 오스만 담배 전매 회사와 공화국 초 국가 전매 체계를 거쳐, 1925년에 들어 테켈이라 불리는 국가 독점 기관이 형성되었어요. 한국담배인삼공사의 전신인 전매청 비슷한 기관으로 시작한 거지요. 한국담배인삼공사가 에쎄나 레종 같은 담배를 직접 개발했듯, 테켈에서도 튀르키예 전통 술인 라크를 제조해 팔았어요. 예니 라크Yeni Rakı나 테킬다으 라크스Tekirdağ Rakısı처럼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이어오는 국민 라크 브랜드들이 국가에 의해 만들어졌지요. 현재 에르도안 정부가 주류 판매에 여러 제한을 두는 것에 비해, 과거에는 완전히 다른 행보를 걸었음이 흥미롭지요. 세계적 흐름에 따라 테켈 역시도 결국 민영화되어요. 그러나 민영화 이후 세계적으로 진출하며 성장한 KT&G와 달리, 안타깝게도 테켈은 외국계 회사에 매각되고 말아요. 담배는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가, 주류 부문은 다국적 주류 기업 디아지오가 사들이지요. 전매품을 팔던 상점이라는 이름만이 그대로 남아, 주류와 담배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오늘날까지도 테켈이라고 불리게 되었지요.
그러면 다시 원 질문으로 돌아가, 어째서 테켈의 간판과 차양은 다 똑같이 생겼을까요? 지난번 편지에서도 말씀드렸듯, 튀르키예 술값은 매우 비싸요. 주류세가 엄청나게 높기 때문이지요. 또한 2013년부터는 법률이 강화되어 주류의 직접적인 광고가 불가능해졌어요. 영상, 지면, 옥외 관계없이 모두 불법이지요. 연예인이 등장하는 우리나라 소주나 맥주 광고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어요. 그러나 그런 훼방(?)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술은 소비되어요. 먼저 전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관광객 규모를 무시할 수 없지요. 튀르키예에는 매년 5천만 이상의 외국인이 방문하는 것으로 집계되는데, 이쯤이면 아무리 음주를 장려하지 않더라도 국가 차원에서 주류 판매를 전면적으로 막을 수는 없겠지요. 어쨌거나 튀르키예는 세속주의 국가니까요. 내국인의 경우, 지역별 편차가 큰 편이에요. 에게해나 지중해 연안, 이스탄불로부터 서쪽인 트라키아 지방은 주류 소비율이 높은 편이고, 동쪽 내륙으로 갈수록 낮아지지요. 제도 역시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리 적용되는 분위기예요. 바닷가나 관광객이 많은 지역에서는 아무래도 감시가 느슨한 편이지요. 밤 10시 이후로 주류를 구매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테켈 주인들은 통상 들키지 않게 들고 가라고 비닐봉지에 꼭꼭 담아 챙겨주지요. 유럽에서 의외로 야외 음주를 할 수 없는 도시들을 종종 마주치는데, 이에 비해 튀르키예 일부 지역은 되려 자유로운 편이에요. 저녁 무렵 해변으로 나가면 접이식 낚시 의자를 깔고 앉아 눈치껏 맥주를 즐기는 이들을 볼 수 있지요. 아예 쿨러와 아이스박스까지 바리바리 이고 나와 안주를 푸짐하게 차려 먹기도 하고요.
이런 현실 탓에 주류 업체들은 광고를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에 놓여 있어요. 대놓고 광고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미미한 것도 아닌 소비층을 놓칠 수 없으니까요. 그리하여 이들이 택한 방식은 테켈을 포섭해 광고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에요. 튀르키예에는 오늘날 라이벌 격인 두 주류 업체가 존재해요. 에페스Efes와 투보그Tuborg지요. 이름이 다른 현지 맥주나 기네스, 벡스, 칼스버그 등의 수입 맥주들도 따지고 보면 모조리 이 두 회사에 속해 있지요. 에페스나 투보그와 계약을 맺은 테켈들은 노란색이면 노란색, 파란색이면 파란색, 브랜드를 상징하는 색상의 간판을 달고, 해당 업체의 제품을 더 많이 발주하는 대신 냉장고나 매대, 간판 등의 기물을 제공 받아요. 주류 업체는 주류명을 대놓고 홍보할 수 없으니 브랜드를 대변할 수 있는 슬로건을 만들어 붙이지요. 그 슬로건은 테켈 뿐 아니라 그들이 협찬하는 바나 공연장에도 비밀 구호처럼 각인되어요. 최근 여기서 한 공연장을 운영하는 한 친구는 이렇게 토로했어요. 법이 새로이 바뀌어 더이상 이벤트 개최 시 주류사들의 협찬을 받을 수 없게 됐다고요. 안타까운 일임이 틀림없지만, 사실 이는 오늘내일 일이 아니랍니다. 아나톨리아에서 술에 대한 금기는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가 풀리기를 반복했지요. 그럼에도 술의 맥은 완전히 끊어진 적이 없었고요. 끊기기는커녕, 나라에서 팔을 걷고 나서 전매를 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어느새 당신께 편지를 쓴 지도 두 달이 넘었더군요. 이스탄불에는 완연한 봄이 도래했어요. 공원과 해변에는 낚시 의자를 깔고 앉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지요. 다음 편지에서는 그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얼 마시는지, 그 얘기를 심층적으로 해드릴게요.
에멜 테켈에서 산 예수님 소비뇽 블랑을 모두 비우고 나면, 저 멀리 내다보이는 그리스 시미 섬에는 희미한 빛마저 소등되고, 청청한 에게해 수면 위로 달빛이 휘영청 쏟아졌어요. 집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마라도나라는 이름의 술집을 지나야 했어요. 마라도나와 제법 닮은 노년의 사장은 늘 가슴께까지 셔츠를 풀어 헤치고 야외 테이블에서 라크를 마시고 있었지요. 처마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이 노래가 종종 흘러나왔어요. 이즈미르 출신의 세파르디 유대인, 다리오 모레노는 이 명곡 하나로 단번에 설명되는 가수지요. 매일 밤 보드카, 라크, 와인, 마실수록 사람은 미쳐가고, 망가져 버려! 제발 이 고통에서 구해 주세요, 주여. 내가 마시던 와인 이름은 그래서 그렇게 붙었을까요? 예수님 와인이라고요. 신앙심 저조한 바닷가에서 최소한의 죄라도 사함 받으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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