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낯설고 물선 것

2026년 7월 28일

2026.07.28 | 조회 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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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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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토마토를 넣고 밥을 짓다가 옐로 서브머린을 흥얼거리는 나를 발견했어요. 곧 나는 앨범 전체를 재생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곤 그렇게 했어요. 특정 곡을 듣고 싶었다기보다, 옐로 서브머린 다음에 온리 더 노던 송, 그 다음에 올 투게더 나우, 그다음에는 헤이 불독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그리웠어요. 한 곡에서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정적의 길이까지도 한때는 내 숨소리처럼 익숙했으니까요. 소니 은색 전축과 하인즈 에델만의 몽환적인 그림들.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팩토리 걸, 60년대에 열광하던 열세 살 시절.

 

웬 비틀즈야? 내 동거인은 침실에서 나오며 눈을 비볐어요. 그러게 말이었어요. 60년대에 마음을 빼앗겼던 청소년기를 보냈다곤 해도, 비틀즈의 음악을 듣지 않은 지는 십수 년이나 되었어요. 밥상을 물리고 가스레인지를 훔치는데 불현듯 그 이유를 깨달았어요. 전날 잠에 들기 전 읽은 책의 제목이 그제야 떠올랐거든요. 어머니 내게 오시네Mother Mary Comes To Me. 꿈에서 나는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묘사한 그녀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는 한국인 여성이었어요. 모진 어머니를 떠나 먼 도시에서 대학엘 다니고, 뜻밖에 영화계에 발을 들이며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는···. 책 속에서 로이는 유부남으로부터 이러한 답장을 받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편지를 썼다고 했어요. 작가가 되어 볼 생각은 없어?

 

바로 그 대목에서 전자책을 끄고 잠에 들었던 거예요. 작가가 되어 볼 생각은 없어? 나 또한 타인에게서 이런 권유랄까, 제안이랄까, 계시랄까, 하여간에 소질 있는 이야기꾼임을 인정받기를 염원했던 때가 있었어요. 아마도 그 목마름의 화염은 몸피만 늘였다 줄였다 하며 죽을 때까지 내 안에 남아 있을지 모르지요. 도통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는 밤을 보낸 후, 두 영역을 차라리 깁고자 내 뇌가 신호를 보냈나 봐요. 비틀즈 노래를 들으라.

 

내가 유년을 보낸 고장에는 6번 채널이 불통이었어요. 케이블은 고사하고, 텔레비전을 켜면 오로지 7번과 9번, 11번, 13번만 나왔지요. 전국적으로 인터넷이 깔리기 시작한 즈음에도 설치 기사는 우리 동네는 너무 두메라 못 온다고 했어요. 그토록 깡촌에서 자란 덕에, 나는 무료의 공백을 상상력으로 채워야만 했어요. 특정 국가나 시대나 인물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어요. 리스본이라는 이름만 듣고도(어떻게 수도 이름이 리스본일까!) 덴푸라를 베어먹으며 포르투갈의 경사진 골목골목을 돌아보는 꿈을 꾸었고, 만화 위인전 시리즈의 비틀즈 편을 읽고는 리버풀 그루피의 삶을 그려 보았지요. 돌이켜 보니 비틀즈에 대한 관심은 그때 벌써 똬리를 틀었었네요. 성장하면서는 영화를 통해 내 상상에 색채를 더하기 시작했어요. 토드 헤인즈의 ≪벨벳 골드마인≫을 몇 번이나 돌려 볼 때는 글램 록 전성기의 밤 골목이 내 것인 듯했고, 페드로 알모도바르에 한창 미쳤을 즈음에는 내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증상을 신경 쇠약과 연관 지었지요. 역시, 난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야. 거스 밴 샌트의 초기작에 빠져들면서는 북미를 무전 횡단하면서 약국을 터는 상상을 해 보았고요. 현실은 군대처럼 엄격한 여고와 입시 미술학원을 오가며 두발 규정을 어겼거나 그림을 미완성했다고 당구채로 엉덩이를 먼지 나게 두들겨 맞던 고교생이었지만요.

 

베를린에서 영화를 전공하며 극본을 써보기 시작했을 무렵, 내가 빠져든 시대는 유럽의 벨 에포크 후기였어요. 과학과 이성에의 맹신이 전쟁으로 인해 산산조각 나고, 허무주의가 그 자리를 메우고, 전란을 기회 삼아 이득을 취하려는 포식자들이 출몰하고. 이러한 양상이 오늘날의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여겨졌거든요. 학생 신분에 시대극을 쓰는 건 분수를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내가 쓰던 극본은 자연히 곧 대체 역사 소설의 형태를 띠게 되었지요. 내가 염두에 둔 사건이나 예술 사조는 분명 서유럽을 배경으로 했어요. 나는 특히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에 주목했지요. 전쟁과 무기를 찬양해 마지않았던 이 급진적 예술가들에 대해 칼럼을 쓴 적도 있었거든요. 일부 미래주의자들은 아드리아노플(오늘날 튀르키예 에디르네)에서 일어난 발칸 전쟁으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얻었노라 밝혀요. 발칸 전쟁은 최초로 항공기가 쓰인 전쟁 중 하나로 꼽혀요. 공중에서 정찰 다니거나 폭격을 가하는 항공기는, 당시에만 해도 따끈따끈한 신종 위협이었지요. 미래주의자들은 이 신기술에 환호하며 아드리아노플 전장 소음을 예술적 도구로 이용했어요. 나는 그들이 예술 활동을 펼친 유럽이 아니라, 소음을 채집한 현장-즉 아드리아노플로 이야기의 무대를 옮기고 싶었어요. 주인공은 전장 소음에 배치되는 인물이어야 했지요. 고민 끝에 나는 콘스탄티노플 출신 여성 예술가를 한 명 탄생시켰어요. 그러고 나니 또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어요. 동시대 우리네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지? 나는 본능적으로 이야기의 초점을 동쪽으로 더 밀어내고 싶었어요. 그리하여 19세기 후기 오스만 제국과 동아시아 간의 교류사를 뒤적거리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실존 인물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일본인 야마다 토라지로가 그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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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토라지로는 1866년 군마에서 태어난 사업가로, 콘스탄티노플에 나카무라 상점이라는 가게를 운영했어요. 그가 오스만 제국과 연을 맺은 것은 에르투으룰호 침몰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1890년 일본 친선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던 오스만 군함이 태풍을 만나 500명에 달하는 군인이 사망한 비극적 사건이었지요. 이에 일본에는 전국적인 성금 모금이 이뤄지고, 당시 외교부 장관인 아오키 슈조와 친분이 있던 23세의 젊은 야마다가 이 성금을 술탄 압뒬하미드 2세에게 직접 전달하게 되어요. 메이지 지식인으로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란 야마다는 이미 중국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어요. 특히 그의 프랑스어 지식은 오스만인들과 소통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지요. 그는 처음 콘스탄티노플에 발을 내디딘 후 스물 두 해 동안이나 체류해요. 그러면서 민간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지요. 그는 술탄의 허가 하에 콘스탄티노플 제일 가는 중심가 페라에 상점을 개점했어요. 거기에 일본산 도자기와 차, 비단, 칠기, 심지어는 광천수까지 들여와 판매했지요. 일본에서 오스만 제국까지 물을 날라 팔았다니! 그 물은 누가, 왜 샀던 걸까요? 무역 이외에 그는 문화적 교류에도 힘썼어요. 그럴 만한 소양이 충분했던 것이, 야마다는 다도 유파인 소헨류 후계자로 일찍이 전통 다도를 익혔어요. 이를 바탕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차회를 열어 일본의 차 문화를 알렸지요. 또한 오스만 정부 관료나 군 관계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다지요. 아타튀르크마저 그에게 일본어를 배웠다는 설이 있을 정도지요.

 

오스만 제국과 일본 사이의 이런 우호적 교류에는 시대적 배경도 한몫했어요. 굴욕적으로 영토를 잃으며 국채에 허덕이던 오스만 제국은 서구 열강이 아닌 아시아 변방 국가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아요. 저게 가능한 거였어? 일본이 청나라를,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하는 광경에 대리 희열을 느끼기까지 하지요. 오스만 후기 소설가이자 여성 운동가인 할리데 에딥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을는지 모르겠어요. 한때 지폐 앞면에 초상이 삽입되었을 정도로, 에딥은 튀르키예 문학사와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지요. 러일전쟁이 일어난 해에 득남한 그녀는 아들 이름을 토고라고 지어줬어요.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한 일본 해군 사령관 토고 헤이하치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지요.

 

야마다는 확실히 성공한 사업가였으며 전략가였지만, 그의 업적을 살펴보면 단순히 잇속만을 위해 오스만에 머문 것은 아닌 듯해요. 그는 메이지 월간 교양지 ≪태양太陽≫에 오스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글을 연재했어요. 이 기사들을 발전시키고 다듬어, 1911년에는 ≪튀르키예 견문록土耳古画観≫이라는 단행본을 펴내기도 하지요. 갈라타 다리, 들개, 오스만 묘지, 모스크, 목욕탕 등 그는 눈에 보이는 오스만 제국의 풍속을 세세하게 묘사했어요. 직접 그린 삽화까지 곁들여서 말이지요. 내가 당신께 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글을, 야마다는 백 년도 더 전에 썼던 것이지요. 반대로 말하면, 일본인들은 백 년도 전에 안방에 누워 콘스탄티노플의 풍경을 그려볼 수 있었던 거지요. 현지 통신원의 생생한 칼럼을 통해 말이에요.

단행본 <튀르키예 견문록>의 일부
단행본 <튀르키예 견문록>의 일부

거의 매일, 물담배를 든 야마다와 안방에 누운 일본 독자들의 입장을 오가는 기분이 들어요. 낯선 것을 쓰고, 물선 것을 읽지요. 내가 미처 듣지 못한 것, 보지 못한 것, 맡지 못한 것, 몸에 묻히지 못한 것, 입에 넣고 삼키지 못한 것. 타인이 쓴 이야기를 읽고 나면 분명 내 것이지만 새로운 무언가가 잉태되었음을 느껴요. 이물감은 삶에의 의지로 변환되지요. 내가 쓰는 이유 역시 그것일 터예요. 세상에 끝없이 새로운 것들이 탄생하기를 소망하기에. 삿담 테이프니, 오스만 제국이니, 미래주의니 하는 것들이 부질없이 느껴져도 나는 계속 쓸 생각이에요. 어느 유부남이 내게, 작가할 생각 없어? 물어오지 않는대도.

 

<아나톨리아 편지> 영상으로 만나보기: 바르쉬 만초 편

오늘의 편지에 내가 덧붙이고 싶은 곡은 바르쉬 만초의 <민트, 레몬 껍질>이예요. 특히 1996년 도쿄 콘서트 버전을 소개해 드리고자 했지요. 오스만 제국 후기에 야마다 토라지로가 있었다면, 근현대 인물로는 아나톨리아 록의 창시자 바르쉬 만초가 있어요. 그는 아시아, 특히 일본에 매우 큰 애정을 가졌으며 일본에서 실제로 큰 인기를 얻었어요. 마침 집 근처에 바르쉬 만초 박물관이 있어, 작년 여름 박물관과 일대를 영상으로 담아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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